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 회: 권력 -- >
아침이 오고 술에서 깨어난 전사들은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물을 찾아 마셔도 두통이 금방 가라앉지는 않았다.
"너무 마셨어."
"엄청나긴 하네. 많이 마셨을 텐데."
전사들은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던 신운성을 떠올리곤 미소 지었다.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고 술까지 잘 마시니 더 멋있게 느껴졌다.
"일어나자. 뭐 좀 먹어야지."
구워 먹던 고기는 이미 식은 상황. 술에 취한 상황에서 마른 고기 몇 덩이만 씹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창고에 비축된 식량들을 받아 무엇인가 만들어 먹기 위해 움직이던 유드족 전사들은 한 무리의 전사들이 앉아 식사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뒤에서 누군가 떠드는 소릴 들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하크님이 사실은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들은 건데 갑자기 단기간에 오러 마스터로 성장한 게 이상하다는 거야."
유드족 전사들은 걸음을 멈췄다.
'이 자식들이?'
열기가 순식간에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무작정 화를 내지는 않았다. 화가 나서 뭐라고 하려던 찰나 신운성이 술자리에서 한 말이 거짓말처럼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 저 놈들도 결국 이용당하는 거야. 멍청한 놈들.'
유드족 전사 하나가 식사하는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그거 다 헛소문이야."
"어....... 화내지 마. 그냥 소문이 그렇다는 거야."
전사 하나가 유드족 전사임을 알아보고 사과부터 했다. 어쨌거나 다른 부족에 속한 이를 욕한 꼴이 되었으니 싸움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 화가 나. 그런데 잘 생각해 봐. 재능이 있으면 강해지는 거야 당연한 거야. 그것보다 처음에 악마라면서 떠든 녀석이 누군지 생각해봐."
"그거야 북부군 녀석이었지."
"맞아. 북부군 녀석이었어. 그 놈이 괜히 떠들면서 이간질을 한 건지 어떻게 알아? 진짜 별 것도 아닌 이간질에 엉뚱한 사람 잡지 말라고. 잡놈이 떠든 소리 때문에 남부 전체가 영웅을 의심하면 그거야말로 우스운 꼴 아니겠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급하게 죽인 게 입막음 하려고 한 거라는 소리도 있던데?"
"어휴. 진짜 답답하네. 그거야 당연히 때려죽여야지. 이름도 어디서 처음 들어보는 걸 떠들면서 모함하는데 그럼 그걸 그냥 두고 봐야 하나? 파우론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엄포 놨는데 엉뚱한 소릴 하니 당연히 죽여야지."
식사를 하던 전사들은 의혹이 다 풀리자
'그럼 그렇지!'
하고 떠들며 사과했다. 흔쾌히 사과하며 먹을 것을 권하니 유드족 전사들도 마음을 풀고 식사에 끼어들었다.
이후 신운성에 대한 소문에 대해 떠들면 적의 이간질에 놀아난 얼간이 취급을 당했다.
"이이익!"
엘디아족의 젊은 전사 키란은 밥을 먹다 말고 내팽개쳤다. 새롭게 들린 소문이 자신이 원한 것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적의 이간질이라니!'
아침부터 퍼지기 시작한 소문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받았다. 이후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는 전사들은 신운성을 악마로 의심하는 소문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말하면 멍청이 취급하는데 떠들 이유가 없었다. 반박하고 싶어도 이유가 그럴싸했기에 반박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신운성을 죽어라 모함해야 할 이유가 없는 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키란은 몇몇 전사들이 자신을 바보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소문을 처음 퍼트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키란이 소문의 근원이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신운성에 대해 악담을 하고 다녔기에 적의 이간질에 놀아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자식! 꼭 언젠가는!'
열등감에 휩싸인 키란은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키란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그저 분노를 꾹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루앙의 정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앞으로 사용해야 할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원상복구가 필요했다.
신운성이 내성을 내주자 연합 수뇌부는 재빨리 내성을 차지했다. 부족 연합이라는 특성상 어딘가에 자꾸 돌아다니기보단 어딘가에 안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이로 인해 루앙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연합의 수뇌부가 있으니 이들의 가족과 호종하는 전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투에 참가해 루앙의 권리를 어느 정도 차지한 부족들이 전부 루앙에 거점을 마련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 생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중심이 변한 것이었다.
연합 수뇌부는 성에서 지내고 휘하의 부족민들은 계속 돌아다니며 유목을 하고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성에 거주하는 이들이 일은 안하고 편히 놀고먹으려 한다는 인식이 조금씩 퍼졌다. 하지만 성에 거주하게 된 이들도 할 말은 있었다.
"루앙은 적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곳이다. 그만큼 위험한 곳이다. 우리가 놀고먹으려고 여기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모두 전쟁을 위한 것이다."
확실한 명분이 있으니 대놓고 반항은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연합 수뇌부가 뭉쳐서 명령을 내리는 전사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부족 내부의 일이라면 상관하기 힘들지만 전쟁에 관련된 일에는 모두 함께 나서기 때문에 외부로 일하러 나가는 남부인들이 단합하지 않는 이상 수뇌부의 영향력을 거스를 순 없었다.
'묘하게 돌아가는군.'
신운성은 연합 수뇌부가 내성을 차지한 이후 남부의 권력 형태가 변하는 것을 감지했다.
'국가라도 세울 생각인가?'
하지만 연합 수뇌부에서 국가에 대한 거론 같은 것은 없었다. 때문에 결론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어느 사회에나 계급은 존재하지만 이런 식으로 갈리게 될 줄이야.'
