017화.
삶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라엔은 방 안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점심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막연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균열은 끊임없이, 더 크게 생기고 있는데 내가 알아내는 것들은 작은 조각이었고, 이 세상이라는 커다란 퍼즐을 맞춰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새로운 현상들은 끊임없이 나타났고, 가설은 하나둘 늘어나기만 했다.
개중에는 틀리기를 바라는 가설도 있었고 맞기를 바라는 가설도 있었다. 전자가 월등히 많았다.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이어지는 생각을 애써 끊어 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에만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맞다. 이한, 담아 준 마법이 슬슬 떨어져 갈 텐데.’
이참에 더 필요한 마법이 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이한과 송하견이 같이 쓰는 방이었다.
생각해 보면 둘은 풍기는 분위기가 꽤 비슷했다.
자기의 부상을 선이한이 치료했다고 말하는 송하견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치료 마법 같은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놀라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놀라기는 했으려나. 티가 안 날 뿐이지. 송하견은 아카데미에 다닐 때부터 그랬다. 같이 지낸 시간이 꽤 오래되었는데도 자기 이야기나 생각을 별로 꺼내어 놓는 편이 아니었다.
선이한도 마찬가지였다. 보기에는 어딘가 부드럽고 말랑한 사람처럼 보이는데도, 선을 그어 둔 것처럼 늘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듯했다.
생각에 빠져 걸음을 옮기니 방 앞으로 금방 도착했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붉은 노을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피 냄새?’
비릿한 혈 향이 공기 중에 얕게 스며 있었다.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송하견인가? 어디 다친 건가? 혹시 선이한이 다친 거라면 어떡하지? 치료 마법은 자기에게는 쓸 수 없다고 했으니 큰일이었다.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방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
조용히 열린 문 뒤로 선이한이 있었다. 선이한은 창 바로 앞에 놓인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반쯤 돌려 기대앉은 채였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린 채 무릎을 올려 쪼그려 앉은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노을이 선이한에게로 곧장 향했다. 얇은 백색 옷이 연한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어져 있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팔뚝에 닿고 있는 것은,
‘칼?’
섬뜩하게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피가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얀 손에 작은 칼이 쥐어진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작게 미소 짓는 표정에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일을 드디어 해내는 듯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이한?”
생경한 장면에 선이한의 이름을 붙잡듯이 불렀다.
선이한이 나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을이 그림자처럼 진 얼굴 위로 푸른 눈동자가 홀로 빛났다.
나에게로 향한 선이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켜 당황했다는 듯이.
“왜…. 아니, 이한. 잠깐, 잠시만 기다려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행동을 멈추게 해야 했다.
‘뭐 때문에? 아니, 언제부터?’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붕대가 보였다. 검붉은 핏빛이 스며 있었다. 피 냄새를 막아 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 붕대였다.
저런 건 어디서 난 거지. 송하견의 방인가.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충동적인 행동일까? 아니면 습관? 처음 본 날에도 과호흡이 온 걸 보면 전에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그날 이후로 몇 번을 슬쩍 돌려서 물어봤지만 선이한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선이한이 자기 일을 얘기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어도 안에 쌓아 두고 있기만 할 터였다.
내가 선이한의 기억을 한번 건드려서, 그래서 더 견디지 못한 건가?
꺼내지 않은 감정은 마음에 고이고, 마음에 고인 감정은 결국 썩는다.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간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후두둑.
선이한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망가져 가는 사람에게서 새어 나오는 눈물 같았다.
나와 눈을 마주한 선이한이 환하게 웃었다. 떨리는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 올려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철렁 떨어졌다. 붉은 핏방울과 붉은 노을. 온통 새빨갛게 물든 세상 속에서, 선이한만이 푸른 눈동자에 나를 말갛게 담은 채 웃고 있었다.
홀로 물들지 않은 채로. 마치 동떨어진 것처럼.
“…이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불안과 불확실함. 나는 나조차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감히, 당신에게 손을 뻗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였으니까. 선이한의 고통을 눈앞에서 본 것이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선이한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방울져 떨어지는 핏방울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
라엔은 순식간에 내 앞으로 이동해 왔다. 그러고는 내 손에서 칼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라엔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도 더 이상 칼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므로 순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이 방 안의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라엔의 눈가도 붉어 보였다. 라엔이 밝은 금안에 나를 조용히 담아냈다.
