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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화 (12/150)

012화.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황당한 눈으로 민주혁을 올려다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민주혁이 여전히 내 볼을 잡아서 늘린 채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진짜….”

내가 뭐? 민주혁, 가만 보니 혼자서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민주혁의 손목을 잡고 큼지막한 손을 끌어 내렸다.

민주혁은 자기 손목을 감싸는 내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순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런 민주혁에게 더 신경 쓰지 않고 송하견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견 형, 고마워요. 그런데 이제 정말 멀쩡해요.”

“…내가, 고마워. 치료해 줘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송하견이 약병을 침대 옆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갈까.”

나지막이 이어진 말에 민주혁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형님! 지금쯤 다들 식당에 있을 겁니다.”

“응.”

“바로 앞에 있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십쇼.”

송하견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옆으로 느슨하게 묶어서 내린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침의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여전히 새벽처럼 어두운 색이었다.

1층으로 내려간다면 나도 일어나야지. 몸을 돌려서 침대 아래로 발을 뻗는데, 송하견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하견 형…? 왜요?”

“…업어 줘?”

평탄한 어조였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바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 시간을 두고서야 제대로 이해가 됐다. 지금 나를 업고 내려가겠다고? 왜?

송하견이 내 표정을 보고는 잡았던 손목을 부드럽게 놓았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있는 자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온 송하견의 손에 하얀색 슬리퍼가 들려 있었다.

한쪽 무릎을 대고 바닥에 앉은 송하견이 내 다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잠깐만. 침대 위로 다시 다리를 올리며 송하견에게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요, 형. 내가 할 수 있어요.”

“알아.”

말은 안다고 하면서도 그 자리에 꿋꿋이 앉아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송하견에게 다리를 조심스레 뻗었다. 송하견이 내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닿아 오는 손이 뜨거웠다. 내가 이제 열이 내려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내 다리를 천천히 끌어당긴 송하견이 슬리퍼를 한 짝씩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내게 손을 뻗었다.

“…고마워요.”

그 손을 잡으니 송하견이 나를 가볍게 일으켰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 않았는데도 몸이 훅 들리듯이 침대에서 일어나졌다.

발아래로 슬리퍼의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꼭 구름을 밟는 것처럼 바닥이 푹신했다.

송하견과 방을 나섰다. 민주혁은 문 바로 옆에 기대서 있었다.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한 번 헝클이고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민주혁도 그렇고, 송하견도…. 이게 일반적인 걸까? 타인에게 이 정도의 관심을 쏟는 것이 당연한 일인 걸까?

모르겠다. 지금껏 신전에서 제대로 된 교류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낯설어서, 이상했다. 사람들이 내게 신경 쓰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왜 지금까지….

“선이한.”

바로 옆에서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잠깐 걸음을 멈췄었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송하견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꼭 걱정하는 것처럼.

송하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 보였다. 그래, 신전에서의 일은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이미 지난 일이고, 떠난 곳이니까. 조금 억울할 뿐이지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여기로 올라올 때는 거의 잠든 채여서 기억도 없었는데, 내려갈 때라도 제정신이어서 다행이었다.

1층 홀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맑은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푸른 기운이 사라진 채 벌써 날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거창하게 식당이라고는 했지만, 그냥 요리할 수 있는 공간과 널찍한 테이블이 있는 게 전부긴 했다. 애초에 네 명이 사는 건물이니 당연했다.

누군가가 멀찍이 서서 요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옆의 커다란 창문에서 들어온 햇빛이 그의 뒷모습을 비췄다.

가볍게 흩어지는 금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박율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박율이 몸을 빙글 돌려서 우리를 마주 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박율이 연녹색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노란 햇살 조각이 박율의 주위로 쨍하게 반짝이는 듯했다.

“왔어? 이한이도 내려왔구나.”

박율의 뒤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나무 숟가락과 여러 색의 소스 통이 보였다. 어차피 마법을 쓸 거면서 팔은 왜 걷어붙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박율이 테이블 쪽으로 손을 휘익 내저었다. 그러자 의자 세 개가 뒤로 가볍게 밀려났다.

“거의 다 됐으니까, 잠깐 앉아 있어.”

“박율 형님. 라엔 형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

“응, 아직 안 일어났나 봐.”

종종 있는 일인 듯 민주혁이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송하견이었다.

“…선이한. 뭐 해?”

“…네?”

“어? 이한아, 아무 데나 앉아 있어. 아니면 어디 안 좋아?”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내 자리도 있었구나. 당연히 저 세 사람 자리인 줄 알았다.

