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흰 옷자락의 붉은 핏자국
안 그래도 하얀 편인 선이한의 얼굴이 어쩐지 더 창백하게 질려 보이는 듯했다.
‘멀미가 진짜 심하구나. 아니, 그러면 말을 하지….’
나라고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태가 별로면 빨리 말하는 편이 낫지 않나. 아무래도 선이한은 아픈 걸 별로 티 내고 싶어 하지 않는 편인 것 같았다.
드륵.
손을 뻗어 창문을 살짝 열었다. 라엔 형님도 멀미할 때 이렇게 하곤 했다.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러면 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어.”
“어…. 그 정도는 아니야.”
선이한은 곧 쓰러질 듯이 창백한 낯을 하고선 창문 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자기가 애써 괜찮다고 한다면야 형님들에 관한 얘기를 마저 해 줄까 했는데, 몇 마디를 말해 보니 아무리 봐도 제대로 듣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설명은 나중에 해 줘도 되니까 일단 질문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선이한. 안 자고 그러고 있을 거야?”
“…응.”
“안 힘들어?”
“…어.”
앞에서 보는 내가 다 힘든데. 차오른 말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너 얼굴도 하얗게 질렸어.”
“어어…. 그렇구나….”
“속 안 좋지?”
“…응.”
“…너,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는 거지.”
“…어어.”
고집도 이 정도 고집이면 고개라도 끄덕여 줘야 했다. 선이한은 멍한 표정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창밖을 향한 연한 푸른색의 눈이 점점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면서도 선이한은 절대 잠들지는 않았다.
“야, 선이한.”
야, 야. 그렇게 몇 번을 더 불렀다. 선이한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로 시선을 맞춰 왔다.
“선이한 너 진짜, 진짜.”
…완전 고집 있다. 이어지려는 말을 삼켰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자라, 하고 이미 여러 번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려는데 선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민주혁.”
갑자기 나를 부르는 호칭이 훨씬 편해졌다. 나야 뭐, 아까부터 편하게 부르고 있긴 했지만.
선이한은 동갑이니까 반말을 하면서도 묘하게 어색해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어색이고 뭐고 없었다.
반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편하게 대해 준다면야 나는 좋았다.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웃으면서 선이한을 바라봤다. 선이한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진짜. …내가 진짜, 괜찮아…라고, …했잖아.”
정정한다. 나를 편하게 대해 주는 건 좋았지만 내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어 줬으면 한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앞으로 이동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불쑥 걱정이 들었다.
마나가 없는 사람은 마법에 짙게 노출되면 몸에 무리가 간다. 그러니 선이한에게는 텔레포트도 못 써 줄 텐데.
내가 앞에서 걱정하든 말든, 선이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멍한 눈으로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
내가 말을 아예 안 걸면 선이한이 알아서 잠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선이한의 가느다란 목이 찬찬히 까딱였다. 선이한은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둔 채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가 싶어 나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음, 풀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열심히 보고 있는 선이한의 앞에서 이런 생각 하기는 미안하지만, 죄다 똑같은 풍경만 스쳐 지나가니까 본다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멍하니 있는 거잖아, 선이한.’
한참을 서로 말없이 있었는데도, 선이한은 파리한 낯 그대로 깨어 있었다.
“…아.”
그때 조용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에서 눈을 떼고 선이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이한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백색 옷이 붉은 핏방울로 하나둘 천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야, 선이한!”
나른했던 기분이 확 달아났다. 심장이 떨어지듯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툭, 투둑.
선이한의 얇은 옷자락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새하얀 바탕에 서서히 번져 가는 새빨간 자국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헉.”
그 모습 위로 겹치는 상황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손이 떨렸다.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아니야. 생각하지 마.’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나간 기억은 발판으로 삼고 넘어가는 것이어야 했다. 기억에 매몰돼 허우적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용납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이미 머릿속에는 지난번 전투에서의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
우웅.
엷은 장막이 주위에 일렁였다.
지난번 전투에서, 나는 늘 하던 것처럼 우리 주위로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꿀렁이며 밀려오는 마물을 붙잡아 두는 마법을 외웠다.
