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비정상적 접근
바람에 나부끼는 금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용사라는 글자를 그림으로 그리면 꼭 눈앞의 모습과 같을 터였다.
민주혁이 이른 아침의 선선한 바람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는 한낮의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희고 맑은 피부에 건강한 혈기가 돌았다.
‘용사라는 사람들은, 정말 다 이렇게 빛나는구나.’
대문 앞에 멍하니 선 채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손목에 부드럽게 와 닿는 온기가 있었다.
민주혁의 손이었다. 보기보다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다 감싸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민주혁이 내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선이한. 괜찮으니까 들어와.”
천천히 이끄는 손에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꽃향기가 더 진해졌다. 옆에서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율 형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나도 방금 나왔어, 주혁아. 빨리 왔네. 그리고….”
그는 부드럽게 웃음 띤 얼굴로 말하고는 민주혁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해사한 눈웃음을 지은 채였다.
“안녕하세요. 선이한이에요.”
“안녕, 이한아. 박율이야. 편하게 말해.”
햇살이 녹아 있대도 믿을 만큼 따뜻하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네, 율이 형.”
힘을 주어 대답했으나, 내가 뱉는 목소리는 어쩐지 떨린 것도 같았다.
◇
민주혁과 박율은 그 자리에서 잠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박율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주혁아, 라엔이가 방어 마법 훈련실을 보강해 뒀대.”
내 손목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흠칫 떨렸다. 아, 지금 알았다. 민주혁, 아직도 잡고 있었네.
앞에서 박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민주혁에게 말을 이었다.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너 오면 전해 달라고 하더라.”
민주혁은 대답 없이 잠시 멈춰 있었다.
옆을 바라보니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지한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가 보고 싶은 것 같았다.
민주혁의 단단한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나를 붙잡고 있다는 걸 아예 잊어버린 듯했다. 손등을 콕콕 찌르니 민주혁이 몸을 잠깐 굳혔다. 그러고는 나를 재빨리 돌아봤다.
왠지 약간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민주혁에게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가 봐. 중요한 일 같은데.”
“아니, 일단 너 데려다주고. 방이 어딘지는 알아?”
몰랐다. 그래도 괜히 시간 뺏고 싶지는 않은데.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주혁아. 편하게 다녀와. 이한이는 형이랑 같이 갈까? 얘기도 할 겸.”
나를 바라보는 박율에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약간 고민하는 듯 보이는 민주혁에게 내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벗어서 돌려주었다. 민주혁이 손에 들린 자신의 옷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율 형님!”
그러고는 내가 피곤해 보여서 쉬게 해야 할 것 같다느니, 하는 쓸모없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박율이 옆에서 웃음기 스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피곤한데.’
나는 지금 무척이나 괜찮고 멀쩡한 상태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이미 오는 길에 혼자 숙면을 했기 때문이어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혁은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이에 순조롭게 말을 마쳤다. 나를 돌아본 민주혁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려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였다.
“갈게. 푹 쉬고.”
그러고는 씩씩하게 뛰어가 건물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재빠른 모습을 좇으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민주혁이 헝클어 놓고 간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박율이 푸스스 웃으며 내 뒷머리를 마저 정리해 주었다.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발아래로 뜨겁게 데워진 넓적한 돌이 밟혔다. 고개를 드니 아까 봤던 네모나고 아담한 건물이 바로 앞에 있었다. 문이 정 가운데에 나 있었다.
끼기긱.
박율이 문을 열었다. 별로 낡아 보이지 않는 문이었는데도, 녹슨 것처럼 기계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건물 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내부가 아주 어두운 듯했다.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동시에 휘익, 하고 강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뒤로 물러섰다. 발에 뭐가 걸렸는지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턱, 하고 등에 와 닿는 손길이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떴다. 박율이 내 등 쪽으로 손을 뻗어 단단히 받쳐 주고 있었다.
“이한아, 많이 놀랐어?”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놀라서 눈을 세게 비벼 다시 뜰 뻔했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건물 내부의 모습 때문이었다.
쨍한 햇빛이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둥그런 천장 꼭대기에 꽉 막힌 벽 대신 원형의 유리가 박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가 반짝이듯이 환하고 밝았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난 계단은 벽을 타고 2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해 보이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땐 이렇게 넓어 보이지 않았는데.’
