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미안할 일 아니야
선이한의 왼쪽 팔뚝 반절 정도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위로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붕대는 틈도 없이 단단히 동여매진 채였다. 그렇지 않아도 색소 옅은 선이한의 피부가 더욱 희게 질려 보였다. 어설픈 솜씨로 무작정 세게 묶은 모양새였다.
‘상처를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소독은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다. 붕대에 피가 스며든 모양을 보니 꽤 깊은 상처 같은데.
방금 코피가 날 때 지혈도 제대로 못 했던 선이한을 떠올려 보니, 제대로 치료했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당장이라도 꽉 감긴 붕대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을 내리눌렀다. 이건 내가 함부로 들춰낼 부분이 아니었다.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된 사이에 멋대로 붕대를 풀어서 상처를 확인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렇다고 상처 좀 보자고 말을 하자니, 그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선이한의 고집을 보아하니 지금 물어봐 봤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잡아뗄 게 뻔했다.
오히려 앞으로 더 꼭꼭 숨기려고 할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그게 더 위험했다.
‘적어도 붕대는 다시 감아 주고 싶은데.’
푸른 혈관이 도드라진 가느다란 손목이 툭 부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 모습이 꼭 바스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마음이 꽉 막히는 듯했다.
가까스로 평소와 같은 표정을 만들어 내며, 걷어 올렸던 옷자락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어서 내렸다.
선이한은 여전히 시선을 앞에 둔 채 나른한 얼굴이었다. 내가 팔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반쯤 감긴 눈을 보니 애초에 눈치챌 정신도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야, 선이한. 이거 접는 걸로는 안 되겠다.”
선이한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말갛고 푸른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눈가가 여전히 조금 붉어 보였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번졌네. 지금 클린 마법 쓴다.”
선이한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붉게 물든 소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몸이 이상한 것 같으면 바로 말하고.”
조용히 클린 마법을 외웠다. 소매에 번졌던 붉은 핏자국이 서서히 옅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선이한에게 물었다.
“어때, 괜찮지?”
“…….”
대답이 없었다.
이 정도의 마법은 괜찮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아니었나? 혹시 어디가 안 좋은가 싶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야, 선이한?”
선이한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선이한이 초점이 맞지 않는 듯 흐려 보이는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였다.
곧 선이한의 고개가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쓰러지는 건가 싶어 급하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선이한은 머리 옆으로 엉거주춤 뻗은 내 손바닥에 천천히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에 닿는 뺨이 부드러웠다. 어울리지 않게 어쩐지 조금 말랑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뜨거웠다. 내 손이 차가운 편이 아닌데도, 닿아 오는 뺨이 뜨거워서 손이 델 듯이 달아올랐다.
‘잠깐. 뜨겁다고?’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려 선이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과 달리 약한 열감이 느껴졌다. 미열인 듯했다.
목덜미와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니, 역시 얇은 옷 아래로 옅은 열감이 느껴졌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 부작용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지금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선이한.”
“…….”
“선이한, 나 봐 봐. 너 아파?”
“아니.”
선이한은 이제까지와 달리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기댄 얼굴을 슬쩍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선이한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졸려서.”
그래 보이기는 했다. 한참 전부터. 그런데도 왜 안 자고 버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선이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마차 벽에 기대게 했다.
“내가 아까부터 말했지. 좀 자라고.”
선이한의 새하얀 얼굴이 열 때문인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위태로워 보였다.
“왜 그렇게 버티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선이한의 뺨에 닿았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손바닥에 닿던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멀어졌다. 어쩐지 조금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이한은 마차 벽에 머리를 그대로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감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는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선이한이 천천히 입을 열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너 앞…, 혼자 자기가….”
“어?”
“…미안.”
잠겨 가듯 서서히 줄어드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혼자 자기가 미안해서 지금까지 안 잔 거라고.’
참 미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좀 걱정되기도 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그만큼 나를 생각해 줬다는 거니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억지로 오는 거여서 우리를 무작정 싫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편으로 내내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놓인 것 같았다. 물론 또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그냥 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선이한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미열이 있는 걸 보니 감기라도 오려는 건가 싶었다. 선이한의 멍한 시선이 무릎에 놓인 겉옷으로 향했다.
“신경 쓰지 말고.”
미안할 일도 아니야, 그렇게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선이한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눈을 깜빡이는지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잠들었네.’
천천히 손을 떼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잠든 선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드디어 자는구나. 이렇게 금방 곯아떨어질 정도로 피곤했으면서 지금까지 아득바득 버티다니, 조금 놀랍기도 했다.
