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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3화 (3/150)

003화.

아슬아슬해 보이는 사람

내게 힘드냐고 묻는 민주혁의 말을 듣고 뼈저리게 반성해야 했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 힘든 티를 내다니. 심지어 새벽같이 나를 데리러 온 사람 앞에서.

그다지 힘든 것도 아니었다. 적지만 피도 흘리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조금 피곤할 뿐이지. 민망함에 휘둥그레 놀라서 쳐다보자 민주혁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멀미라도 하나 싶어서.”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는 방금까지의 내 태도를 설명할 방법이 달리 있지 않았다.

결국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자, 민주혁은 멀미에는 자는 게 낫다며 나를 재우려 했다.

맙소사 감사합니다, 하고 당장 눈을 감을 뻔했으나 다행히도 이성이 나를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서 자는 건 예의를 갖다 버린 사람이었다. 민주혁도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내가 그 앞에서 먼저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며 창문으로 눈을 돌리자, 민주혁은 알겠다며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거기에 응,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대답만 했다.

물론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얘기면 나중에 다시 말해 주겠지. 내가 나사를 하나 빼놓고 대답하는 걸 민주혁도 눈치채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럴 거면 그냥 자는 게 낫나? 아닌가? 멍한 머리에 의미 없는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그래도 얘기를 나누면서 민주혁과 거리감이 훌쩍 가까워졌다.

“야, 선이한.”

민주혁이 나를 이렇게 부를 정도였으니까.

나도 똑같이 야, 민주혁, 하고 불러 줬기에 손해 본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부른 뒤 만족스럽게 씩 웃던 민주혁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에 남았다.

잠깐. 그런데 너무 급격하게 가까워진 것 아닌가?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뭐, 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런 안일한 생각이 드문드문 흘러갔다. 반쯤은 수면하듯이 몽롱한 상태로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기댔다.

가는 길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중간에 코피가 나는 등의 작은 소동이 있긴 했지만.

처음에는 당황해서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힐러는 고통 면역이라면서요. 웬 코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말 아프지는 않았다. 딱 고통만 없었다.

아하, 신체적 피로는 그대로 쌓이는구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만족스러웠다.

놀란 민주혁과 함께 허둥지둥 수습하고, 상황이 조금 정리되자 민주혁은 그대로 내 머리를 마차 벽에 기대게 해서 나를 재웠다.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공기가 후끈해진 느낌이었다. 그 난리를 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차의 더운 실내 공기에 창문 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옅게 섞였다. 무릎 위에 덮인 민주혁의 겉옷 덕분인지 몸은 따끈했다.

‘응? 무슨 겉옷? 이게 왜 여기 있지?’

아무튼, 잠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민주혁은 처음 신전에 들어서자마자 생각했다.

‘이야, 진짜 삭막하네.’

꽤 오랜만의 방문이었으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온통 흰색 칠을 하고 금색 테를 두른 웅장한 신전은 어딘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분위기를 풍겼다.

새로운 일행을 데리러 와야 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다시는 여기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척하며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멀리서 느껴졌다. 하얀 신관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제 갈 길을 가는 신관들의 모습이 엄숙하다기보다는 냉랭하게 느껴졌다.

별로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여긴가?’

미리 전달받은 대로 구석으로 조금 들어가자 작은 별관 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었다. 안에는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손을 들어 올려 문을 두드리려다가 멈칫했다.

‘이름이 선이한이라고 했지.’

얼마 전 박율 형님이 신전에서 연락을 받았다. 이쪽에 합류시킬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선이한, 17세. 용사님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신전 측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에 다른 형님들은 썩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나는 이 상황에 그렇게 불만은 없었다. 이왕 같이 지낼 거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낫잖아?

그리고 선이한과 동갑이라는 점도 꽤 괜찮았다. 다들 형님이고 나만 막내니까. 음, 막내가 둘이면 더 좋지.

‘생각해 보면 조금 안쓰럽기도 하네.’

우리와는 달리 선이한은 자기 의지로 합류하는 게 아니니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썩 괜찮지는 않았다. 조금의 착잡함을 뒤로하고 문을 두드렸다.

끼익.

잠깐의 시간을 두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녕! 선이한 맞지?”

그렇게 묻자 선이한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빛 한 점 담지 않은 듯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서 연한 푸른색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선이한의 등 뒤로 보이는 방 안에는 물건이라고 할 게 별로 없어 보였다. 침대 위의 이불도 흐트러짐 없이 곧게 개어져 있었다. 널찍해 보이는 방에 어쩐지 온기 한 점 없는 것 같았다.

