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이미 충분하니까
라엔의 질문은 타당했다. 그러나 치료하기는 나에게 못 쓴다. 애초에 나는 패시브 효과 때문에 아픔을 느끼지 않으니까 필요도 없다.
지금 속이 메스꺼운 이유는…. 더 말을 않겠다. 라엔이 의심만 좀 풀어 주면 될 것 같은데 참 쉽지 않았다. 말이 괜히 불퉁하게 나왔다.
“용사에게만 쓸 수 있어요.”
라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
첫 번째 치료하기 보상으로 받은 것도 ‘용사 외 치료하기’였으니, 아마 보통 때는 치료하기가 용사에게만 적용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느낌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어물어물 말했는데 라엔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내가 말을 안 한다면 더 캐묻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지난번 이후로 조심하는 듯했다. 물론 고맙긴 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라엔이 박율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리더 형, 이한은 용사 서약을 안 하나요?”
“음, 그럴 것 같네.”
박율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한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힘이어서 그래.”
박율이 대략적인 설명을 해 줬다. 용사 서약은 선택받은 용사인 박율에게 1차로 확인받고, 신전에 가서 2차로 서약을 맺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박율은 선택받은 용사가 된 이후 특별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걸 사용하면, 그 상대가 용사가 될 운명인지 아닌지 얼핏 보인다고 했다.
“이한이한테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 마치 밀려나듯이.”
내 쪽을 바라본 박율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한이가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놀랐었지, 이한아.”
조용히 사과하는 박율에게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걱정이나 사과를 받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박율이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박율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다 시스템 때문인데 이걸 말할 길이 없으니 막막했다.
“이한도 용사 서약을 맺으면 좋을 텐데요.”
라엔이 조용히 말했다. 박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나에게로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어쩐지 표정이 조금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저번부터 가끔, 박율이 이런 얼굴일 때가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긴가민가했지만 아무래도 나를 경계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다들 함께 지낸 시간이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나는 갑자기 합류한 거니까.
게다가 박율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시스템 때문일 것이었다. 당연히 수상할 만했다.
‘그래도, 이대로도 괜찮아.’
박율은 모두를 이끄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신중함은 좋은 덕목이었다. 그러니 그 작은 경계심마저 풀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페널티를 받는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더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박율은 기본적으로 내게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박율에게 시선을 맞추자, 박율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린 유리잔에 차를 다시 따라 줬다. 따뜻했다. 이 모든 시간이 내게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아까보다 조금 낮아진 한낮의 태양이 창 안으로 빛을 쏟아 내렸다. 여전히 평화로운 오후였다.
◇
하루하루가 금방 흘렀다. 어느덧 사흘이 훌쩍 지났다.
페널티가 유지된 사흘간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견딜 만은 했던 것 같다. 원래 다 그렇다. 그 순간만 버티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달각.
입에 문 막대사탕을 굴렸다. 달콤한 과일 맛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페널티가 다 끝난 오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 민주혁이 다행이라며 주고 간 것이었다.
-야, 선이한. 이제 좀 괜찮아? 며칠간 밥도 제대로 못 먹더니. 다행이네.
밥을 못 먹었던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탕이 꽤 맛있었으니 됐다.
1층 홀을 조용히 걸었다. 벽에 난 커다란 창으로 노을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까 점심 즈음에 다들 나갔으니, 레데오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요즘 들어 다들 나가는 일이 잦았다. 혼자 가든, 몇 명이 가든, 여기저기 다녀오는 모습이 꽤 바빠 보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우리는 몇 안 되고, 세상은 넓으니까.
박율의 말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무척이나 용사다운 말이었다.
다들 바빴지만, 박율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꼭 함께 나서니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박율에게서는 어딘가 깊고 무거운, 그런 사명감이 느껴졌다. 선택받은 용사여서일까.
계단을 올라가서 방문을 열었다. 오늘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이었다.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 옆면을 밀어 올리니 위쪽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솟아올랐다.
사각.
익숙하게 손을 들어 팔뚝 안쪽을 깊게 베어 내렸다. 핏방울이 슬금슬금 맺히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핏방울 위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비릿한 혈 향이 올라왔다. 아프다는 느낌이 없었기에 뚝뚝 떨어지는 진한 핏방울이 어쩐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상태 창이 파랗게 깜빡이고 있었다.
「<미래시 초급> 스킬 사용!」
「다음 사용까지 남은 쿨타임: 24시간」
순간 시야가 깜깜해졌다. 정신이 깊은 곳으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푸욱.
바닥에 검은색의 끈적한 마물이 늘어져 있었다. 그 안으로 기다란 검을 찔러 넣는 박율이 보였다. 마물에게서 붉은색의 빛 알갱이가 퍼져 나왔다.
그 알갱이는 공중에서 둥글둥글 뭉쳤다. 그러고는 박율이 들고 있는 검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마물이 잿빛으로 파삭 말라비틀어졌다. 박율이 바로 검을 빼냈다.
