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8화 (8/150)

008화.

믿어 주세요

방 안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힘없이 무너진 사람에게 세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박율이 급하게 쓰러진 이의 호흡을 확인하고, 민주혁이 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라엔은 벌떡 일어나 굳은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노을의 붉은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음에도, 쓰러진 이의 얼굴은 이질적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보였다.

“호흡은 괜찮아. 다행히 그냥 잠든 것 같아.”

“그래도 걱정입니다, 박율 형님. 처음 봤을 때부터 몸이 좀 안 좋아 보였는데….”

침착하게 울리는 박율의 목소리와 살짝 떨리는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은 거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모든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무엇 때문에? 알 수조차 없었다.

라엔의 머릿속에 지금까지의 상황이 찬찬히 그려졌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나는 송하견과 함께 조사를 마치고 레데오 앞으로 텔레포트해 돌아왔다. 사방에 퍼져 있는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찔러 왔다.

이번에는 뒤틀린 장소 중 한 곳으로 갔던 길이었다. 해가 뜨지 않아서 항상 밤이 내려 있는 숲이나, 비가 끊이지 않고 오는 사막과 같은 곳들.

“하견. 우리도 용사 서약을 맺고 나서야 그 장소들이 비틀려 있다는 걸 인지했잖아요.”

“…응.”

“뭔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한데, 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을까요.”

“…글쎄. 그래도, 계속 알아봐야지.”

이번 대의 용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장소들이 이상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사에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생각에 빠져서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 건물 앞까지는 금방이었다.

“바로 연구실로 들어가려고요?”

“…응.”

“저번 부상도 아직 다 안 낫지 않았나요? 하견,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요?”

“됐어. …라엔. 너는?”

“나는 서재에서 찾아볼 자료가 있어서요.”

“…그래. 갈게.”

고개를 끄덕인 송하견이 곧바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텅 빈 자리를 멍하니 보다가 불현듯 새로 온다던 사람이 생각났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이한이라고 했었나. 지금쯤 와 있겠네.’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갑작스럽게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왜 지금에 와서? 무엇을 위해서? 심지어 이렇게 강제적인 합류라니, 전례도 없을 일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긴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은 서재로 가기 전에 선이한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선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왜 온 건지 알아야 했다.

‘송하견의 방을 같이 쓴다고 했었나.’

건물 안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바람에 깊게 눌러쓴 로브가 슬쩍 흔들렸다.

“라엔 형님! 오셨습니까.”

송하견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기는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푹신한 베개에 파묻히듯 몸을 맡기고 무릎에 하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널찍한 옷도, 창백해 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도.

붉게 물든 노을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안에서 시리도록 푸른 투명한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곧게 향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그 눈동자와 똑 닮은 색의 마나였다. 선명할 정도로 새파란 마나가 회오리치듯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노을빛이 붉게 내려앉은 방 안에서 그 사람만이 홀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라엔 형, 안녕하세요. 선이한이에요.”

선이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했다. 선이한의 가느다란 목울대가 울렁였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부근을 위협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푸른빛에서.

마나가 이렇게 선명하게 보인다고? 게다가 이런 형태의 마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얇아 보이는 몸 전체를 옅게 빛나는 마나가 칭칭 감싸고 있었다. 몸 내부에 있다고 하기도, 외부에 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선이한은 신전에서 지냈다고 했다. 신전에서 지내는 이들은 모두 마나가 없다. 그러니 선이한에게 마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신력인 건가? 아니. 나는 대신관에게조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지금껏 감지했던 건 마나뿐이다. 그렇다면 저건 마나가 맞다. 처음 보는 형태일 뿐이지.

그런데 저런 형태여도 지금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건가? 눈앞의 생경한 모습에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때 리더 형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만, 라엔아.”

리더 형은 늘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달리. 그러니까 리더 형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그렇게 쉽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푸른빛이 여린 목을 조르는 듯 덧대어 감겨 있었다. 그곳에 불안한 시선을 두었다.

이 중에서 마나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보통은 마나를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다만 나는 마나 감응력이 높은 편이어서 그런지 가끔 마나의 흐름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됐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야 했다. 리더 형을 마주 보고 입을 여는 순간,

“…저는.”