입술을 한참 짓씹고 있던 라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엔이 무어라 말하는 순간,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란 상태 창이 떠올랐다.
「<미래시 초급> 스킬 사용!」
「다음 사용까지 남은 쿨타임: 24시간」
타이밍 한번 절묘했다.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각.
연구실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모노클을 쓰고 노트에 뭔가를 기록하는 송하견이 보였다.
송하견의 바로 앞에는 유리로 된 커다란 통이 둥둥 떠 있었다. 그 안에 잿빛의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지난번 미래시에서 본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마물의 찌꺼기인 듯싶었다.
책상 위에는 수정구가 올려져 있었다. 송하견이 펜의 끝부분으로 수정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위쪽으로 지도처럼 보이는 그림이 떠올랐다.
지도에는 선명한 엑스 표시가 여러 개 그어져 있었다. 송하견이 손끝으로 한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곳에도 같은 표시가 그려졌다.
화악.
그리고 순식간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스킬! 업그레이드> 성공!
‘미래시’ 초급 >> ‘미래시’ 중급」
시야가 선명해지자마자 상태 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내 앞에 서 있는 라엔의 로브 자락이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 라엔은 내 왼팔을 위쪽으로 들어서 천으로 상처 부위를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닿아 있는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천을 감싸 쥐고 있던 라엔이 내게 눈을 맞춰 왔다. 어쩐지 라엔의 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표정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듯 묘했다.
“이한.”
아직 몸은 떨리고 있었음에도, 라엔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삶을, 그만두고 싶었나요?”
라엔의 뺨을 타고 투명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정작 라엔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목소리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내가 잘못 봤나?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라엔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삶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었나요?”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라엔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작은 흐느낌조차 없었다.
잠깐만. 아무래도 라엔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라도 해명해야 했는데, 딱히 꺼낼 말이 없어서 그런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스킬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그런 거였다? 이건 안 되고. 미래를 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중을 위해서 스킬을 올려 두려고 했을 뿐이니까.
“라엔 형. 이제는 안 그럴게요.”
어설픈 변명처럼 들릴 바에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일단은 상황을 좀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래시 스킬도 중급으로 올랐으니 이제는 팔을 그을 필요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엔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아직도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한. 내가 미덥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요.”
갑자기? 라엔이 무슨 맥락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라엔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마법도 잘 쓰고, 송하견을 도와 균열 연구를 할 만큼 유능하고.
물론 아직도 퀘스트 성공 알림이 뜨지 않는 걸 보니 라엔은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라도 괜찮다면.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조용히 말을 이은 라엔이 꾹 눌러 지혈하고 있던 천을 살짝 떼어 확인했다. 그러고는 내 팔을 아래로 내려 줬다. 피가 거의 멈춰 있었다.
라엔이 손을 뻗어 내 머리 위로 살짝 올렸다. 가만히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가 어쩐지 선명하게 남은 듯했다.
“담아 두고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더라고요.”
라엔이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무렇지 않은 듯 쓱 닦은 라엔이 빨간색의 액체가 담긴 병을 소환했다. 내 팔뚝에 그 액체를 흘려보내며 라엔이 말을 이었다.
“조금 아플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형. 안 아파요.”
시스템 덕분에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까 정말 괜찮았다. 괜히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라엔이 눈을 잘게 찡그렸다가 금세 풀었다. 그러고는 잠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아도, 그건 괜찮지 않은 거예요.”
라엔은 내 팔뚝에 흘렸던 액체를 얇은 천으로 조심히 닦아 냈다. 살짝 스치는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라엔은 곧 새 붕대를 꺼내 와서 감으며 말을 이었다.
“천천히, 언제든 얘기해 줘요. 기다릴게요, 이한.”
내게로 맞춰 오는 곧은 시선이 박힐 듯이 또렷했다. 노을의 붉은 빛이 라엔의 얼굴을 비췄다. 옅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라엔 형은, 나를 믿어 줄 거예요?’
문득 그렇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필수 퀘스트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성공했더라도 이곳이 게임 속일지도 모른다고, 내 눈엔 시스템 창이 보이고 퀘스트가 주어진다고 말하긴 어렵겠지. 그러니 라엔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일도, 솔직하게 물어보는 일도. 영영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어쩐지 마음이 썼다.
곧 1층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열린 방문으로 흘러 들어왔다. 다들 돌아온 것 같았다.
“이건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라엔 형.”
내 말을 들은 라엔이 몸을 흠칫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