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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화 (1/150)

001화.

용사 일행의 유일한 힐러

한참을 앓고 일어났더니 몽롱한 시야에 희끄무레한 것이 떠다녔다. 새까만 방 안에서 얇고 네모진 것이 이질적인 푸른색으로 빛났다.

아직 열이 안 내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위에 검정 잉크로 또박또박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세상을 구해 줘! ‘선이한’ 님, 반갑습니다.」

어어…. 내가 선이한은 맞는데…. 이게 뭐지. 꿈인가.

「아주 옛날, 평화로운 세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세상의 균열 속에서 사악한 것들이 하나둘 넘어오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적힌 글자가 변하기도 했다. 내 생각을 읽는 것처럼, 문장을 눈으로 훑자마자 바로 다음 문장이 새롭게 새겨졌다.

「울부짖는 사람들, 서서히 망가져 가는 안온한 일상….」

「아이들은 걷는 법보다 숨죽여 우는 법을 먼저 배우고」

「아침을 맞이하는 닭 우는 소리보다 새벽부터 이어진 장송곡이 더 크게 울려 퍼지는」

「어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음?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가끔 각박하고 팍팍한 세상이어도 저렇게까지 멸망한 폐허 같은 느낌은 아닌데. 오히려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았다.

「엇, 아니라고요? 지금 이 세상은 평화롭다고요?」

…역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게 틀림없다.

「맞아요. 다른 세상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일러요. 이 세상에도 균열이 열리고 있거든요.」

「뭐,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요.」

「이 평화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한 몸 다 바쳐 희생하는, 용사님들이 있으니까요.」

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저쪽만 말하는 모양새에 휘말려서, 나도 모르는 사이 집중해서 글을 읽고 있었다.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지 눈가가 뜨끈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런데도 깜빡깜빡 지워졌다가 새로 새겨지는 문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희생은 정당한가요?」

「글쎄요. 적어도 당연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알게 된 이상, 지금까지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일어나요! 달려가서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어요!」

「당신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요, ‘선이한’ 님.」

「ㅅㅣㅈㅏㄱㅎㅏㄱㅣ?」

“어…?”

마지막으로 뜬 글자는 뭔가 이상했다. 당황해서 목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시, 작…, 하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글자가 깜빡이더니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수락 완료! <기억 불러오기>를 시작합니다.」

아니? 수락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설마 어, 하는 당황의 감탄사도 대답으로 치는 거야?

내 황당함과는 별개로 눈앞이 차츰 흐려졌다. 이게 저 기억 불러오기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내 몸 상태가 원래 안 좋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누가 꽝꽝 쥐어박는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 그 와중에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직후 정신을 잃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 정신을 잃었건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파란 창 위에 까만 글자가 깜빡이며 새로운 문장들을 만들어 냈다.

「칭호를 재설정합니다.」

「시스템을 재시작합니다.」

「세상을 구해 줘! 용사 일행의 유일한 힐러, ‘선이한’ 님. 반갑습니다.」

「페널티를 조절하며 용사 일행을 치유하고, □□□ □에 도달하십시오.」

「세상을 구할 □□은 그곳에 있습니다.」

꿈을 꿨다.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발이 닿는 감각도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지, 내가 숨은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시력을 잃은 걸지도 몰랐다. 혹은 귀가 먹었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락.

그때 어디선가 한 자락 바람이 나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목에서 뚜둑, 소리가 들릴 만큼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저 멀리에 쪼그려 앉은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동그란 뒤통수에 단정하게 자른 흑색 머리칼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바람이 점점 거세져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른 세상에 있는 양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헉…!”

뭔가가 바람에 실려 내 쪽으로 날아오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두 눈을 꾹 감고 팔을 엉성하게 구부려 앞을 막았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얇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손등을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날아온 것이 딱딱한 물건은 아니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열일곱 살이나 먹고 겁쟁이처럼 굴었던 것이 새삼 부끄러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늘색 꽃?’

손등에 닿아 살랑이고 있던 것을 손에 쥐고 멀거니 바라보았다. 투명한 물빛의 꽃이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연한 색깔이 온통 흰 공간 속에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동백꽃처럼 모양 그대로 똑 떨어진 꽃은 시들지도 상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쩐지 익숙한 꽃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저 멀리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가 돌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작은 품에 줄기도 잎도 없는 꽃송이가 소복이 안겨 있었다. 내게로 날아온 그것이었다. 나를 마주 보는 동그란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빛 한 점 없는 섬뜩하도록 검은 눈동자였다. 그 표정 없는 눈을 마주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저런 눈일지도 모르겠네.’

