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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7화 (7/150)

007화.

의심하지 말아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바로 위에서 박율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다, 이한아. 일단 올라가서 쉬자.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게.”

고개라도 끄덕이고 싶었으나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몸 하나 튼튼한 게 자랑이었던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었다.

“걸을 수 있겠어?”

“…….”

걸을 수 있을까? 그 전에 일어날 수 있기는 할까?

모르겠다. 그냥 너무 피곤했다. 무력한 기분에 눈을 찌푸리듯 감았다. 그때 갑자기 몸이 훅, 하고 위로 들렸다.

다급히 눈을 뜨자 나를 가볍게 안은 박율이 있었다. 단단한 몸이 나를 조심스레 받쳐 왔다.

박율이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너른 어깨에 힘없이 이마를 가져다 대자 닿아 오는 옷 아래로 온기가 느껴졌다.

“괜찮아. 긴장 풀어, 이한아.”

다독이는 것처럼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박율은 발걸음을 사뿐하게 옮겼다.

탁.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나선 박율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몸이 살짝씩 흔들렸다.

피로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까 오면서 잠을 자기는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던 듯했다. 그리고 방금도 너무 큰일이 있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거지?

“…이상하네.”

중얼거리는 듯한 박율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밀려오는 졸음에 머리가 굳은 것처럼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몸이 나른하게 까라졌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 했다. 지금은 잘 수 없었다.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또 잠이 든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눈을 떴더니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든가. 시선을 돌리니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든가.

그래도 시간이 많이는 안 흘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무려 하루가 통째로 지나가 버렸다는 얘기를 듣거나. 뭐 그런 일들 말이다.

“…율이 형? 하루가 지났다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박율이 쓰게 웃었다. 박율이 내 어깨와 등을 받쳐 주며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는 것을 도왔다.

등 뒤로 푹신하게 닿는 감촉이 느껴져서 옆을 돌아보았다. 솜이 잔뜩 들어가서 푹신한 베개를 대어 주는 민주혁이 보였다.

“선이한. 너….”

민주혁이 걱정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차분히 기다리려는데,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가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짙은 색의 로브를 입고 모자까지 깊숙하게 눌러쓴 채였다.

그가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을 들어 올려서 로브의 모자를 천천히 걷어 내렸다.

창 안으로 붉게 물든 노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색과 꼭 닮은 붉은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그는 물결치는 짧은 머리를 뒤로 낮게 묶고 있었다.

“라엔 형님! 오셨습니까.”

옆에서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가에 선 사람의 머리칼에 지고 있는 태양의 붉은빛이 스며든 것 같았다. 연하게 빛나는 듯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자를 완전히 걷어 낸 그가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와 허공에서 시선이 딱, 하고 부딪쳤다.

띠링.

귓가에 맑은 소리가 울렸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Ⅰ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기절 3분 페널티

제한 시간: 3분

파랗고 투명한 퀘스트 창이 눈앞에 깜빡였다. 그 뒤로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그 마나는 뭐예요?”

그의 시선은 한 치의 엇나감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사이에도 시간이 틱, 틱, 한 칸씩 줄어들고 있었다.

「제한 시간: 2분 59초」

「제한 시간: 2분 58초」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종종…. 아니, 꽤 자주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불을 꾹 말아 쥐고 침착하게 숨을 내쉬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기절이라면 3분 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가능할 듯했다.

패시브 효과 덕분에 고통을 느낄 리가 없는데도 머리가 지끈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제한 시간을 분 단위로 주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싶었다. 심지어 필수 퀘스트라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차근차근 떨어지는 숫자를 보고 있을 때, 옆에서 박율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엔아.”

박율이 차분한 눈으로 문가에 선 사람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이한이 방금 일어났어.”

그 말을 들은 그는 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다시 내게로 시선을 맞춰 왔다. 조금 날이 서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이한. 라엔이에요. 온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라엔 형, 안녕하세요. 선이한이에요.”

