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할 수 있는 일은 하자
“스승님?”
여느 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스승님에, 내 목소리도 덩달아 떨렸다. 달빛을 등지고 선 얼굴에 새까만 그림자가 져서 무슨 표정인지 볼 수도 없었다.
스승님은 여기 신전에서 나를 신경 써 준 유일한 신관님이셨다. 다른 신관님들은… 음, 다른 신관님들 덕분에 무관심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배웠다.
나는 나중에 절대로 누군가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는 말아야지.
사실 다른 신관님들이 왜 그랬는지 짐작은 됐다.
‘나는 신전에서 유일하게 마나가 있는 사람이니까.’
사람이라면 보통 마나를 몸에 담고 태어나기에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마나 한 톨 없는 채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날 때부터 마나가 담겼던 그 자리만큼만 마나가 채워질 수 있기에, 마나 없이 태어난 사람들은 영영 마법은 꿈도 못 꾼다. 그런 이들은 신전에 들어와 신을 섬긴다.
나도 마나 없이 태어났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신전에 들어와 살았는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몸에 마나가 담기게 되었다.
‘원인도 모른다고 했지.’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몸에 담긴 마나는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법도 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마나가 없다가 생겼기로서니 어떻게 사람을 아예 없는 취급을 할 수 있지?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신전을 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스승님께 말씀드린 적도 두어 번쯤 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스승님이 나를 설득하셨다.
걱정하시는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승님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내가 신전을 나가서 갈 곳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껏 이렇게….
“선이한.”
다시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샛길로 가던 정신이 돌아왔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조금 풀어진 듯 들려서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스승님은 천천히 걸어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한아.”
내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가볍게 머리를 쓸던 손은 스르르 내려와 뺨을 매만졌다. 뜨거운 뺨에 와 닿는 차가운 손이 기분 좋았다.
“한겨울에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도 팔팔하던 녀석이….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때부터 알아봤지. 한참을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단다.”
웃음기 스민 다정한 목소리였음에도 어쩐지 묵직하게 들렸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이해되지 않는 일도 있겠지.”
스승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기도를 드리던 중에 미래를 보았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신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신이 보여 주는 미래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는 안다.
미래를 보면 그 자세한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자칫 섭리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정선까지는 아무런 타격이 없지만, 그 적정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으니까 웬만하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래. 짐작했겠지만 네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몇 없구나.”
잠깐 침묵하던 스승님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주일 후에 너는 이곳을 떠난단다. 너를 데리러 사람이 올 거란다.”
스승님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고 머릿속을 빙 맴돌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훅 다가왔다.
…여기를 떠난다고?
바라 왔던 일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옷소매만 가만히 매만지고 있는데, 내 얼굴을 살피던 스승님이 쓰게 웃었다.
“신전을 나가서 좋으냐, 이한아.”
“……네.”
“그래. 지내는 것이 힘들었겠지. 고생했단다.”
“…아니요. 스승님께서 계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단다. 너를 곁에 두려 했던 것이 내 욕심이었음을 알고 있으니.”
스승님이 내 손을 부드럽게 쥐며 나와 눈을 맞췄다. 스승님의 하얀 옷에 달빛이 연하게 스며들었다.
“네게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스승님이 바쁘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향하는 눈길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더 바라는 것이야말로 내 욕심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았다.
“아니에요. 항상 감사했어요, 스승님.”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톡톡 두드린 스승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지내거라. 너는 잘할 거란다.”
그렇게 말한 스승님은 등을 돌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문 앞까지 훌쩍 걸어갔다. 그러고는 여전히 등 돌린 채로 문가에 멈춰 섰다.
“우리에게는 늘, 신께서 함께하고 계시니.”
끼익, 하고 문이 닫혔다. 사방이 고요했다.
문득 이 어둠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바로 옆의 스탠드를 켰다.
딸깍.
옅은 주황색의 불빛이 어둠을 조금 몰아내었다.
스탠드가 놓인 탁자 위에는 한 뼘 정도 두께의 낡은 책이 올려져 있었다. 스승님이 두고 가신 건가?
책을 들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 무게만 해도 상당했다. 살짝 펼쳐 보니 빼곡하게 박힌 글자가 보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이걸 왜 두고 가신 거지, 생각하는 순간.
<돌발! 퀘스트> ‘미래시’ 수련 진행 중입니다.
진행도 00:00:01 / 144:00:00
눈앞에 파란 퀘스트 창이 떴다.
책 한 번, 퀘스트 창 한 번 번갈아서 보았다. 진행도 왼편의 숫자가 틱, 틱, 한 칸씩 올라갔다.
「진행도 00:00:02 / 144:00:00」
「진행도 00:00:03 / 144:00:00」
이럴 수가.
