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존재하지 않는
조금 진정하고 나니까 방금의 상황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원래 이럴 때일수록 당사자가 그걸 드러내면 안 됐다.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약간 뻔뻔하게 있으니 다들 자연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죽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맛있었다. 맛있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였다. 박율은 요리를 잘하는구나.
“맛있어요, 율이 형.”
“그래. 먹고 싶은 만큼만 천천히 먹어.”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말한 박율이 송하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견아, 어제 다녀와서 얼굴도 못 봤었네. 고생했어.”
“…응. 그리고, 박율 형.”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이어지는 송하견의 말을 느긋하게 듣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저번 부상, 선이한이 치료했어.”
말이 끝나자마자 박율이 몸을 잠깐 굳힌 듯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박율의 눈동자가 경계하는 것처럼 잠깐 어둡게 가라앉은 듯했다.
아닌가?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라엔과 달리 박율의 의심 퀘스트는 뜨지 않았으니까.
박율이 눈을 살짝 접어 다시 말갛게 웃었다. 그러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한아?”
생각해 보니 내가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진작 말할 걸 그랬다. 그동안 제대로 깨어 있던 적이 없어서 그럴 시간이 없긴 했지만.
라엔도 나중에 내가 힐러라는 걸 들으면 의심을 좀 풀지 않을까? 그러면 그 퀘스트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막 대답하려던 때, 식당 문이 열렸다. 붉은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로브를 헐렁하게 걸친 라엔이 문을 조용히 닫고 걸어 들어왔다.
나와 시선을 맞춘 라엔이 내게로 급히 다가왔다.
“이한. 몸은 조금 어때요? 괜찮아요?”
“네, 라엔 형. 괜찮아요.”
“미안해요.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말을 더 신중하게 해야 했어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형 때문이 아니라….”
“…라엔.”
옆에서 송하견이 라엔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선이한, 치료 마법을 썼어.”
내 머리칼을 한 번 가볍게 쓸어내린 라엔이 내 옆에 사뿐히 앉았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번 부상, 다 나았거든.”
“하견, 치료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알잖아요.”
“그런데 지금, 존재하고 있잖아.”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치료 마법은 아니긴 했다. 시스템 덕분에 생긴 능력이었으니까.
라엔이 잠깐 생각하더니 고민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신력일 가능성은…. 아니, 신력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어요.”
“…응. 그리고 라엔. 네가 마나도 봤다면서.”
라엔이 알고 있는 게 맞았다. 신력은 인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까. 나는 자세한 이유까지 배우지는 못했지만, 미래를 봤을 때 발설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았다.
그래도 차라리 신력이라고 말할까? 조금 우겨 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잠깐 얘기를 나누던 라엔이 어느 정도 수긍한 듯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한. 그러면 마나의 형태가 다른 것도, 치료 마법이 가능하기 때문일 수 있겠네요.”
라엔이 어떻게든 이해했다면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마법도 신력도 아닌 시스템의 힘이니까 둘 다 사실이 아니기도 했고.
라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상태 창은 뜨지 않았다.
시스템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라엔의 의심을 보다 확실하게 풀어야 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퀘스트 성공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
이후 라엔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라엔의 방에는 조그만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신기한 것들이어서 볼 때마다 눈길을 끌었다.
묘한 빛깔의 커다란 깃털이 여러 개 달린 드림캐처, 금색 꽃 한 송이가 안에 담겨 있는 투명한 육각기둥 모양의 조각, 안쪽에 바다가 들어가 있는 듯 물결치고 있는 둥그런 수정구.
푹신한 벨벳 의자에 앉은 내 앞에서 라엔은 마법을 썼다.
“이한.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말해요.”
라엔은 내게 마나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내 마나의 형태가 일반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조금 걸린다고 했다. 마나가 없는 사람이 마법에 짙게 노출되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에, 내게 있는 것도 일반적인 마나로 생각하고 옆에서 마법을 써도 괜찮을지 확실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신기하다.’
허공에 물체를 띄우는 마법, 주위를 따뜻하게 만드는 마법, 손바닥 위로 빛을 만드는 마법. 라엔이 외우는 마법은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고,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대단했다.
“라엔 형. 형은 마법을 잘 써서 용사가 된 거예요?”
“아니요. 아, 이걸 얘기해 준 적이 없던가요?”
내 표정을 살핀 라엔이 눈썹을 올려 멋쩍은 듯이 웃었다.
“없었나 보네요. 궁금했을 텐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방금 생각났어요.”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내 어깨를 가만히 다독인 라엔이 공중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노란색의 빛무리가 모이더니 하나로 뭉쳤다. 별 모양이었다.
“우선, 리더 형…. 박율 형은, 용사로 선택받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라엔이 손가락을 빙 돌렸다. 빛으로 뭉친 동그라미 세 개가 그 주위로 생겨났다. 그러고는 중앙에 있는 별 모양으로 각각 선을 쭉 뻗어 냈다.
“우리는, 선택받은 용사인 리더 형과 용사 서약을 맺은 거예요.”
용사 서약이 뭐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라엔이 생각에 빠진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라엔은 그날 일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3년쯤 전.’
그래. 그때였다. 학년이 바뀐 첫날, 아카데미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소식이 있었다. 이번 대의 용사가 아카데미에서 선택됐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뒤흔든 그 열기는 하루도 채 안 되어서 사그라들었다.
