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메스꺼움
라엔의 말이 아리송하게 들렸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 얼굴을 살핀 라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막연한 말이었네요. 아직 치료 마법에 대해서 밝혀진 게 없으니까,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미였어요.”
물론 내가 쓰는 건 치료 마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을 맞잡고 텔레포트 마법까지 써 본 라엔이 마침내 안심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이한에게 어떠한 이상도 안 보였으니, 옆에서 마법을 써도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는 것 같네요. 다행이에요.”
물론 다행이었다.
송하견과 같이 쓰는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다행이지 않은 것은,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다는 점이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Ⅲ 실패!
페널티 ‘메스꺼움’이 지속 시간 ‘3일’ 동안 유지됩니다.
눈앞에 연이어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떴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Ⅳ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간헐적 코피 3주 페널티
제한 시간: 3주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면, 나는 꽤나 알찬 삶을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창밖으로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저번 퀘스트가 시작되었을 때 하늘에 둥그런 달이 떠 있었으니, 딱 이 시간이 맞았다.
‘…으.’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베개를 꼭 끌어안고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댔다.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자 기분은 조금 나아졌으나, 당연하게도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맞은편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송하견은 지금 시간에도 연구실에 있는 듯했다. 내가 나름 늦게 잠드는 편인데도 밤에 송하견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연구실에도 잘 공간이 있나? 아니면 잠을 아예 안 자나? 피곤한 내색 없이 한결같이 꼿꼿한 송하견이 대체 언제 자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속이 심각하게 울렁거렸다. 지금 가장 궁금하고 의문인 건 내 앞날이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겠네.’
박율이 해 주는 음식, 맛있었는데….
솔직히 좀 억울했다. 라엔의 의심을 받는 것도 나고, 그 의심을 풀어야 하는 것도 나인데. 그걸 실패했을 때 페널티까지 내가 받는다는 건 부당했다.
허공에 뜬 상태 창을 노려봤다. 새로 시작된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조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안고 있는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서러운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속이 더 뒤집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베개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풀 향기.’
방 안에는 은은한 풀 향기가 배어 있었다. 여름밤이 생각나는 향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송하견이 내 이마에 붙여 준 종이에서도 비슷한 향기가 났었다.
송하견은 연구실에서 풀이나 약초, 그런 것도 연구하는 걸까?
다음에 꼭 물어봐야지 싶었다.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송하견에게는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해 주기를 기대하면 안 됐다. 자기 이야기를 영 안 하는 사람이었다.
‘아, 잠깐만. 진짜 토할 것 같은데.’
갑자기 토기가 훅 치밀었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연하게도 올라오는 건 없었다. 메스껍기만 하고 토는 안 한다니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운 걸 보니 평소에 자던 시간을 한참 넘은 듯했다. 피곤했다.
그리고 깜깜했다.
빛 한 점 없는, 깜깜하고, 넓은 방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 사실이 갑자기 훅 와닿았다.
…싫었다. 이런 건 좋아하지 않았다. 어둡고, 무서…. 무거웠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커튼이라도, 걷어야….
달칵.
방문 손잡이가 조용히 돌아갔다. 고개를 휙 돌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송하견이 두꺼운 책 여러 권을 허공에 가지런히 띄운 채로 방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송하견이 몸을 작게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아직 안 자?”
토할 것 같아서요.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는 못하고 송하견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가만히 보니 늘 침착해 보이는 얼굴에도 조금 표정 변화가 있기는 했다.
지금은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아주 약간.
송하견은 허공에 띄웠던 책을 자기 침대 위로 대강 날려 보냈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책이 쏟아졌다.
내 앞으로 훅 다가온 송하견이 작은 직사각형 모양의 흰색 상자를 공중에 소환했다. 둥실 떠 있는 상자를 송하견이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그 주위로 은은한 빛이 퍼졌다.
송하견은 그걸 침대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옅은 불빛이 어둠 위에 고요하게 덮였다.
“…안 좋은 꿈 꿨어?”
송하견이 내 머리 위로 손을 느릿하게 뻗으며 물어 왔다. 애초에 잠들지도 못했는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잠깐 멈칫한 송하견이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식은땀에 살짝 젖은 머리가 단정한 손에 쓸려 올라갔다.
“…아파?”
내가 지금 아픈가, 아프지 않은가. 그걸 따지자면 꽤 복잡했다. 패시브 효과 덕분에 고통은 느끼지 않을 텐데, 페널티는 적용됐다.
단순히 속이 불편한 정도는 고통도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페널티는 별개인 건가?
생각해 보면, 왜 시스템의 모든 기준이 ‘고통’인 거지?
“선이한?”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탄한 어조였으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는 듯했다.
“괜찮아요, 하견 형.”