앞쪽에서는 박율 형님과 라엔 형님이 마물을 향해 공격 마법을 썼다.
송하견 형님은 내 오른편에 서 있었다. 형님은 구석으로 빠져나오는 마물에 간간이 공격 마법을 외우며, 모노클을 쓴 채 노트에 사각사각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어.”
갑자기 라엔 형님이 짧은 숨을 들이켜며 뒤로 돌았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데,
파악.
송하견 형님이 나를 세게 밀쳤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내 위로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라엔 형님이 다급히 마법을 쏘아 내 뒤쪽의 마물을 공격했으나, 이미 일은 터진 후였다.
“윽….”
송하견 형님이 왼쪽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시뻘건 피로 옷이 빠르게 젖어 들어 갔다. 주르륵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숨이 막혔다. 내가 마물의 기척을 더 기민하게 알아챘더라면. 내가 방어 마법을 더 여러 겹 둘렀더라면. 수많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내 바로 옆에는 송하견 형님의 노트가 떨어져 있었다. 그 위로 뜨거운 핏방울이 천천히 쏟아졌다.
투두둑.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소리였다.
새하얀 종이에 서서히 번져 가는 새빨간 자국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시야에 담겼다.
◇
사락.
천이 스치는 자그마한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선이한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선이한은 창백한 손을 얼굴 아래로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하얀 손바닥 위에 핏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어지럽던 시야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다행히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다.
“선이한. 이걸로 누르고 있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선이한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래도 지금 손수건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나가 많이 들어가는 편인 소환 마법은 선이한의 옆에서 쓸 수 없었으니까.
“…왜.”
선이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손에 쥐고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투명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지혈하는 방법을 모르나?’
표정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고개 들지 말고.”
선이한의 동그란 뒷머리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눌렀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손바닥에 닿아 왔다. 선이한은 내 손길이 닿는 대로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손수건을 두어 번 접어 선이한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코를 꾹 눌러 지혈했다. 선이한은 여전히 당황이 묻어나는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순간 선이한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혹시 너무 세게 눌렀나 싶어 힘을 살짝 푸는데,
“…아.”
선이한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탄식했다. 이제야 어떻게 지혈하는지 이해한 듯했다.
“어. 그렇게 있어.”
선이한의 손을 잡아 올려 손수건에 가져다 대 주었다. 제대로 지혈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뒷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도 뗐다.
선이한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혈을 잘하고 있는 것이 뿌듯한지,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
선이한의 코피가 드디어 멎었다.
생각보다 오래 멎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시간을 더 두고 지켜보니 멈추기는 했다.
‘음…. 옷에 물든 피는 어떻게 하지.’
바닥은 얼추 정리했으나 이미 피가 스며든 옷이 문제였다. 소매와 무릎 쪽의 옷자락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이걸 닦으려면 마법을 쓰는 방법밖에 없겠는데.
“선이한. 너 주변에서 마법 쓰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선이한은 질문을 이해하는 듯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신전에서 지냈으니 마법을 접해 본 적이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클린 마법은 아카데미에 입학하자마자 배울 정도로 마나를 적게 사용하는 마법이라서 써도 괜찮을 듯싶었다.
“지금 마법 써서 옷에 묻은 피 지울 건데, 어디가 이상한 것 같으면 바로 말해.”
“…응.”
“괜찮을 텐데 혹시나 해서.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서 피가 묻은 무릎 부근의 옷자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클린 마법을 외우니 선명했던 피가 스르르 옅어지더니 금세 사라졌다.
“선이한. 지금 괜찮아?”
“…어. 괜찮아.”
바로 대답하는 선이한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으나, 어디가 아프다거나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 정도의 작은 마나에 노출되는 건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도 마법을 쓰는 건 최대한 줄이는 게 좋겠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니 작은 부분도 주의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소매 쪽에 묻은 피는 조금 걷어서 접으면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매는 그냥 접는다.”
그렇게 말하며 손등까지 넓게 덮고 있던 선이한의 소매를 살짝 걷어서 접어 올렸다.
‘…이게 뭐야.’
투박하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 붕대는 선이한의 가느다란 손목 바로 위쪽부터 팔뚝 중간쯤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얼핏 피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