박율이 눈을 깜빡이는 찰나, 연녹색 눈동자에 얼핏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악.
순식간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여전히 붉은 노을빛이 방 안으로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멍한 정신을 깨웠다. 다행히 이번에 본 미래에도 별다른 큰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띠링, 소리와 함께 새로운 상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스킬! 업그레이드> 진행 중!
‘미래시’ 초급 >> ‘미래시’ 중급
진행 상황 (2/10)」
오늘이 딱 이틀째였으니 계산은 정확했다.
여전히 팔뚝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끈적한 피가 손끝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에도 피가 쉽사리 멎지 않을 듯했다.
손에 맺힌 핏방울을 바닥으로 툭 털어 냈다.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는데, 뭐. 이유 없이 이러는 것도 아니고, 다 스킬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니까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엊그제 드디어 미래시 초급 스킬을 확인했다. 사용하는 방법은 미래시 획득 퀘스트를 할 때 신전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과 같았다.
‘사용자의 피를 바치고 특정 주문을 외운다.’
그러나 나는 시스템이 스킬로 부여했기 때문인지 특정한 주문까지는 필요 없었다. 그냥 피를 내며 미래시를 사용한다고만 생각하면 됐다.
신전에서 책을 읽으며 딱 한 번 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스킬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미래를 보지는 못했었다.
‘아깝게 상처만 냈었지.’
그래도 그때 책을 열심히 읽은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 여덟 번만 더 사용하면 중급 스킬로 올라갈 수 있었다.
「<스킬! 설명> ‘미래시’ 중급
미래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자동으로 미래를 보여 줘요!」
설명만 읽어 봐도 편리함이 느껴졌다. 중급으로 스킬을 올려놓기만 하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책상 서랍에서 붕대를 꺼내서 훌훌 풀었다. 상처를 낸 부근에 대강 감으니 흰색 붕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피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면 된 거지.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종이테이프로 붕대 끝을 고정했다. 그리고 품에서 빳빳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걸 찢으니 빛이 반짝 나면서 바닥에 흥건했던 피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종이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지난번에 라엔이 주고 간 것이었다. 방금 그 종이에는 클린 마법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라엔이 마법 쓰는 걸 직접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쓸 수가 없었다. 안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하니 좀 아쉽기는 했다.
-괜찮아요, 이한. 그러면 일단 기본적인 마법만 담아서 줄게요.
더 필요한 마법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덧붙이며, 라엔은 허공에 작은 종이를 수십 장 띄웠다. 그리고 그 안에 마법을 하나씩 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라엔이 나를 더 딱딱하게 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게 말도 안 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라엔의 의심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상태 창이 뜨지 않은 채였으니까.
그런데 라엔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매몰차지 않았다. 오히려 세심하게 신경 쓰는 편이었다.
상대에 대한 의심과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별개라는 걸까? 그렇다면 라엔은 정말 배울 만한 사람이었다.
지금 내 품 안에는 라엔이 건네준 종이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이렇게나마 마법을 쓸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지금쯤 나는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었겠지.
걸음을 옮겨 창문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공기 중에 스며 있던 옅은 혈 향이 흩날려 사라졌다.
노을이 거의 저문 하늘에, 어느덧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
며칠 사이 날이 추워졌다.
민주혁은 더 두툼한 겉옷을 걸쳤고, 라엔도 묵직한 로브를 쓰는 듯했다.
송하견은 와이셔츠 위로 연한 회색의 니트를 덧대어 입었다. 한쪽으로 길게 내려뜨려 묶은 보랏빛 머리와 어울렸다.
박율은…. 박율은 잘 모르겠다. 딱히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한아.”
건물 바로 앞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박율이, 벽에 기대선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저 꽃들은 사시사철 피어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날이 꽤 쌀쌀해졌는데도 색색의 꽃들은 여전히 생생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추운데 왜 나왔어.”
박율이 눈을 접어 웃으며 허공에 푹신해 보이는 옷을 소환했다.
박율의 손으로 옷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하늘색과 흰색이 묘하게 섞인 듯한 색을 띠고 있었다. 꼭 옅게 흩어진 구름처럼 금방이라도 하늘에 스며들 것 같았다.
“따뜻하게 입어야지. 요즘 바람이 차더라.”
박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나에게 옷을 살짝 덮어 주었다. 제대로 팔을 끼워 넣으니 품이 넉넉하고 가벼웠다.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음, 생각보다 크네.”
그렇게 말한 박율이 내 머리칼을 살살 헤집으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더 커야겠다.”
나도 작은 편은 절대 아닌데.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다들 너무 큰 거였다. 박율은 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억울한 마음을 삼키며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도 머리를 헤집고 있는 박율의 큼직한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박율이 순간 덜걱 멈추는 듯했다.
“…이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