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 회: 권력 -- >
노을이 저무는 시각. 한 무리의 배들이 수평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노을을 뒤로 하고 나타난 배들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무나 먼 곳에 있기에 배들을 본 사람은 없었다.
해는 곧 저물었다. 어둠이 세계에 깔리며 바다도 검게 물들었고 배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비트는 금방 잠들지 않았다.
수없이 모여든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어둠 때문에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각에도 불을 밝히고 일했다.
환한 불빛은 어둠에 물든 바다 위에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더 커진 거 같아."
오랜만에 돌아온 아비트를 보며 신운성과 서은하는 감상에 빠졌다. 특히 서은하는 아비트가 무척 반가웠다.
'부부가 된 곳.'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공식적으로 부부로 인정된 장소였다. 그것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곳을 찾은 이유는 약탈이었다. 반갑고 의미 깊은 곳이지만 쓰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약탈하는 것이 신운성의 계획이었다.
'언젠가 다시 멋지게 만들어줄 테니까.'
서은하는 속으로 다짐하며 명령을 내리는 신운성의 뒤를 따랐다.
"타우스. 네가 중요하다. 일단 5명 정도만 데리고 먼저 아비트에 상인으로 잠입해라. 그리고 내부 사정을 알아내."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신운성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쳐들어가봐야 아주 잠깐 혼란을 안겨줄 수 있을 뿐이었다.
'내부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다시 한 번 그 방법을 써먹을 수 있어.'
만약 남쪽의 사정을 모른다면 모두 패잔병인 것처럼 위장해 아비트로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타우스가 루앙에서 했던 것처럼 아비트 또한 혼란에 빠트리고 약탈할 생각이었다. 내부의 사정을 잘 알면 어딜 털어야 할지도 아니 일은 더 쉬워진다.
신운성은 타우스를 아비트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려주고는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다시 아비트에서 멀어졌다.
"아돈이라고?"
"네, 상인입니다."
"통과."
타우스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아비트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똑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이들이기에 경계심은 무척 적었다. 현재 적대하고 있는 세력은 피부색이 다른 남부인이지 북부인이 아닌 까닭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전하고는 정말 수준이 다르군.'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왔을 때 봤던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멀리 새로 지어지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바닷가에는 수없이 많은 조선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혼잡하지만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와중에도 언뜻 보이는 질서정연함에 타우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봐야 다 털릴 거.'
북적거린다는 것은 그만큼 활기가 넘치고 물자가 집중되었다는 뜻이었다. 즉, 약탈을 하게 되면 가져갈 것이 많다는 소리였다.
일단 상인으로 활동하기 위해 관리를 찾아 허가를 받은 뒤 곧바로 음식점으로 향했다.
술잔과 포크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달린 건물 안은 식사를 하는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합석도 괜찮으십니까?"
타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니 구석에 졸고 있는 술주정뱅이의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식사는 기본으로 맥주와 빵, 그리고 돼지고기 구운 것입니다. 지금 제일 빨리 되는 거고 다른 것을 시키시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냥 기본으로."
"5분 전부 다 같습니까?"
고개를 끄덕여주니 점원은 얼른 돌아가 주방에 주문을 전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맥주였다. 잔 위로 수북이 솟은 하얀 거품에 타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점원이 맥주를 다 내려놓고 돌아가자 모두 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거품 사이로 흘러넘치는 황금빛 액체의 쌉쌀함은 목을 시원하게 긁어주며 넘어갔다.
"크아."
맛있는 맥주로 갈증을 푼 다음에는 빵을 집었다. 금방 구워진 넓적한 빵은 쭉쭉 찢어졌다. 빵과 함께 나온 버터를 발라 먹으니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했다. 이어서 나온 것은 구운 돼지고기였다. 바짝 익힌 돼지고기는 부드럽게 쪼개지며 육즙을 흩뿌렸다. 빵과 버터, 그리고 구운 돼지고기를 한 번씩 먹고 맥주 한 모금으로 입안을 다시 깔끔하게 만들면 맛의 향연을 계속 반복할 수 있었다.
먹고 또 먹고.
주문을 세 번 정도 반복한 이후에야 타우스는 식사를 멈췄다.
"거 잘 먹는 구먼."
어느새 깨어난 건지 술주정뱅이가 말을 걸었다.
"맛있는 건 기회가 있을 때 먹어둬야 손해를 덜 보는 법이니까."
"그건 그렇지. 쩝."
술주정뱅이는 타우스가 들고 있는 잔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시고 싶은 거요?"
"주게?"
"멀쩡한 사람 같은데 돈 벌어서 직접 사 마시면 되지 않나?"
"다리가 망가졌어."
술주정뱅이는 뒤틀린 다리를 보여주었다. 테이블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뒤틀린 다리는 꺾여선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구만."