‘좀, 다른 것보다 자기 몸 상태를 먼저 신경 썼으면 좋겠네.’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눈을 감은 선이한의 머리칼을 한 번 조심스레 쓸었다. 단정한 머리칼이 손바닥에 부드럽게 닿아 왔다.
‘나중에 붕대 감는 방법도 제대로 알려 줘야지. 지혈하는 법이랑, 상처 소독하는 법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마차 안이 조용했다. 마차가 작게 덜컹거리는데도 선이한은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축 늘어진 팔이 힘없이 흔들렸다.
‘아까 그 상처.’
위치로 봤을 때, 그건 넘어지거나 해서 실수로 난 상처는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흔적도 아닌 듯 보였다.
깊고, 길게. 피를 최대한 잘 내기 위해 벤 것이 분명했다.
선이한은 신전에서 있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신전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피 같은 것들을 제물로 바쳐 신력을 쓰기도 했으니까.
‘대가가 커서 위험한 것도 꽤 있다고 했지.’
아카데미에서 배울 때 신전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지나가듯이 짧게 다루기는 했지만, 그중에서 언뜻 기억나는 게 있었다. 특히 부담이 큰 신력. 뭐였더라….
‘미래의 일을 엿본다, 이런 비슷한 거였는데.’
스치듯 들은 것이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잘 지켜봐야겠네.’
뭐가 됐든 선이한이 먼저 말해 주려고 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그러니 지켜보다가 많이 위험한 거면 바로 말려야 했다.
게다가 신력을 쓰기 위해 상처를 낸다는 것도 추측에 불과했다. 거의 확신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지켜봐야 했다.
끼이익.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차가 서서히 멈췄다. 드디어 도착이었다.
손을 뻗어 식은땀에 살짝 젖은 선이한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는 동안 열은 떨어진 것 같았다.
잠을 깨우기 위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얇은 옷 아래로 마른 몸이 느껴졌다.
“선이한.”
내 목소리를 들은 선이한이 작게 움찔했다. 고요히 감겼던 눈이 느릿하게 떠지며, 투명한 물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온전하게 담겼다.
◇
“선이한.”
잠결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주혁이 시야에 담겼다.
“일어나. 레데오에 도착했어.”
민주혁의 밝은 목소리가 멍한 정신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응.”
아직 비몽사몽 했다. 잠이 덜 깬 듯 정신이 몽롱했다.
무릎에 덮인 민주혁의 겉옷을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민주혁이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마차 안으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어.’
찬 공기에 정신이 확 들었다.
밖으로 오후의 낮은 햇살이 노랗게 비치고 있었다. 아까는 새벽 같은 푸른 아침이었는데,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몸이 아까보다 훨씬 개운했다. 그리고….
‘와, 정말 푹 잤네.’
암담했다.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숙면을 했다니, 엄청난 첫인상일 것이 분명했다. 앞을 흘끗 봤다. 그나마 다행히도 민주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멀끔한 표정이었다.
‘이미 지나간 거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잘하자.’
속으로 다짐하며, 민주혁이 곧게 뻗은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그 뒤로 아담하게 건물이 하나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내 무릎에 덮였던 겉옷을 고이 접어 민주혁의 손에 들려 주었다. 민주혁은 그 옷을 다시 곱게 펼쳐서 내 어깨에 사뿐히 얹어 주었다.
“민주혁, 이거 왜…?”
“뭐가?”
민주혁이 천연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아니야. 고마워.”
잠깐 당황했으나, 쌀쌀한 날씨에 걸쳐진 옷이 나름 따뜻했다. 민주혁이 잠깐 가볍게 웃은 것 같았다.
마저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대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민주혁이 손을 뻗어 큼지막한 대문을 천천히 열었다.
바닥에 잔디가 낮게 깔려 있었다. 대문 바로 앞부터 건물까지 납작한 돌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옆쪽으로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키가 큰 꽃도 있었고 작은 꽃도 있었다. 가을바람에 꽃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어, 박율 형님?”
옆에서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주혁의 시선을 따라가니 흐드러지게 핀 꽃 바로 옆에 선 사람이 있었다.
손에 들린 작은 물뿌리개에서 가는 물줄기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태양 빛을 머금은 듯 빛났다.
바람이 휘 불어와 그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오후의 낮은 태양 아래서 금발이 반짝였다.
그는 민주혁과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였다. 봄의 새싹처럼 연한 녹색의 눈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서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바닥에 살며시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섰다.
마주 본 그는 옅은 눈웃음을 지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금방 왔구나.”
찬 바람을 타고 연한 꽃향기가 스쳐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