“…맞아요. 선이한.”

선이한이 말간 눈동자에 나를 오롯이 담았다. 그리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설핏 웃었다. 티 하나 없이 부드러운 웃음이었으나, 왠지 조금 지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이한은 짐을 정리하러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하늘이 높았다. 벌써 계절이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니 방금 보았던 선이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억지로 따라간다는 느낌은 아니었지.’

표정을 봤을 때 불편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대의 용사 네 명 중에서, 용사로 ‘선택’되었던 박율 형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 의사로 용사 서약을 했다. 나도 그랬고, 라엔 형님과 송하견 형님도 그랬다.

‘그러면 선이한도 용사 서약을 하는 건가?’

전투에 나서는 쪽은 아닐 것 같은데. 신전에 있는 사람들은 마법을 아예 못 쓴다고 듣기도 했고.

송하견 형님처럼 연구를 하는 쪽인 건가? 송하견 형님은 마법도 쓰고 연구도 했지만, 선이한은 연구만 하는 걸지도 몰랐다.

뭐,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용사 서약에 대한 부분은 박율 형님이 잘 결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형님의 안목을 믿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민주혁.”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파랗게 밝은 하늘 아래 선이한이 서 있었다.

딱딱하고 반듯한 신전 건물을 배경으로 옅게 흔들리는 백색 옷이, 꼭 동떨어진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이곳에 직선뿐이라면 선이한은 곡선 같았다. 연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사람이었으나 어느 것에도 섞이지 않고 눈에 띄었다.

선이한이 입은 옷은 신관복과 비슷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달랐다. 얇은 천은 바람에 하늘거렸고, 몸에 꼭 맞춰 입는 신관복과는 달리 품도 커다랬다. 길고 넓은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선이한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잠깐 멍했던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다.

“갈까?”

평소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 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태양 아래였음에도 걸음을 옮기는 옆모습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선이한이 내내 웃는 표정이었음에도 어쩐지 지쳐 보이는 이유가, 단순히 내 기분 탓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옅은 바람에 하얀 옷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여서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신전으로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나갔다.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가 더 빨랐다. 마차는 신전 바로 앞에 있었다.

선이한과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자 내부가 약하게 덜컹거렸다.

맞은편에 앉아서 흔들리는 마차에 파묻히듯이 기댄 선이한은 아까보다 확연히 창백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조금 발갛게 물들어 있는 뺨이 도드라져 보였다. 오면서 찬바람을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걸어오는 데 몇 분도 안 걸리긴 했지만.’

선이한은 허약해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썩 튼튼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바람이 더 차가운 편이었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선이한. 도착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거야.”

“그렇구나.”

한참 남았으니까 잠이라도 자라는 뜻이었는데. 꽤 피곤해 보이는데도 잘 생각이 없는지, 선이한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뭐, 가는 동안에 설명이라도 해 두면 좋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면서 얘기라도 들어.”

선이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천천히 감았다 뜨는 멍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머무는 거처는 레데오라고 해. 원래 용사가 되면 머무는 곳이라는데, 왜 이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고.”

“레데오…….”

“도착하면 아마 박율 형님은 볼 수 있을 거야. 형님은 20살. 우리 중에서 제일 연장자야.”

“…응. 율이 형이구나….”

“라엔 형님이랑 송하견 형님은 지금 잠깐 나가 있어. 빨라도 내일쯤에야 볼 수 있을걸. 둘 다 18살. 우리보다 한 살 많아.”

“내일쯤…. 그렇구나….”

자기 딴에는 꽤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끝이 묘하게 늘어졌다. 멍한 표정을 보니 알겠다. 진짜 피곤하구나.

“내일….”

선이한이 거의 중얼거리듯이 느리게 다시 한번 대답하며, 손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기다란 소매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흔들렸다.

‘아, 혹시 졸린 게 아니라 속이 안 좋은가?’

선이한이 멀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멀미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멀미를 심하게 하는 라엔 형님은 어쩌다 가끔 마차를 타는 날이면 정말 곧 죽을 것 같다는 낯을 하곤 했다.

“선이한. 혹시 지금 좀 힘들어?”

선이한도 그 정도라면 좀 걱정됐다. 조심스레 물으니 선이한이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눈가가 묘하게 붉어 보였다. 우는 건가 싶어서 순간 긴장했으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이기는 했다.

“멀미라도 하나 싶어서.”

내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문 선이한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아.”

꾹 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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