연합의 수뇌부가 그 자체로 하나의 특권층으로 굳어가려는 조짐이 보였다. 전사들은 하나의 공권력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혼란이 올 수 있는 체제였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남부인들의 의식에 많은 변화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땅이 중요하게 된다면 요충지를 계속 확보하는 편이 좋겠지.'
땅에 원래 정해진 주인은 없다. 누군가 '내 땅'이라고 외치며 그것을 끝까지 지켜냈기에 영역으로 인정받을 뿐이다. 힘이 없으면 결국 자신의 땅이 아니게 된다.
신운성은 엄밀히 따지자면 수뇌부가 아니라 전사 계층이었다.
'밑에서 부림당하는 건 사양이다.'
뛰어난 전사의 운명은 두 가지다. 권력자가 되거나 폐인이 되거나. 너무나 뛰어나기에 주변 사람들은 뛰어난 전사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그렇게 되면 계속 위험한 전장을 돌아다니며 싸우게 된다. 그러다 전사로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계속 싸우게 된다.
그게 싫으면 권력을 잡아야만 한다. 권력자가 되어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면 된다.
신운성은 영향력을 기르기 위해 땅을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레던, 다후트. 가서 사막 전사들에게 물어봐라. 여기 루앙의 북쪽에 적당한 거리에 요새를 지을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본 결과 딱 일주일거리에 버려진 곳이 있다고 했다. 물론 걸어서가 아니고 낙타를 타고 일주일이었다.
신운성은 바로 수뇌부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만약을 대비해 사막에 요새를 하나 지어두겠다고 하자 말리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떠나있는 동안 부두의 조선소를 부탁한다."
"걱정마라."
든든한 카딘에게 부탁한 신운성은 사막 전사들을 이끌고 사막으로 향했다.
일주일간의 행군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별로 볼 것 없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 낙타 위에서 하루 종일 버티는 것도 고역이었다. 대화를 하는 것도 지치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여정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정이 계속 이어졌지만 결국 끝이 왔다.
신운성은 버려진 사막 부족의 근거지에 도착했다.
"여긴 왜 사람이 안 살지?"
"얘기로는 전쟁에서 패해서 이 건물에 살던 부족은 멸망했다고 하더라고요."
신운성도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은 공간이 나왔다. 땅 속으로 이어진 통로는 꽤 복잡하고 긴 것이 큰 건물이 사막에 묻힌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빠듯하지만 800명 정도 지낼 수 있겠네요."
"그럼 여기에 500명 정도만 주둔시키는 게 좋겠다."
건물 내부를 확인한 신운성은 밖으로 나와 입구 주변에 성벽을 세울 것을 명했다. 특히 자신이 사막에서 도마뱀인간들과 싸우며 써먹었던 방법들을 막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성벽 중간에 불을 밝힐 수 있게 해두고 몸을 가리고 구멍으로 밖을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야 해."
야간 기습은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이기에 신운성은 성벽을 고집했다. 이후 주변을 둘러보다 멀리 푸른 곳이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저긴 뭐지?"
"저긴 바다입니다."
"바다?"
꽤 먼 곳이었지만 시선 안에 바다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새로운 계획이 뇌리에 떠오른 신운성이었다.
"그럼 저기에도 성벽과 부두를 만든다."
"네?"
"적의 접근을 미리 알아내 루앙에 전해주는 곳으로 쓰기 좋잖아."
레던과 다후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시키는 것은 쉽지만 그걸 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역이었다. 특히 사막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 평소보다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은 신운성은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주었다.
"우선 필요한 건 저기 바닷가에 배로 실어 와서 지으면 될 거야. 그리고 배가 꾸준히 루앙을 오가며 필요한 재료를 내려놓으면 그때 낙타로 가져와서 작업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확실히 편해지겠네요."
"그런데 이 중요한 곳을 누구에게 맡기지? 두 사람 중 누구한테 맡겨야 좋을까?"
순간 레던과 다후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가볍게 던진 한 마디였지만 레던과 다후트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앙숙과 비교를 당했으니 장난으로라도 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제가 적임입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대리해서 맡길 사람을 뽑긴 뽑아야 할 것 같은데. 흐음......."
신운성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너무 쉽게 정해주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다른 한쪽을 잃게 된다.
"바다와 여기는 떨어져 있으니 그냥 두 사람이 사이좋게 나눠서 관리하는 건 어때?"
"그건 싫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곤 서로를 노려보았다.
"싫다면 우선 시험을 해봐야 겠네."
"그게 뭡니까?"
"뭐긴 술래잡기지."
단순한 술래잡기는 아니었다. 사막에서 밤에 하는 술래잡기였다. 술래는 깃발을 지키면 이기는 것이고 나머지는 깃발을 빼앗으면 이기는 방식이었다.
"대체 이걸 하는 이유는 뭡니까?"
"밤에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보는 거야. 일단 내가 시범을 보이지."
밤이 되자 신운성은 레던과 다후트에게 깃발을 지키도록 했다. 무기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맨손 격투만이 허락된 상황. 하지만 아무도 신운성이 깃발을 가져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깃발을 빼앗겨도 주머니에 담긴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빼앗아온다면 무효가 되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싸워보기라도 했으면 오러 마스터에게 못 이기는 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막 전사들은 불을 밝혔을 때 잠시 보인 신운성의 실루엣만 조금 본 것이 다였다. 시간을 들여 불을 끄며 혼란을 야기한 신운성은 언제 가져갔는지도 모르게 깃발을 빼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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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만 자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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