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3 회: 귀환 -- >
'파우론이시여. 어찌 이것이 진정 파우론님의 뜻이옵니까?'
독실한 파우론의 신자 지노스 산 에르나스는 절망했다.
파우론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영광이다. 하지만 아군에 의해 포박 당해 포로가 되는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치욕적인 상황이었다.
포박을 끊어내려 했지만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약물에 의해 오러는 전혀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제가 어찌 해야 합니까?'
절망이 지노스의 가슴을 짓뭉갰다.
파우론을 위해 남부에 왔을 뿐이었다. 악마라 추정되는 자들을 뒤쫓았다. 신운성과 서은하. 하지만 두 사람은 보지도 못했다. 대신 남부원정군에 합류해 일을 돕기 시작했다. 성기사로서 신의 군대와 함께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적이 아닌 동료였던 자들이 살고자 자신을 포박해 넘겼다. 성기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죽지 못한 이유는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것이 시련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한 점의 의혹이 지노스의 가슴을 물들이자 갑자기 몸이 저려왔다.
"크윽!"
신앙을 잃은 지노스의 몸에서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크아아아아악!"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다. 생살이 벗겨지고 온 몸이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느낌. 아주 작은 의혹의 대가는 컸다.
신성력이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고통이 일어나자 눈물이 흘렀다.
'왜?'
고통 속에서도 떠오른 것은 오직 의문뿐이었다. 지노스는 작은 의문조차 허락하지 않고 신성력을 거둬가는 파우론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 일었다.
'제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허무한 결말이었다.
몸 안에 신성력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지노스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약물을 복용했을 때 느껴지던 어지러움은 깨끗이 사라졌다. 마나에 반응하는 비싼 물건이기에 함부로 쓰기는 어려운 것의 효과는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영향을 받게 되면 어지러움을 동반한 무기력증을 느끼며 힘을 쓰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젠 멀쩡했다.
약효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은 신성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
마나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몸 안에 한 방울의 신성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지노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작은 눈물방울에 담긴 것은 허무였다.
'이제 끝난 것입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다시 애원했을지도 몰랐다. 참회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제발 다시 받아달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노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허탈해진 지노스는 남부인 앞에 서게 되었다.
"악신 파우론을 부정하라. 그리하면 살려주겠다."
"이 갑옷을 보면 모르나? 난 성기사다."
의욕이 사라진 지노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파우론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키워왔던 무엇인가가 부서지면서 의욕을 잃은 탓이었다.
"성기사였으면 어떤가? 파우론은 널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잡힌 것 아닌가?"
"죽여라."
모든 것을 다 포기한 표정에 질문을 던지던 이는 의문을 가졌다.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과는 너무나 다른 대응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끝까지 싸우기 위해 발악하다 결국 죽었다. 하지만 지노스는 완전히 달랐다. 싸울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특이하군. 죽을 때까지 파우론을 위해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버림 받았는데 더 싸워서 뭘 하겠는가? 귀찮다."
"그럼 그냥 부정하는 건 어떤가? 어차피 버림받았지 않나?"
지노스는 짜증이 났다.
"그냥 죽이래도!"
하지만 남부인은 끈질겼다.
"끌고 가."
지노스는 비싼 약물이 계속 투여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신운성은 마지막 거점까지 점령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급한 불은 다 끈 상태였다. 배는 순조롭게 만들어지고 있었고 약탈도 순조로웠다. 북부 해안을 들쑤시며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니 점점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하고 있었다.
또한 사막 해안에는 징검다리처럼 항구를 지어 지속적으로 물자를 실어 날랐다.
수송선들은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사략선들이 사용할 식량과 식수 그리고 무기를 공급했고 돌아오면서는 약탈품과 사람을 실어왔다.
약탈이 지속되며 루앙은 점점 더 부유해졌다. 연합 수뇌부는 점점 부유해지는 상황에 취해 더더욱 약탈에 열을 올렸다.
반면 신운성은 허가를 받아 해상 유통로를 개발했다. 남부에 자비를 들여 항구를 짓는 대신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연합에서는 자신들의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항구가 생기면 더욱 편리해지기에 허락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항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약탈로 인해 노예들이 계속 유입되니 더욱 쉬웠다.
신운성은 몇 번 직접 약탈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비결은 바로 선박 임대료에 있었다.