사실 아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몸이 튼튼해서 그동안 앓아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이 정도로 힘들다고 하는 건 엄살이었다.
“형은 왜 아직 안 자요?”
그러고 보니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건 송하견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바쁜 건가? 송하견에게 질문을 했으나 들려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어디가 아픈데?”
안 아픈데요. 분명히 괜찮다고 말한 것 같은데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다.
송하견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대답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송하견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괜찮은데, 그냥 속이 좀….”
송하견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살짝 내저었다. 크기가 다른 둥그런 플라스크 두 개가 허공에 생겨났다. 유리로 된 표면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작은 플라스크에 담긴 분홍빛의 액체는 안에서 회오리치듯 회전하고 있었다. 그보다 약간 더 큰 플라스크에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반절 정도 채워져 있었다.
작은 플라스크가 기울어졌다. 투명한 액체가 분홍빛으로 점점 물들어 갔다. 송하견은 그걸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작은 잎을 공중에 띄웠다.
바스락.
허공에서 부서진 잎이 고운 가루가 되어 플라스크 안으로 떨어졌다.
송하견이 한 손으로 플라스크의 목 부분을 잡고 가볍게 빙글빙글 돌렸다. 분홍빛의 액체가 점점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새벽의 색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과정을 끝낸 송하견은 그걸 내 손에 쥐여 줬다. 두 손안에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만 마셔.”
솔직히 마시기 아까운 색이었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액체 안에는 작은 가루가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꼭 은하수를 담아 놓은 것 같았다.
내가 유리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송하견이 말을 이었다.
“속, 많이 안 좋아?”
아, 진짜 괜찮은데. 내가 시간을 너무 끌었나 보다. 고개를 가볍게 젓고 유리병 입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송하견이 그 아래를 손으로 조심히 받쳤다.
“힘들면 한 모금만.”
내가 건드리면 무너지는 모래성도 아니고. 이 정도로 걱정시키는 건 민망했다.
물도 못 넘길 정도는 아니었기에 훌쩍 두 모금 정도를 삼키자, 송하견이 내 손에서 유리병을 빼냈다.
“억지로 마시지 마.”
평소처럼 느릿하지만 조금 단호한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어서 나름 괜찮았는데 조금 아쉬웠다.
유리병을 사라지게 한 송하견이 내 턱을 살짝 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송하견의 손가락이 내 입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입가에 묻은 물약을 닦아 내는 듯했다. …그렇게 엉망으로 묻히면서 마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제 누워.”
송하견이 자기 침대 쪽에서 베개 하나를 휙 옮겨 왔다. 그리고 그걸 내 바로 옆에 내려놓더니 가볍게 두드렸다. 슬슬 졸리기도 해서 군말 없이 송하견의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송하견이 준 약을 마시고 나니까 어쩐지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품에 안고 있는 베개를 송하견이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베개가 점점 따끈해졌다.
라엔이 보여 줬던 마법 중에서 비슷한 게 있었던 기억이 났다. 따뜻하고 푹신한 것을 껴안고 있으니 메스꺼움이 조금 덜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송하견이 내 위로 이불을 끌어와 덮었다. 그리고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쓸었다.
“괜찮아. 자.”
몸이 녹아내리는 듯이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이것도 마법인가? 송하견의 느릿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탁자에 놓아두었던 작은 상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점차 연해졌다.
“…잘 자.”
잠들기 전,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눈을 뜨니 방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품 안에는 아직 따끈하게 데워진 베개가 안겨 있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내 몸 상태는 평화롭지 않지만.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어제 송하견이 준 약을 먹었을 땐 잠깐 괜찮았다가 자고 일어나니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사흘이면 나름 괜찮았다. 사람이 사흘쯤 뭘 안 먹는다고 죽지는 않으니까.
“아, 이한아.”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박율을 마주쳤다. 박율이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 어깨에 감싸듯이 덮었다. 연한 하늘색의 담요였다.
“속은 어때? 지금은 좀 괜찮아? 아침에 하견이한테 들었어.”
안 그래도 슬슬 깨우러 가던 중이었는데, 하고 덧붙이는 박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가니 라엔이 있었다. 바로 앞의 접시에는 조금 잘린 동그란 빵과 수프가 있었다.
박율이 내게 뭘 만들어 줄지 물어봤으나, 차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거절했다.
“아직 안 괜찮구나.”
박율이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주전자를 데웠다. 그러고는 그 안에 초록색 잎을 몇 개 넣었다.
“이건 하견이가 주고 간 거야. 속을 진정시키는 약초라고 하더라.”
차에서는 연한 풀 향기가 났다.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데워진 유리잔을 두 손으로 쥐고 차를 홀짝 마시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라엔이 내게 물었다.
“이한. 치료 마법은 자기에게는 못 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