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화 (11/150)

011화.

괜찮다고 말했잖아

방문을 닫고 나온 송하견은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열 효과가 있는 약초를 구해 뒀던가.’

연구실에 들러서 그걸 확인해야 했다. 선이한이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이마를 짚어 봤을 때 열이 꽤 높았다. 더 오르기 전에 약을 먹여 두는 편이 좋았다.

내 상처가 말끔하게 나은 것이나, 선이한이 존재하지도 않는 치료 마법을 쓴 것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건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이었다.

연구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에 방어 마법 훈련실이 있었다.

‘민주혁은 지금 여기 있겠지.’

틀림없었다. 내가 민주혁을 밀치고 마물에 공격당했던 일 이후로 거의 이곳에 틀어박히다시피 했으니까. 민주혁에게 내 상처가 나았다는 말을 잠깐 전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일은 딱히 누군가 방심해서가 아니었다. 마물의 공격 양상이 달라진 것뿐이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민주혁이 내게 그렇게까지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었다.

반대 상황이었더라면 민주혁도 그렇게 했을 거니까. 단지 그때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민주혁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

똑똑.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없었다. 안이 제법 시끄러울 테니 들리지 않을 만도 했다. 더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동시에 내 앞으로 주먹만 한 공이 쏘듯 날아왔다. 굵직하고 뾰족한 가시가 솟아 있었다.

눈앞까지 다가온 공은 허공에서 뭔가에 막힌 듯 덜걱 멈췄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하견 형님! 괜찮으십니까?”

민주혁이 내게로 급히 달려왔다. 놀란 듯이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

방금 나도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민주혁의 방어 마법이 조금 더 빨랐다. 민주혁도 그걸 느꼈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다쳤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민주혁.”

땅에 떨어진 공을 마법으로 띄워 손에 올렸다. 민주혁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좇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래도 형님, 갑자기 놀라지는 않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이 오신 걸 몰라서….”

“저번 일, 말하는 거야.”

“…….”

민주혁이 평소 같지 않게 조용했다. 생각이 많았던 듯했다. 가만히 침묵하던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방어는 제 담당이지 않습니까. 제가 더 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가 마물을 처리하지 못한 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았습니까.”

바로 대답하는 민주혁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그걸 알면서 왜 자기는 그 일을 아직도 담아 두고 있는 걸까. 이제 털어 버려도 될 일인데.

“…잘 아네. 너도 똑같아.”

마법을 외워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던 공을 민주혁에게로 가볍게 보냈다. 민주혁이 그 공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여전히 표정이 조금 복잡해 보였다.

“…잘해 왔어, 민주혁. 이것도 알잖아.”

민주혁이 공을 꾹 말아 쥐며 말을 이었다.

“형님. 잘해 왔다는 건 실수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만. 다쳐.”

민주혁의 손을 풀어내고 공을 저만치로 멀리 날렸다. 내 왼쪽 어깨에 불안한 시선을 둔 민주혁에게 말을 이었다.

“누구의 실수도 아니야. …그리고, 이제 괜찮아.”

와이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내고 민주혁에게 완전히 나은 상처 부위를 보여 줬다. 민주혁이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 어떻게….”

“선이한이, 치료한 거야.”

“이제, 안 아프…,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민주혁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민주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견 형님…. 다행입니다.”

“…응.”

민주혁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으나 조금 흔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민주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다시 잠갔다.

“…이제 됐어.”

내 앞에 선 민주혁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그러고는 조금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위층에 올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가 있어.”

민주혁이 문을 박차듯이 나섰다. 시간을 조금 두고 올라가야 할 듯싶었다. 어차피 연구실에 들러서 약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얼추 맞았다. 방을 나가서 다시 복도를 걸었다.

선이한은 텅 빈 방 안에서 멍하니 생각을 이어 나갔다.

방금 송하견은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거였을까.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창밖으로 어둑어둑한 새벽이 펼쳐져 있었다. 공기마저 고요히 가라앉아서 사방이 조용했다. 송하견도 꼭 이런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말을 길게 하는 편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생각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도 아닌 것 같았다. 여러모로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다음부터 송하견에게는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쾅.

방문이 세차게 열렸다.

