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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화 (9/150)

009화.

새벽에 잠겨 있는

창밖으로 노을이 낮게 지고 있었다. 라엔은 연한 녹색의 눈동자에 신중하게 시선을 맞췄다.

그 안에 붉게 반짝였던 어두운 빛이 찰나 자취를 감췄다. 어쩌면 노을빛을 잘못 본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었고, 맞게 본 거라면….

아니,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이게 아니었다.

리더 형과 민주혁에게 내가 보았던 선이한의 마나를 설명했다. 하얀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색의 이상한 빛무리. 그건 마나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종류였다.

내가 설명을 이어 갈수록 리더 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옆에서 민주혁도 집중하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랬구나. 이건 이한이랑 차차 얘기해 보자.”

“네, 리더 형.”

리더 형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기 입술 부근을 손끝으로 두어 번 톡톡 쳤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고, 라엔아.”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던 걸 멈췄다. 리더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갈까. 이한이도 자니까, 조용히 쉬게 해야지.”

그러고는 선이한의 이불을 한 번 더 꼼꼼히 덮어 주고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엔 형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잠든 거니까 쉬고 나면 금방 일어날 겁니다.”

“…그래요.”

“조사 다녀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게 가볍게 웃어 보인 민주혁이 허리를 숙여 선이한의 새까만 머리칼을 한 번 조심스레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고요해졌다. 커다란 침대에 파묻힌 선이한이 옅은 숨을 내쉬는 소리만이 울렸다. 손을 뻗어 선이한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흰 피부가 노을빛에 물들어 발갛게 달아오른 듯 보였음에도 손끝에 닿은 살갗이 차가웠다. 식은땀에 젖어 있는 듯했다. 그 생경함에 몸이 흠칫 떨렸다.

선이한의 얼굴을 덮은 붉은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가로 걸어갔다. 이제 해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조용히 커튼을 닫았다. 창틀에 걸터앉아서 탁자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를 허공에 띄웠다. 이건 마나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마법이기에 써도 괜찮았다.

검은 잉크병 안에 깃펜을 푹 담갔다가 둥실 띄웠다. 흰 종이에 글자가 천천히 채워졌다. 펜촉이 종이를 긁으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종이를 곱게 펼쳐 침대 옆의 탁자에 올려 두었다. 선이한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었다.

선이한의 앞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렸다. 허리를 숙여 그 위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닿아 오는 살갗이 아까와는 달리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 미지근함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달칵.

침대에서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사그라들고,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한밤중이었다.

선이한이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서 푸른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아니, 잠깐만. 밤이라고?’

주위가 깜깜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간이 또 이렇게 지났다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로 옆의 탁자에 뒤집혀 있는 유리잔이 보였다. 그 밑에 작은 종이가 깔려 있었다.

종이를 들어 글자를 읽어 나갔다. 라엔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바로 옆방에 있을 테니 일어나면 꼭 부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 없는데.’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 라엔 때문에 기절한 것도 아니었고,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일어났다고 굳이 부르러 갈 이유도 없었다.

하긴, 라엔 입장에서는 당황할 만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는데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중에 꼭 해명해야지.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탁자에 놓인 물 주전자를 들어서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 마법을 걸어 둔 건지 아직 따뜻했다.

허브 잎 향이 났다. 한 모금을 마시니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아예 옆으로 돌려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저 앞에 창문이 있었다. 닫혀 있는 커튼 사이로 달빛이 옅게 새어 들어왔다.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차락, 하고 걷었다. 검은 밤하늘에 커다랗고 둥근달이 떠 있었다.

창 앞에 서서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신전을 떠나올 때보다는 조금 깎여 있었으나 여전히 둥그런 모양이었다.

옆을 흘끗 보니 지긋지긋한 퀘스트 창이 보였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Ⅱ

제한 시간: 10분 33초

내가 잠든 사이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물론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적어도 퀘스트를 하라고 제한 시간을 뒀으면, 사람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시간 체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3분 기절이라면서. 그 뒤로 쭉 자게 내버려 두고.’

페널티가 풀린 후에 깨워 준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잖아.

…아니다. 시스템에 상식을 바란 내 잘못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려 창틀에 걸터앉으니 창문의 차가운 유리가 등에 닿아 왔다.

‘아, 맞다. 내 옷은….’

생각해 보니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잠만 잔 것 아닌가? 맙소사. 이제야 깨달았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옷을 확인했다. 다행히 처음 입었던 멀끔하고 하얀 옷 그대로였다. 살갗도 보송했다.