타우스는 맥주를 시켜주었다. 그러자 술주정뱅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마워했다.
"이야, 정말 축복 받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군."
"그런데 상인?"
"그런데?"
"뭘 팔려고? 내가 몸은 이래서 여기서 빌어먹고 지내지만 귀는 멀쩡하다고."
술주정뱅이는 씨익 웃었다. 누런 이빨이 빛을 받아 번질거렸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려주고 얼마나 받으려고?"
"많이는 필요 없고 맥주 한 잔만 더 사주면 되는데."
술주정뱅이는 무리한 요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맥주를 한잔 더 시켜주자 술주정뱅이의 입에서 술술 얘기가 흘러나왔다.
"예전에 들은 얘긴데......."
술주정뱅이는 이런 저런 얘기를 꺼냈다. 상인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들을 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타우스는 그래도 꾹 참고 얘기를 들었다.
"그럼 요새를 만들고 더 큰 배를 만들려고 한다는 건가?"
"그래. 그래서 사방에서 상인들이 장사를 하려고 아비트로 모여들고 있어. 필요한 물건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거지? 남부가 그렇게 무서운 상대인가? 이해가 안 되네."
"예전에 100척을 남쪽으로 보냈는데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전부 다 패해서 수장 됐을 거라고."
"그래서 요새화 하는 건가? 남부의 배들이 공격해올까 봐?"
"그렇지."
"이것 참......."
타우스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술주정뱅이는 그런 타우스의 연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여기 돈 벌려고 왔는데 언제 습격당해 몽땅 잃을지 모른다면 정말 불안할 거야. 하지만 그래서 잘하면 크게 벌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긴 하지. 어쨌든 얘기 잘 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사주는 거니까 맛있게 먹으라고."
타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식과 맥주를 시켜주었다. 술주정뱅이는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맥주잔을 꼭 잡았다.
'배가 돌아오지 못했으니 정보는 없다 이건가? 진짜 좋군.'
타우스는 연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술을 사고 정보를 수집했다. 아비트에서 전쟁에 관련된 정보를 묻는다고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무슨 소릴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비트 중심에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거주하고 있고 귀족들은 각자 주택을 구입해서 거주. 상인들은 대부분 부두에 집중. 바닷가에는 조선소가 계속 증축중.'
타우스는 정보를 최대한 모았다. 남부에 가져가면 크게 인기를 끌 수 있을 품목을 취급하는 상점의 위치와 병력의 위치까지 상세하게 파악했다. 낯선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한다면 수상하게 여기겠지만 아비트에는 낯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인이 시장 조사 차 돌아다닌다고 하면 대부분 그냥 넘어갔다.
조사를 끝마친 타우스는 약속된 장소로 되돌아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그럼 속이기 딱 좋겠군."
신운성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배에 실린 식량과 식수는 조금만 남기고 전부 레던과 사막인들의 배로 옮긴다. 그리고 전투를 한 것처럼 여기 저기 흠집을 내라."
"저는 어떻게 합니까?"
"너는 지금부터 다시 남쪽으로 가서 사막 부근에서 정박하고 기다려라. 딱 3일후 밤에 돌아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레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번에도 활약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공을 세우는 것보다 피해 없이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이득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다. 족장으로 살려면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생각해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던이 소유한 5척의 배는 남쪽으로 떠났다. 이후 신운성의 함대는 조용히 아비트에 들어섰고 이로 인해 아비트는 소란스러워졌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배가 부두에 정박하기 전에 물에 뛰어내려 으쓱한 곳에 몸을 숨겼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서 조금 낯설었지만 모든 것이 전부 바뀌지 않아서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부두에 세워진 창고에 몸을 숨겼다. 문 앞에 서 있던 창고지기들은 요기를 하며 잡담을 하느라 바빴다.
"죽일까?"
"아냐. 지금 죽여 봐야 시끄러워지니까 그냥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자."
신운성은 창고를 살펴보고는 결국 위로 기어 올라갔다. 창고에는 창문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문이라고는 창고지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유일했다.
때문에 창고 위로 기어 올라간 두 사람은 지붕을 이루는 판자를 잘라내 안으로 들어갔다.
"전부 목재인가 본데?"
어두운 창고 안에서 손전등으로 비춰보니 다듬은 나무들뿐이었다.
"그래서 별로 경계를 안했나보다."
커다란 나무 목재들이 쌓여있으니 이런 것을 훔쳐갈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저기 구석으로 하자."
두 사람은 목재 위를 걸어 벽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
"그러게."
서은하는 문득 티몬에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병사들에게 쫓겨 숨어 지내며 탈출할 길을 찾던 시간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상점 음식이나 먹자."
과거를 추억하며 두 사람은 많은 포인트를 주고 피자와 치킨을 사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패스트푸드는 족장들이 대접하던 음식보다 훨씬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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