내뱉는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이 순간에도 남은 시간이 딸깍딸깍 줄어들고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뭘 어떻게 말해야 남은 시간 안에 나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할 수 있지? 아니, 애초에 정확히 뭘 의심하고 있는 거지?

이불을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적었고, 시간은 그보다 더 부족했다.

“이한.”

라엔이 내 이름을 재차 불렀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의 경계심 때문인지 딱딱한 분위기를 풍겼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침묵하던 라엔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지냈다고 하지 않았나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엔이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마나는 뭐예요? 게다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에요. 마치….”

“그만, 라엔아.”

박율이 말을 가로채듯 끊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라엔이 고개를 휙 돌려 박율을 바라보았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라엔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다.

뒤로 묶은 라엔의 머리칼이 스르르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머리칼에 반쯤 가려진 옆모습이었음에도 다급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리더 형, 잠깐만요.”

“그래. 일단 조금 진정하고, 이한이도 더 쉬게 한 다음에. 그러고 나서 천천히 얘기하자.”

아니다. 천천히 얘기하면 안 됐다. 기절이 코앞이었다. 일단…. 일단은 뭐라도 말해야 했다.

「제한 시간: 1분 14초」

「제한 시간: 1분 13초」

고민하는 중에도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촉박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앞으로 몇 마디나 더 말할 수 있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까지 운을 뗐는데 더 이어 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퀘스트 창에 시선만 흘끔흘끔 가져다 대었다. 혹시 시스템이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려 주지는 않을까? 힌트 같은 거 없나?

당연하게도 없었다. 부질없는 기대였다. 정수리에 박혀 오는 시선이 따가운 듯했다.

옆에서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박율의 손길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제한 시간: 59초」

「제한 시간: 58초」

시시각각 줄어드는 숫자를 보니 막막함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나한테 마나가 있는 이유?’

그건 나도 궁금했다. 나조차 모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해시킬 방법도 없었다. 그래, 차라리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자.

“그게, 저도 잘…. 모르지만….”

급하게 설명하려니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더듬더듬 나왔다.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 안 봐도 뻔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어느 날부터, 갑자기… 생겼다고….”

순간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내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시스템이 생겨난 다음부터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눈에 안대가 씌워진 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 같았다.

답답함과 서러움에 목이 잠겨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믿어 주세요.”

손이 떨렸다. 목소리도 떨려 왔다. 시선을 조심스레 올려 보니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한 시간: 37초」

이 시간 안에 의심을 풀게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암담함에 눈을 꾹 감았다. 절망적인 기분 탓인지 침대 옆이 푹 꺼져 몸이 얕게 기우는 듯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다. 시간의 빠른 흐름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뭐,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기절이라고 해도 3분이니까 눈 깜빡할 새에 깨어날 터였다. 애써 합리화하고 있을 때,

쾅.

갑자기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드니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라엔이 자리에 없었다. 지금 나간 건가?

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눈을 크게 뜬 라엔의 손에는 작고 얇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웬 봉투?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이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라엔은 급한 손길로 종이봉투를 펼쳐 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민주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박율은 아직도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는 채였다.

닿아 오는 모든 온기가 뜨거울 정도로 선명했다.

“믿어. 믿으니까, 천천히 숨 쉬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거나 더 생각할 새 없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정하게 끝났다.

「제한 시간: 0초」

이제 다시 눈을 감을 때였다. 바로 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Ⅰ 실패!

페널티 ‘기절’이 지속 시간 ‘3분’ 동안 유지됩니다.

예상한 바였다. 이제 와 놀라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띠링.

그때 불길할 정도로 맑은 소리가 또 귓가에 울렸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Ⅱ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고열 3시간 페널티

제한 시간: 3시간

새로운 퀘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퀘스트 창이었다. 이런 건 예상한 적 없는데….

「제한 시간: 2시간 59분 59초」

숫자가 틱, 줄어드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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