민주혁이 서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채였다. 급하게 달려온 듯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민주혁이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람이 훅 불어오더니 침대 한쪽이 풀썩 꺼졌다. 민주혁이 나를 힘주어 안았다. 민주혁에게서는 바람처럼 시원한 향기가 났다. 내 등에 닿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민주혁은 떨리는 몸으로 나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내가 절벽 끝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간절함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움에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와서 왜 이러는 거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깨어난 걸 보니까 안심했나? 하긴, 마지막에 그렇게 쓰러졌으면 걱정할 만도 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격할 정도라고?

민주혁이 고개를 천천히 숙여서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댔다. 내 몸에 열이 올라 있어서인지 닿아 오는 살갗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민주혁의 머리칼이 내 목덜미를 간질이는 느낌이 생경했다.

바로 옆에서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선이한. 정말 네가 한 거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귀에 꽂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이전과 다르게 느릿하고 진지한 말투에 나도 덩달아 차분하게 물어봤다.

“하견 형 치료한 거?”

민주혁이 ‘내가 했느냐’고 물어볼 만한 건 이것밖에 없었다. 민주혁이 말없이 내 어깨에 묻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내가 한 거야.”

“…….”

민주혁에게서는 한참 동안 이어지는 목소리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혼자 잘 말하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말이 없으니 대화가 뚝 끊겼다. 이 정적이 어색한 건 아니었으나 민주혁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는 궁금했다.

내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닿아 오던 단단한 힘이 사라지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 위에 묵직하게 놓였던 무게가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민주혁의 이마가 내 쇄골 부근에 기대는 것처럼 닿았다. 갈색 머리칼이 살랑이며 스쳤다.

민주혁이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얼굴에 파묻었다.

“흐, 윽….”

작게 흐느끼는 소리였다.

민주혁의 등이 무너지듯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야, 민주혁.”

‘너 울어?’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지금 우는 중이냐고 물어보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 같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손을 어정쩡하게 뻗어서 민주혁의 등을 토닥였다.

“고마워….”

민주혁이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나는, 나 때문에, 송하견 형님이….”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몸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달칵.

그때 방문이 다시 조용히 열렸다. 소리 없이 들어온 송하견이 침대 옆의 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그러고는 쓰고 있던 모노클을 차분하게 벗어서 가슴팍의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하견 형. 지금 무슨 상황인 건가요.’

송하견에게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송하견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을 맞춰 왔다. 곧고 바른 자세에 미동도 없었다.

차분한 보랏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내 몸 상태를 확인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송하견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에게 기대 오던 무게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민주혁이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넓은 등이 둥글게 구부러져 있었다. 상태 괜찮은 거 맞나?

“민주혁, 너 괜찮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주혁이 팔을 쭉 뻗어서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마워. 선이한.”

단단한 목소리였다. 방금까지의 흐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내뱉는 말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민주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가가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한 웃음이어서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살짝 훌쩍이던 민주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서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야, 그리고 나 운 거 아니다.”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 창 안으로 묘한 보랏빛의 새벽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

멍하니 대답했다.

민주혁의 웃음은 꼭 이른 아침 같았다. 맑고, 시원해서, 창문이 다 닫혀 있을 텐데도 어쩐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 아침이 푸르게 밝아 올 시간이었다.

방 안이 환해졌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고열 페널티도 끝이 났는지 몸이 완전히 개운했다.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린 송하견이 붙여 놓았던 작은 종이를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고는 손등을 내 이마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던 송하견이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로 닫혀 있는 얇은 유리병 안에는 걸쭉해 보이는 주황색의 시럽이 담겨 있었다. 송하견이 그걸 내 앞으로 내밀었다.

“…열은 좀 떨어졌는데. 아직 안 좋으면, 마셔.”

공복에 먹어도 된다며 느릿하게 덧붙인 송하견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와 눈을 맞춰 왔다.

“이제 괜찮아요.”

말을 마치는 순간, 민주혁이 벌떡 일어나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쩐지. 몸이 뜨겁다 했어.”

민주혁은 열을 재듯이 내 목덜미와 어깨 부근에 차례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망설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야, 선이한. …왜 안 말해?”

“괜찮다고 말했잖아.”

바로 나온 대답에 민주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한 손을 들어서 내 얼굴로 가져다 대었다.

“아.”

민주혁은 그대로 내 볼을 가볍게 꼬집어서 주욱 늘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