송하견이 나를 천천히 밀어서 자리에 앉히고는 그 바로 옆에 자기도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민주혁이 흰색 유리잔에 물을 따라서 탁자 위에 하나씩 놓았다.

내 앞에도 유리잔이 놓였다. 연한 녹색을 띤 찻물이 그 안에서 빙글 돌았다. 그걸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송하견이 열을 재듯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괜찮은 거, 맞아?”

“네.”

유리잔을 쥐었다. 손이 떨리는지 찻물이 흔들거렸다. 닿아 오는 유리잔의 표면이 따뜻했다.

찻잔을 양손으로 꾹 쥐고 있는데, 내 앞으로 오목한 그릇 하나가 둥실 날아와서 부드럽게 놓였다. 작게 자른 색색의 채소가 들어간 죽이 담겨 있었다.

박율이 곧 접시 여러 개를 공중에 띄워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동그란 접시 위에는 각각 먹음직스러운 토스트와 샐러드가 올려져 있었다.

내 뒤로 다가온 박율이 내 머리칼을 살짝 쓸어 올렸다. 이마에 단단한 손바닥이 닿아 왔다.

“몸은 좀 괜찮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박율이 자기 자리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뭘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소화 잘되는 걸로 먹자.”

내게 건네지는 따뜻하고 잔잔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확 실감이 났다. 이 안에 내가 있다는 게.

하얀색 테이블, 흰 찻잔, 단정한 그릇. 신전에서와 똑같았는데, 전해져 오는 온기는 달랐다. 그게 너무 생경했다. 따라가기가 벅찼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럴 리가 없잖아.

어쩌면 이것도 한순간 꿈이 아닐까. 눈을 뜨면 다시 깜깜한 신전 방 안에 홀로 누운 채인 것이 아닐까.

“…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내게로 몰린 시선이 느껴졌다. 이것조차도 낯설었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다. 시야가 흐려서 다들 어떤 표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요?”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속이 이상했다.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이한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말아 주세요.”

진심이었다. 어떤 대답이든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신전 사람들은 마나가 없는 나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그러나 마나가 생긴 이후로는 내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데, 마나가 생긴 건 내 의지가 아니었잖아.

그렇게 내가 또 바뀌면? 그래서 당신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그건 조금 비참…, 억울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나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박율이 뿌연 시야에 담겼다.

박율이 내 옆에 섰다. 마법을 쓴 건지 의자가 그쪽으로 부드럽게 돌아갔다. 나를 마주 본 박율이 내 뺨을 양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러고는 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혼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였다. 나는 힘들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눈가에 차가운 것이 덮였다. 물에 젖은 천인 것 같았다.

물방울 하나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박율이 덮은 손수건 때문일 것이다. 박율이 손가락으로 그 부근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한아.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런가? 이유 없는 다정함이 존재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생각 사이로 민주혁의 밝은 목소리가 꽂히듯이 들렸다.

“그래, 선이한. 이제 우리 한 팀이잖아.”

내 눈을 덮었던 천이 스르르 떨어졌다. 눈을 떴다. 맑아진 시야에 박율의 모습이 또렷하게 담겼다. 박율은 연녹색 눈을 접어 맑게 웃은 채였다.

“주혁이 말이 맞아.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가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졌다. 박율이 내 눈가에 남아 있는 수분을 닦아 내듯 가볍게 두드렸다.

의자를 다시 바르게 돌려 준 박율이 자기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옆에서 송하견이 내 등을 부드럽게 한 번 쓸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송하견이 유리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내 입가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차에서는 연한 풀 향기가 났다.

따뜻한 차를 두어 모금 마시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일일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

조용하게 말하는 송하견을 바라봤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잘 모르겠지만, 뭐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됐던 몸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맞은편에 커다랗게 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의 흐드러진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높게 펼쳐진 파란 하늘도 선명했다.

고요했다. 그래서 편안했다. 강물을 어지럽게 흐려 놓았던 흙모래가 다 가라앉은 것처럼 정신이 맑게 개었다.

그래. 정말로,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상태 창.’

눈앞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용사 일행의 유일한 힐러, ‘선이한’님.」

가장 위에 또박또박 쓰인 글자가 보였다. 그 문장을 한 번 더 곱씹었다.

‘용사 일행의 유일한 힐러.’

나도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아니, 이미 방금 생겼는지도 몰랐다. 세상에 내 자리가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이에. 바로 이곳에.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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