건물 내부와 외부 모습의 괴리감에 고민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박율이었다.
“너무 놀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옅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미안하다기보다는 놀리는 듯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놀란 건 사실이었으므로 휘둥그레 뜬 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박율을 올려다봤다.
박율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커다란 공간이 필요했거든. 그런데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처음 설계할 때 마법을 썼어. 밖에서는 평범한 건물처럼 보이도록.”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그 유용함에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등에 닿았던 손이 떨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머리 위로 무게가 느껴졌다.
“참 이상하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게.”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박율은 나와 눈을 마주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일단 갈까, 이한아. 들어야 할 얘기가 많으니까. 너도, 나도.”
박율은 아까 민주혁이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 보이는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도착한 곳은 1층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낮은 탁자가 있었고, 양쪽에 소파처럼 보이는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한쪽 벽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 노란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박율이 찻잔 두 개에 차례로 차를 따랐다. 가운데의 접시 위에는 여러 모양의 쿠키를 꺼내어 올려 두었다.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했다. 연한 분홍빛의 찻물 안에는 얇게 저민 과일 조각과 꽃잎이 떠 있었다. 달콤한 꿀 향기와 꽃향기가 났다.
차를 홀짝이는 나를 바라보던 박율이 옅게 웃으며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살짝 밀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박율은 이 건물의 구조를 간단히 소개해 줬다. 식당은 1층에 있다거나, 2층에는 방이 네 개 있어서 각자 하나씩 사용하는 중이라든가.
“그래서, 이한아. 괜찮으면 하견이랑 같은 방을 쓸래? 송하견, 너보다 한 살 형이야.”
방은 넓은 편이고, 송하견이라는 사람은 1층의 연구실에서 주로 지낸다고 했다.
방을 같이 쓰는 건 송하견도 동의한 일이고, 혹시 내가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 편하게 얘기해 달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뭐, 딱히 상관없지 않나? 어디서 자든 잠만 자면 됐지,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얘기를 해 줄래?”
그 물음에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실상 나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박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음, 신전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마나가 없다고 들었어.”
아. 이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율이 형이 알고 있는 게 맞아요. 그런데 나는 마나가 있대요. 이유는 모르지만요.”
박율이 들어 올리던 찻잔을 멈췄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설명이 너무 짧았나 싶어 말을 덧붙이려던 찰나, 박율이 고개를 내 쪽으로 휙 들었다.
“이한아.”
“네.”
박율이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선명한 연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곧게 담겼다.
순간, 그 눈 한가운데에 붉은빛이 얼핏 비쳤다.
「<경고!> ‘비정상적 접근’ 발견.
방화벽을 활성화하여 차단합니다.」
동시에 내 눈앞에 붉게 변한 상태 창이 떠올랐다.
「방화벽 활성화: 3 초 전」
「방화벽 활성화: 2 초 전」
「방화벽 활성화: 1 초 전」
숫자가 깜빡깜빡 줄어들었다. 이게 뭐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삐이.
이명과 함께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몸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이 나면서 갑작스럽게 힘이 빠졌다.
스르르 무너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기댔다. 의자 팔걸이를 두 손으로 잡고 그 위로 이마를 포개어 가져다 댔다.
“이한아?”
앞에서 당황이 묻어 나오는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반응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이명에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막연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박율이 급하게 일어서는지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이한아, 고개 돌려 봐.”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잠깐만, 이쪽 봐 봐.”
이명 때문에 박율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릿했다. 박율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천천히 돌렸다. 그 손길에 간신히 고개를 움직였다.
박율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있었다. 나와 시선을 맞춰 오는 박율의 표정이 조금 굳은 듯이 보였다. 내 모습이 담긴 눈동자의 중앙에 여전히 붉은빛이 작게 퍼져 있었다.
“그래. 그렇게 눈 감지 말고, 형 보고 있어.”
박율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동시에 연녹색 눈동자 중앙의 붉은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비정상적 접근’ 해제
방화벽을 비활성화합니다.」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온 상태 창이 눈앞에 반짝였다.
이명이 사라졌다. 아득한 공포감도 사라졌다. 그러나 몸에는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축 늘어져 있자 박율이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새 식은땀이 났는지 이마에 닿아 오는 공기가 찼다.
“괜찮아?”
걱정이 담긴 듯 가라앉은 말투였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진이 빠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늘어져 있자 박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