‘그때 그 클린 마법인가.’

마차에서 민주혁이 썼던 마법이 얼핏 기억났다. 이제야 안심됐다. 정신없이 잠만 자느라 엉망인 상태면 어쩌나 싶었는데.

창틀에 기대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 올려 팔로 감쌌다. 밤이어서 그런지 공기가 조금 쌀쌀했다.

‘미래시 확인도 해야 하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능력인 건지 설명을 읽어 봐야 하는데, 너무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 물론 신체적으로 말고 정신적으로. 이제 잠은 잘 만큼 잤다. 그것도 너무 많이.

어쩐지 신전을 나선 이후로 잠들고 쓰러지기만 한 것 같았다. 내가 의식이 없는 사이 멋대로 굴러가 버리는 시간의 흐름이 낯설었다.

‘미래시는 조금 나중에…, 확인해야지.’

절대 미루는 게 아니다. 잠깐 쉬는 거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해야 할 일을 저 앞으로 던져 버리는 거고, 후자는 그걸 그냥 그 자리에 둔 채 잠깐 멈춰 서는 거였다.

나는 지금 후자였다.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게 맞다. 조금 쉬다가 머리가 좀 정리되면…. 그때 뭐든 차근차근히 해 나가면 됐다.

옆에서 푸르게 빛나는 상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퀘스트 제한 시간이 어느덧 몇 초를 안 남기고 있었다. 페널티가 고열이었나? 아프지는 않겠지만 몸이 축 처지기는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띠링 하며 새로운 퀘스트 창이 생겼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Ⅱ 실패!

페널티 ‘고열’이 지속 시간 ‘3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아주 혼자서 가지가지 했다. 퀘스트 깰 시간도 안 줬으면서.

그 바로 앞에 새로운 상태 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Ⅲ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메스꺼움 3일 페널티

제한 시간: 3일

제한 시간이 틱, 하고 줄어들었다.

대체 이 퀘스트는 언제 끝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가면 나중에 3년까지 나올 참이었다.

머리에 곧바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눈가가 뜨끈해졌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창틀에 기댔다.

아까는 차가웠는데, 지금은 시원했다. 사람이 이렇다. 자기 좋을 대로만 느끼고, 멋대로 해석한다.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끌면서 걷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끼익.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린 문 뒤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키가 컸고,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에 쓴 모노클이 달빛에 반짝 빛났다. 느슨하게 묶은 긴 머리는 한쪽 어깨로 넘기고 있었다.

그 사람은 비틀거리며 문에 기대듯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에 멈춰 선 그가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하고는 나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쪽으로 길게 묶은 어두운 보랏빛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다.

그는 책상 옆에 있는 작은 서랍장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 모습이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송하견?’

내가 송하견의 방을 같이 쓴다고 했으니, 저 사람이 아마 송하견일 것이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송하견은 무릎을 꿇고 앉아 서랍을 급하게 열고 안에 있는 것들을 뒤적였다. 물건들이 달각이며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그러다가 결국 찾지를 못하겠는지, 서랍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의 던지듯이 급한 동작이었다.

‘찾는 걸 도와줘야 하나?’

그런데 도와주는 것도 내가 뭘 알아야 할 수 있는 거였다. 바빠 보이는데 괜히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방해되는 것은 싫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등에 닿는 창문의 냉기가 나를 밀어 내는 듯했다.

페널티 때문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꿈꾸듯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멍한 머리로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다.

손을 슬쩍 들어서 커튼을 더 활짝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환하면 뭘 찾기가 수월하지 않을까?

내가 앉은 바로 뒤쪽 창에서부터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방 안을 푸르게 물들였다.

마치 바다 깊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의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홀로 있었다면 견디지 못할 어둠이었다.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듯 가느다란 달빛이 연하게 뻗어 왔다. 그 안에 갇힌 조그만 먼지가 허공에서 반짝였다. 그게 꼭 작은 공기 방울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겨 가는 중인 걸까 떠오르는 중인 걸까.

“…윽.”

그때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송하견의 동작이 뚝 멈춰 있었다.

송하견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왼쪽 어깨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차마 직접 대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손이 멈췄다.

“으, 흐윽….”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송하견이 앉은 채로 상체를 천천히 구부렸다. 창백한 옆모습이 달빛에 비쳤다. 송하견은 옅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창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으로 급하게 내려왔다. 등에 닿아 오던 딱딱한 냉기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은 가만히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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