세찬 바람에 몸이 튕겨 나갈 듯이 휘청거렸다. 바람에 얼핏 꽃향기가 스치는 듯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녹아내렸다.

다시,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주 긴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그 아이를 보고 있었다. 흑색 머리칼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이.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상하고 낯설었다. 커다란 건물도, 빠르게 굴러가는 바퀴 달린 것들도, 작은 화면 안의 그림들도, 별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밤도 전부.

그러나 곧 적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타인이면서도 아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것처럼.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놀러 다니고, 사람들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순간의 모든 감정이 느껴졌다.

빠른 속도로 휘리릭 지나가는 기억은 낡은 영화 필름 같기도 했고, 빛바랜 책장 같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웅웅대며 퍼지고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점점 자라 소년이 된 아이의 모습에 나는 깨달았다.

‘닮았어.’

그 소년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휘몰아치듯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해가 지나고, 어느덧 소년은 나보다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순간,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눈앞의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치 빠르게 감기 버튼을 불시에 취소한 것처럼.

소년은 널찍한 강당 안에 곧게 서 있었다. 주위에는 소년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맞추어 자리하고 있었다.

옅은 나무 냄새.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작은 먼지가 허공에서 빛났다.

낮게 깔린 웅성거림 사이로,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삐이, 하는 기계음이 잠깐 지나간 강당은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해져 있었다.

그 적막을 뚫고, 커다란 볼륨에 실린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

파악.

소년이 각모를 벗어 위로 던졌다. 천장에 닿을 듯이 힘차게.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 손을 위로 뻗어 올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수많은 각모가 뒤엉켰다.

이제야 보였다. 다들 검은색의 가운 위로 색색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따가운 박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설렘을 담은 목소리가 공간을 서서히 채워 나갔다.

차오르는 모든 것들이, 온전한 행복이었다.

‘부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어른이란 이런 것일까.

강렬하고 생경한 감정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숨이 벅찰 정도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퍼져 오는 뜨거움.

어른이 되는 순간이 이렇게나 찬란한 거라면, 나도 빨리 성년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아니.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다.

‘…행복해?’

내가 생각만 한 게 아니라 목소리를 직접 냈던가? 잘 모르겠다.

순간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내게로 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귓가에 울리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뚝 끊겼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장면이 멈춰 있었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이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이제 정말 현실이었다.

나는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이마에 미지근한 물수건이 올려 있었다.

누군지는 뻔했다. 이런 일을 해 줄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덕분에 열이 거의 내린 것 같았다.

좋아. 다 좋아.

…사실 안 좋다. 아직도 꿈의 여파가 남아 있는 듯 심장이 쿵쿵 울렸지만, 그 꿈의 의미를 채 생각하기도 전에 들이밀어진 현실이 있었다.

눈앞에 글자가 나를 놀리듯이 깜빡였다.

「튜토리얼, <기억 불러오기> 완료!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은 ‘상태 창’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나는 이게 무엇인지 이제는 알았다. 방금 지나간 꿈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이건, 그러니까,

“…시스템?”

파란 창이 긍정하듯 한 번 물결쳤다.

아하, 맞단 말이지. 이건 게임을 할 때 뜨는 화면과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왜 내 눈앞에….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냈다.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가 게임 속일 리는 없잖아.’

십몇 년을 살아온 내가 그냥 게임 캐릭터라고? 이 세상이 그냥 게임이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추측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인사, 내 몫의 그릇만 없던 식탁, 내미는 손을 못 본 척 외면하던 눈길, 몸도 가눌 수 없는 열 속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택지를 빠르게 지워 버린 채 점점 작아지는 내 숨소리를 그저 듣고 있기만 했던, 사무치게 외로웠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설령 게임 속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일까. 지금 여기에 살아 숨 쉬는 건 나인데. 나에게 이건 현실이다.

<돌발! 퀘스트> ‘미래시’ 수련을 마치세요.

소요 시간: 6일

성공 시: ‘미래시’ 초급 획득

실패 시: ‘미래시’ 초급 획득 실패

…망할 현실.

눈앞에 퀘스트가 뜨는 동시에,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밖은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보름달 아래 선 사람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 사람은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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