설마 소요 시간 6일이라는 게, 진짜 144시간인 건 아니겠지?
◇
좋아. 가까스로 진정했다.
사실 안 좋다. 진정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상황이 얼추 정리되긴 했다.
지금 정리된 것이 세 가지 있다. 그저 그런 소식,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이 중에서 어떤 것부터 듣는 것이 현명한가? 나라면 뭐든 상관없으니 일단 빨리 말이나 해 보라고 대답하겠다. 순서대로 빨리 갑시다.
첫 번째, 그저 그런 소식. 내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
스탠드 옆의 거울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섬뜩할 정도로 새까맣던 색깔은 어디로 가고, 거울 속에서 물빛의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앞에 떠다니는 상태 창의 색깔이나, 꿈에서 내게 날아왔던 꽃의 색과 똑 닮아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맑아 보이는 눈동자가 얼추 마음에 들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두 번째, 좋은 소식. 튜토리얼 보상을 확인했다.
상태 창,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꽤 부끄러울 뻔했으나 다행히 생각만 해도 상태 창이 떴다. 동시에 빠밤, 소리와 함께 보상이 나타났다.
「튜토리얼 보상, ‘씩씩한 힐러님!’ 패시브 스킬을 적용합니다.
고통 면역! 아픔을 느끼지 않아요.
불사의 몸! 온전히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할 때까지 생명을 잃지 않아요.」
아무래도 나는 용사님들이 세상을 다 구할 때까지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었다.
세 번째, 나쁜 소식. 144시간은 진짜 144시간이었다.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책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멍하니 글자를 훑기만 해도 시간은 채워졌다.
굳이 그 고생을 하며 미래시를 얻어야만 하는가 싶겠지만, 내 지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자’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일주일 뒤 출발하기 전까지 끝내야 하니까 시간이 생각보다 촉박했다. 씻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무수면 풀코스로, 남은 시간 달립니다.
◇
<돌발! 퀘스트> ‘미래시’ 수련, 성공!
성공 보상으로 ‘미래시’ 초급을 획득하였습니다.
해냈다….
하다 보니 할 만했다.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버틸 만은 했다는 뜻이다.
깜빡깜빡 졸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했지만, 패시브 효과 덕분인지 죽을 것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았다.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침 햇살이 문틈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훅 불어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올렸다. 키가 나보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의 파란 햇살이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진한 갈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그가 말갛게 웃었다.
“안녕! 선이한 맞지?”
어지러운 머리에도 선명하게 들릴 만큼 밝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시원하고 청량한 향기가 잔잔한 바람결에 스며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눈앞이 너무 밝았다. 내게로 향하는 곧은 시선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생경했다.
잠깐 멍하니 있는 사이 조금 곤란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라고 들었는데. 아니야?”
몇 밤을 새웠더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잡고 대답했다.
“…맞아요. 선이한.”
내 대답을 들은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씨익 웃었다. 군더더기 없는 맑은 웃음이었다. 나도 덩달아 표정이 풀어지는 듯했다.
나를 데리러 온 걸 보니 이 사람이 용사 일행 중 한 명이겠지. 용사라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빛나는 걸까.
“말 편하게 해. 나도 너랑 동갑이거든. 민주혁이야.”
“그래.”
민주혁은 방금 만났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내게 편하게 다가왔다. 민주혁이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온다는 얘기는 들었어?”
“응. 나를 데리러 온 거잖아.”
민주혁이 방 안을 슬쩍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맞아. 같이 가려고. 밖에 있을 테니까 천천히 정리하고 나와, 선이한!”
“정리할 건 딱히 없는데…. 금방 나갈게.”
정말이었다. 챙긴 것이 몇 없어서 헐렁한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방을 둘러보았다. 방이 휑했다.
그간 신전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얹혀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개인적인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은 내게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 방에 정이 붙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딱히 미련은 없었다.
끼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찬 공기에 몸이 흠칫 떨렸다. 민주혁은 문 옆의 벽에 기대서 있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민주혁.”
“어, 진짜 금방 나왔네.”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를 바라본 민주혁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떠진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웃던 민주혁의 얼굴이 굳었다.
아닌가? 눈을 깜빡이는 찰나 처음의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갈까?”
아무렇지 않은 민주혁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잘못 본 게 맞는 듯했다. 잠을 못 자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민주혁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떼었다.
마차는 바로 신전 밖에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이 생각보다 길었다.
민주혁은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내게 여러 가지를 말해 줬다. 정확히는 말해 주려고 했다.
이야기를 처음 몇 마디 꺼내다가, 민주혁이 내게 물었다.
“선이한. 혹시 지금 좀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