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치료하기
맨발에 바닥이 닿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조용히 신음을 삼키는 듯한 송하견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달을 등지고 선 내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늘어졌다. 단정하게 묶어 내린 송하견의 머리칼이 그림자에 어둡게 물들었다.
‘왼쪽 어깨.’
행동을 보니 그 부근을 다친 듯했다. 내가 바로 옆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송하견은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른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송하견에게 손을 천천히 뻗었다. 시스템이 말하기를 내가 힐러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잘은 모르지만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송하견의 어깨 부근에 손이 거의 닿을 무렵,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어, 내가 옆에 온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내 손목을 감싸 쥔 송하견의 오른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잔 떨림이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송하견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지지, 마.”
……. 내가 닿는 게 아무리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시스템이 아직도 잠잠한 걸 보니 내가 먼저 접촉해야 뭐라도 되는 듯했으니까.
손목을 부드럽게 비틀어서 빼냈다.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송하견의 단정한 손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허리를 숙여서 송하견의 등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와이셔츠의 차갑고 미끈한 재질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순간,
띠링.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상태 창이 떠올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송하견’
치료하기 / 가져오기」
음, 둘 중에서라면 당연히 치료하기 아닌가? 선택지가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치료하기.’
속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화아악.
희미한 푸른빛이 송하견의 어깨를 감쌌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그 부근을 빙빙 돌던 빛은 내 가슴 쪽으로 훅,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그런 내 앞으로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히든! 퀘스트> ‘첫 번째 치료하기!’ 성공!
성공 보상으로 ‘용사 외 치료하기(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허공에 기다란 막대 모양의 게이지가 생겼다. 그 안쪽으로 피처럼 검붉은색이 왼편부터 차근차근 느리게 채워졌다.
어딘가 불길한 색깔이었다. 별로 좋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눈살이 잘게 찌푸려졌다.
그때 내 손목을 옭아매듯이 감싸 오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보니 송하견이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였다. 닿아 오는 손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단단하게 힘을 주어 잡고 있었다.
내 등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송하견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다. 모노클에 달빛이 얼비쳤다. 송하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차, 저쪽 입장에서는 꽤 당황스러울 상황이었다. 내가 누군지도 말한 적 없었으니까.
“하견 형.”
이렇게 말을 뱉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저쪽도 내게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 혼자서만 가까운 사이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민망함에 웃음이 설핏 나왔다.
“선이한이에요.”
애써 민망함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송하견은 잠깐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가라앉은 듯한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내 손목을 잡은 손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송하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아.”
딱딱한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송하견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나 혼자만 가깝게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다.
똑, 딱.
고요한 방 안에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
송하견은 생각했다. 지독한 고통이라고.
라엔과 조사를 마치고 레데오에 도착한 뒤 곧바로 1층 연구실에 틀어박혔었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어느새 밤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물에 당한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번에는 그 양상이 달랐다. 마치 몸속에 뿌리 박히는 것처럼 깊숙이 찔러 오는 고통이 생경했다.
마물의 움직임이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어서 대응이 어려웠다. 진화해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상황이 쉽지 않았다.
조사 기록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깨가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단추를 풀고 거울 앞에 섰다. 상처 부위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런 적은 없었다. 마치 마물에 물들어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모노클을 제대로 올려서 썼다. 떨리는 손으로 펜과 노트를 들었다. 그사이에도 검은 면적은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퍼지는 거지? 몸이 완전히 물들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이렇게 동요할 때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보를 기록해 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노트에 급하게 글자를 적어 나갔다.
그러다 툭, 하고 손에서 펜이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옅게 배어 나왔다.
진통제는 위층 방에 있었다. 서랍 어디에 두었던 것 같은데. 정신이 흐려져서 소환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마나양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렇게 집중이 흐트러지면 곤란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달칵, 하고 방문을 여니 창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의 뒤로 푸른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 새로 온다던. 선이한이었나.’
방을 같이 쓰기로 했나 보다. 선이한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가 서랍장을 열었다. 빨리 진통제를 찾아야 했다.
서랍 안에는 물건이 많았다. 지나치게 많았다. 그 안에서 약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윽.”