다들 관심조차 없어진 듯 입에도 오르지 않았으나, 나는 어쩐지 그 일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내가 학년 수석이기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옆 교실로 들어가서 익숙한 보랏빛 머리칼을 찾았다. 송하견은 늘 그랬듯 창가 쪽에 가만히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카펫이 깔린 계단 위로 올라가 송하견의 앞에 앉았다.
“하견. 그 얘기 들었어요? 용사로 선택받았다는 선배가 있다는 얘기요.”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그 선배를 찾아가 볼 거라는 얘기를 전했다. 송하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게 끝이에요?”
잠깐 침묵하던 송하견이 말을 이었다.
“…너는 큰 전력이 될 거야.”
“그런 말을 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요. 그냥, 더 물어보거나 말리거나 할 줄 알았어요.”
“네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아서.”
그건 그랬다. 실은 송하견에게 같이 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운을 뗀 거였다. 송하견에게 그걸 물었으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송하견이 이러는 게 익숙하긴 했다. 억지 부릴 마음은 없었기에 혼자서 그 선배를 찾아갔다.
처음 만난 박율 선배는 사근사근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두 학년 위 선배였다.
“안녕. 라엔이구나.”
내 명찰을 바라본 박율 선배가 말갛게 웃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박율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와 줘서 고마워, 라엔아.”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는지 묻자 박율 선배는 내게 용사 서약에 대해 설명해 줬다.
별다를 건 없었다. 박율 선배는 내가 용사가 되기로 결정했다면 같이 신전으로 가서 서약을 맺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자기가 확인했으니 따로 검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내가 용사 서약을 맺겠다고 하니 박율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보랏빛 머리에, 옆으로 길게 묶고 다니는….”
“음, 송하견이요?”
“그런 것 같네.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알긴 하지만……. 무슨 일이죠? 선배한테 찾아간다고 했지만 별 관심 없어 보였어요.”
“그래?”
박율 선배는 그저 웃었다.
송하견을 왜 찾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국 송하견에게로 같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박율 선배는 송하견에게도 용사 서약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미 돈 거래는 완료했고 약속된 물건만 받으러 온 것처럼, 평온한 말투였다.
“…네.”
송하견의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아니,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해도 되는 일인가? 아깐 그렇게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박율 선배가 가고 나서 송하견에게 물었다.
“하견, 아까는 나랑 같이 안 갔잖아요.”
“…응.”
“내키지 않는 것 아니었어요? 몇 년간 아카데미도 제대로 못 다닐 수도 있어요.”
“별로, 상관없어.”
“아니, 내 일에 대해서 애매한 반응인 건 괜찮은데요. 본인 일에도 그러면 어떡해요….”
송하견이 뭐가 문제냐는 듯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표정인 게 문제였다.
아무튼, 그렇게 나도 송하견도 박율 선배와 용사 서약을 맺게 됐다.
◇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며 듣던 라엔의 설명이 끝났다.
“라엔 형. 그러면 민주혁은요?”
“주혁은 어떻게 용사 서약을 맺게 됐는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뭐, 그럴 수도 있었다.
용사가 되는 과정이 신기했다. 라엔이 박율을 리더 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또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시스템은 용사들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용사가 되면 뭘 하는데요? 세상을 구하나요?”
“음….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죠.”
나를 바라본 라엔이 조그맣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아요.”
라엔이 침대에서 하얀 베개를 하나 끌어와서 공중에 띄웠다. 그러고는 손을 위에서 아래로 죽 그었다. 베개가 그 손짓을 따라 지익 찢어졌다.
“이게 균열이에요. 그 안에서 마물이 흘러나와요.”
라엔이 손가락을 휘감듯이 돌렸다. 베개 안에서 뭉쳐진 솜이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새카만 색이었다.
“어, 마물이 이런 색인가요?”
“맞아요. 그리고 이 마물을 다 처리하면….”
허공에서 멈춘 채로 딱딱하게 굳은 솜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파스스 흩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균열에서 흘러나온 마물이 다 사라지면, 균열이 닫혀요.”
라엔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베개의 찢어진 부분이 얼기설기 바느질됐다. 라엔이 그 베개를 다시 침대 쪽으로 띄워 보내서 가지런히 놓았다.
궁금증이 얼추 풀렸다. 시스템이 내게 말한 걸 생각해 보면, 마물과 싸우는 게 많이 위험한 걸지도 몰랐다. 긴장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
그날 이후로도 라엔은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서서히 높은 단계의 마법을 썼다. 나는 그동안 라엔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라엔 형. 마법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데 치료 마법은 아예 없나요?”
“네, 지금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사용할 수조차 없었고요. 이한을 제외하고는요.”
“…그렇구나.”
“음, 풀 죽을 일은 아닌데요. 기분 풀어요.”
라엔이 빠른 속도로 말하며 공중에 네모난 캐러멜 하나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마법을 써서 내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포장지를 벗겨서 입에 넣으니 달콤하고 맛있었다.
물론 달콤함과는 별개로 아직 성공하지 못한 라엔의 퀘스트를 생각해 보면 입이 쓰긴 했다.
“이한. 지금 불편한 데는 없나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소환 마법까지도 괜찮네요.”
공중에 뜬 종이 위로 펜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그걸 바라보던 라엔이 지나가듯이 말을 뱉었다.
“치료 마법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너무 자주 쓰지는 않는 게 좋겠어요.”
“왜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유가 있듯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도…. 모두 이유가 있으니까요.”
묘한 확신이 깃든 말투였다. 라엔이 나와 시선을 곧게 맞췄다. 빛나는 금안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