사라질 듯이 자그마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어딘가 간절한 듯이 들려서, 그쪽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선이한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였다. 선명했던 푸른빛이 어느새 흐릿하게 옅어져 있었다.

“이한아?”

리더 형이 선이한의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마른 등을 달래듯 쓸어내리며 이름을 재차 불렀다.

“이한아, 진정해.”

선이한을 감쌌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보이지 않게 됐다. 그제야 선이한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담겼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노을이 선이한을 짓누르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 창백한 얼굴이 어쩐지 버거워 보였다.

아래를 향한 시선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불을 꾹 말아 쥐고 있는 손은 힘이 별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는데도 바들바들 떨리는 듯했다.

헉, 하고 숨을 급하게 들이켠 선이한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이 급한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듯 가쁜 호흡 사이로 불안정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부스러질 듯이 절박해 보였다.

옆에서 리더 형과 민주혁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선이한의 가늘고 하얀 목덜미를 타고 작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벅찬 숨을 잇던 선이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울먹이는 듯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어 주세요.”

그 시선의 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어쩐지 마음이 철렁했다.

어딘가 빗나가 보이는 눈이 먼 기억을 헤집는 것처럼 보였다. 깊은 절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치 이대로 끝났다는 듯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듯이.

“야, 선이한.”

민주혁이 선이한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에 앉았다. 옆으로 쏠리는 무게에 선이한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민주혁이 어깨를 다급히 잡아 단단히 지탱했다.

붉게 물든 방 안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 파랗게 빛나던 눈이 느릿하게 감기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내 모습을 담았다.

선이한이 간절하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믿어 달라는 것이었으나, 그 눈빛은 체념에 가까웠다.

가쁘도록 숨을 들이켜던 선이한은 더는 바라지 않겠다는 듯 완전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멈췄던 사고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더 생각할 것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바로 앞에서 소환 마법을 쓸 수는 없어.’

선이한에게 보였던 것이 정상적인 마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문을 닫고 급하게 소환 마법을 썼다. 마법을 외우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공중에 떠오른 작은 종이봉투를 잡아채고 다시 문을 세차게 열었다.

창백하게 질린 선이한의 입가에 종이봉투를 펼쳐 가져다 댔다. 선이한이 흔들리는 눈을 나에게로 맞춰 왔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이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상태가 나쁘면 도움받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리고 어쩌면, 원인을 내가 제공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맞을 것이다. 섣부르게 추궁하는 말투로 말한 게 문제였나? 아니면 트라우마를 건드린 건가?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단순히 묻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의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니까.

입술을 잘근 물었다. 리더 형의 말처럼 시간을 두고 물었어야 했나?

선이한의 눈가가 살짝 젖은 듯 보였다. 놀란 듯 크게 떠진 동그란 눈이 마치 한 치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보였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헉, 하아…. 흐….”

선이한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손에 쥔 종이봉투가 작게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리더 형이 선이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호흡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왔다. 민주혁은 선이한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힘없이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선이한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잘게 떨리던 몸도 진정되어 갔다.

“아.”

순간, 짧은 탄식을 내뱉은 선이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풀썩,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라엔아.”

타이르듯이 나를 부르는 리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선이한은 커다란 이불에 파묻히듯 덮인 채 누워 있었다. 고른 숨을 조그맣게 내쉬고 있었다.

“이한이는 이제 좀 안정된 것 같아. 그런데….”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리더 형.”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내 잘못이었다. 리더 형의 말처럼 나중에 물어봐도 되는 일이었는데, 아까는 급한 마음에 질문이 먼저 나갔다.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선이한이 깨어나면 제대로 사과하라는 듯, 리더 형은 차분하게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물론 용서받는 건 별개겠지만.

처음부터 관계를 이렇게 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아까 말을 들어 보니 선이한도 그 마나 비슷한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던데…. 그것 때문에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굳게 끄덕이자, 리더 형이 분위기를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라엔아. 뭘 봤어?”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리더 형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언뜻 스쳤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