사략을 나간 이들은 배 사용료를 내야만 했다. 배 사용료로 루앙에 입항할 때 약탈 품목을일정 비율 신운성에게 지급해야만 했다. 여기서 신운성은 사용료로 노예가 된 북부인들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노동력을 가질 수 있었고 루앙 인근에 땅을 개발해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훗날 땅에서 자란 농작물을 팔게 된다면 신운성의 부는 더욱 크게 늘어날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막대한 부를 쌓아도 신운성은 방심하지 않고 수련에 임했다. 그러던 차에 특이한 보고를 듣게 되었다.
"포로 중에 성기사가 있다고?"
"네, 사실 의향이 없냐고 하던데요."
"성기사는 보통 노예가 안 될 텐데?"
"지노스라는 성기사가 좀 특이해서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공격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
신운성을 호기심을 느꼈다. 성기사가 가진 더 자세한 지식들을 알고 싶어졌다. 해서 신운성은 지노스를 구입했다.
지노스의 첫인상은 '미남자'였다. 수려한 용모에 세상 다 산 허무함이 깃든 표정은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내가 널 샀다."
"그래서?"
첫 대면에서 기를 죽여 보려 했지만 지노스의 반응은 차가웠다. 짜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죽여."
"죽는 걸 원하는 것 같아서 살려야겠다."
지노스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이었다.
이에 신운성은 시험을 위해 한 대 쳤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지노스는 한 바퀴 돌며 털썩 쓰러졌다. 고통 때문에 몸을 비틀거리던 지노스는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라."
지노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이라는 식이었다.
"내가 밉지 않나? 왜 안 덤비지?"
성기사나 사제들은 보통 붙잡히면 분노를 표출했다. 죽을 때까지 저항하며 저주했다. 방심하고 전투력이 약한 사제에게 다가갔다가 목을 뜯겨 죽은 일꾼도 있었다.
하지만 성기사나 사제들은 그냥 죽이지 않았다. 최대한 고문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파우론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 제안한 것은 신운성이었다.
'만약 나중에 남부인들이 마족이 아니라고 공표하고 성전을 중단하면 나만 힘들어진다.'
미약하지만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긴 아니기에 신운성은 연합을 수렁에 밀어넣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성기사와 사제들은 되도록 산채로 잡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처형했다.
파우론이란 존재를 믿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라는 외침이 함께 하면 군중들은 흥분해서 열광했다. 아울러 노예가 된 북부인들은 좀 더 순종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잠시 살려뒀다 죽였다. 하지만 지노스는 너무나 다르기에 노예로 팔렸다. 물론 살려둔 사람은 신운성이 노예를 많이 구입하니 좀 비싸게 팔아볼 요량으로 지노스를 처형하지 않았다.
"미워할 이유가 없다."
'정말 특이한 녀석이다.'
신운성은 흥미를 느꼈다. 지금 당장 죽인다면 스탯 포인트를 벌 수 있지만 조금 더 참기로 했다. 죽이는 것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왜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넌 성기사 아니었나?"
"이젠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파우론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우론님이 날 버리셨다."
"뭐?"
허무했던 지노스의 눈에 슬픔이 스몄다.
"아주 작은 의문. 그것으로 인해 신성력을 모두 잃었다."
"대체 그 의문이 뭔데 신성력을 잃었지?"
"대답해주면 날 죽여줄 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괴롭힐 거다. 그리고 약해지면 다시 치료하고 또 괴롭힐 거다."
"진짜 노예로 만들려는 모양이군."
"죽는 거야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노예로 한 번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웃기지 마라."
지노스는 드러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느꼈던 의문들을 알려주었다.
'정말 편협한 신이군.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도 있는 의문인데.'
약간이나마 의심했단 이유로 신성력이 사라졌으니 허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워할 이유도 없다. 내가 남부인들과 싸운 것은 파우론님의 뜻. 그러나 그 분이 날 버렸으니 미워할 이유도 싸워야 할 이유도 없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지노스는 망가진 인형 같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사정을 알게 된 신운성은 지노스를 더 괴롭히지도 않고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노예지만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하나는 나의 장식품이 되어 개처럼 끌려 다니는 거다."
끌려다니는 것이 싫었던 지노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하나는?"
"성실히 일하는 노예가 되는 거다."
"일하겠다. 내가 할 일이 뭔가?"
"우선 네 몸에 정말 마나가 하나도 없는지 확인부터 해보겠다."
신운성은 지노스의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밀어 넣었다.
"윽!"
지노스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반발은 없군.'
마나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지금부터 넌 짐꾼이다."
"알았다."
"존대를 해라."
"알겠습니다."
지노스는 노예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많이 늦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모두 더위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