깊숙한 고통이 불시에 닥쳐왔다. 어떻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해야 할 건 분명했다. 상처가 어떤 양상으로 변화해 가는지 봐야 했다. 그리고 그걸 기록해 둬야 했다. 옷을 걷기 위해 떨리는 손을 들었으나, 고통에 차마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만히 멈춘 내 쪽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작은 움직임에 느슨한 옷자락이 하늘거렸다. 새하얀 천이 달빛을 머금은 듯 빛났다.
선이한이 어느새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만지지, 마.”
섣불리 손을 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혹시나 검게 물든 이것이 옮겨 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떨어져 있는 붕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서랍에서 꺼내어 내려놓은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렸다. 정신을 잃기 전에 붕대라도 감아 둬야 했다. 상처 부근을 누군가 건드리면 안 된다. 떨리는 손을 뻗어서 붕대를 손안에 꾹 쥐었다.
그때 내 등 뒤로 조심스레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옷 위로 닿아 왔음에도 그 온도가 델 듯이 뜨거웠다.
동시에 시야 왼편으로 연한 빛이 터져 나오는 게 얼핏 보였다. 푸른빛이 내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고통이 서서히 사라졌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선명해진 시야에 선이한의 모습이 담겼다.
둥근달이 선이한의 뒤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에 곧게 서 있는 선이한의 옷이 옅게 흔들리는 듯했다. 달빛에 새하얗게 비치는 모습이 어쩐지 사라질 듯이 희미해 보였다.
선이한은 뒤로 반걸음 정도를 물러서더니 작게 비틀거렸다. 어딘가 불편한 듯 눈살을 잘게 찌푸린 채였다.
그 위태로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딱딱하고 마른 손목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하견 형.”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힘주어 말하지 않았는데도 단단함이 느껴졌다. 선이한이 부르는 내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
선이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설핏, 웃음을 지었다. 선이한의 뒤쪽으로 뜬 둥근달보다 더 빛나는 웃음이었다. 그런데도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린 모습이 조금 쓰게 느껴졌다.
“선이한이에요.”
망설이며 이어지는 목소리에 저절로 입을 열었다.
“…알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지만.
내 손안에서 힘없이 툭 떨어진 붕대가 돌돌 풀리며 선이한의 발치로 느리게 굴러갔다. 시계 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서 고요히.
◇
여전히 달이 밝았다. 한밤중이었다.
“…선이한.”
내 이름을 부르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송하견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이마에 손을 뻗어 왔다. 시원한 손바닥이 닿았다.
송하견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 나를 침대 위에 앉혔다.
송하견이 침대 옆 탁자에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서 건넸다. 아, 아까도 마셨는데.
손안에 쥔 유리잔이 따뜻했다. 찻물은 여전히 따끈하고 알맞은 온도였다.
“…열 있어. 더 자.”
송하견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자는 건 이제 지겨울 정도였다. 눈을 뜬 것도 오랜만이었다.
“…식사는. 했어?”
느릿하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선선히 저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송하견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서랍장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돌아온 송하견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연한 보랏빛의, 작고 네모난… 종이?
내 앞으로 다가온 송하견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춰 왔다. 흔들림 없는 고요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어쩐지 주위에 풀 향기가 옅게 퍼져 있는 듯했다. 단정하고 커다란 손이 내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송하견이 내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 올리고는 가져온 종이를 이마에 살짝 붙였다. 시원했다. 풀 향기가 조금 더 진하게 나는 듯했다.
베개를 세워 나를 침대 머리맡에 기대게 한 송하견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 안 아파?”
“네.”
“…열이 심한데. 춥지는 않아?”
“괜찮아요. 하견 형은요?”
“…응.”
송하견이 자기 일은 신경 쓸 게 아니라는 듯 내 질문에 대해 흘리듯이 대답했다.
내 몸 상태를 가늠하듯 나에게 시선을 맞춰 온 송하견이 내 무릎 위로 이불을 살짝 덮어 줬다.
‘더 궁금한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내 상태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 어떻게 치료한 것인지 묻는다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송하견이 한 손을 내 뒷머리에 댔다. 그러고는 다른 손을 펼쳐서 내 이마에 붙인 종이를 꾹 눌렀다.
“다녀올게. 쉬어. …더 자도 되고.”
말을 마친 송하견은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발걸음이었다. 달빛에 비치던 어두운 보랏빛의 머리칼이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다녀온다고? 어디를? 뒤늦게 의문이 들었으나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자리를 뜨고 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