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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96화 (96/109)

< -- 96 회: 권력 -- >

'미친 놈.'

포로들을 일단 모두 배교하게 만든 이후 다시 거처로 돌아온 신운성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데런이 서은하에게 흑심을 품었었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몰랐다. 하지만 악마 운운하면서 성기사에게 자신이 쫓겼다고 하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날 쫓던 성기사가 있었다.'

코벵에서의 일이 기억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이 악마를 잡는다고 하며 남부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으려 했었다.

'어쩌면 그때 날 잡으려고 했는지도 몰라.'

자신이 전쟁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신운성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사실을 아는 인간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 전쟁 중에 북부인이 떠들던 말이었다. 더구나 신운성이란 이름은 남부인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언제나 '하크'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한나.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서은하는 평소처럼 '은하'라고 안 부르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해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우리만 아는 이름이잖아. 둘 만의 비밀 같아서 좋아."

"고마워."

"그럼 앞으로 사람들이 따지면 뭐라고 하지?"

"모르는 척 해. 기가 막힌 척 하면 되는 거야. 적의 말을 믿는 거냐고. 그리고 결정적인 얘기가 나와도 이간질이라고 밀어붙이면 돼. 이 세상에 완벽한 증거는 없으니까."

기껏해야 증인이나 범행 장소에 떨어져 있는 물증이 증거로 이용되는 수준의 문명이었다. 증인들의 신뢰성에 흠집을 내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젠 다르지.'

수많은 전사들을 이끄는 위치에 섰다. 아울러 전쟁 영웅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증인들이 떠들어도 음모라고 몰아붙이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약점은 있었다.

'나의 추락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될 거야.'

앞으로 전쟁이 계속 진행되면서 신운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제거를 하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빌미를 줘선 안 돼.'

신운성은 발 빠르게 사막 전사들을 먼저 찾아갔다.

한편, 남부 전사들 사이에서는 기묘한 움직임이 있었다.

연합의 부족 중 하나인 엘디아족의 젊은 전사를 주축으로 신운성을 험담하는 무리들이 소문을 내고 있었다.

"혹시 그 놈 진짜 악마 아닐까? 어쩌면 우릴 모두 속이고 있는 건지 어떻게 알아?"

"짧은 시간에 그렇게 강해진다는 게 말이나 돼? 처음에는 오러도 쓸 줄 몰랐다며? 그런데 어떻게 오러 마스터를 잡아?"

엘디아족의 젊은 전사 키란은 족장의 아들 중 하나였다.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탐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타인의 성공은 배가 아팠고 신운성은 원수와 같았다.

특히 아름다운 서은하가 항상 붙어 있는 모습은 키란에게 짜증을 안겨 주었다.

'가질 수 없으면 부셔야지.'

삐뚤어진 욕망은 언제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언젠가 다치길, 다리나 팔 하나라도 잃어버리길, 죽어버리길 수도 없이 기원했다. 하지만 신운성은 죽지도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공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뭘 해도 잘 안 되는 키란은 그것이 못 마땅했다.

그렇기에 북부군 포로 중 하나가 신운성을 악마로 지목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

'얼른 소문을 퍼트려야 나중에 써먹기 좋아!'

어차피 세상은 힘 있는 자가 정의였다. 진실이란 직접 목격한 이들은 알아도 제3자는 잘 모르는 법. 결국 힘 있는 자가 우기면 그것이 진실이고 정의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신운성이 강자였지만 키란은 언젠가 신운성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때를 위해 악소문을 좀 더 널리 퍼트릴 필요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소문을 이용해야 명분을 잡기 쉽기 때문이었다.

키란의 노력 덕분에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하지만 유드족과 사막 전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보았다.

"뭐라고? 이 개새끼가!"

유드족의 전사 하나는 검을 빼들고 칼부림을 하려 했다. 중간에 다른 전사가 막지 않았다면 살인이 날 수도 있었다.

키란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적당히 소문을 뿌린 다음 침묵했다. 그리고는 몇몇 사람들이 소문을 떠들다가 유드족이나 사막인들과 싸우게 된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역시. 이제 내가 더 나설 필요는 없겠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감정대립이 생기면 한 쪽에서는 소문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더 진짜인 것처럼 떠들기도 한다.

키란은 키득거리며 곳곳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감상했다.

'빌미를 주지 않으려 했건만.'

악소문이 퍼지게 된 것을 안 신운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크.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헛소문이다."

이젠 상하 관계가 많이 뒤바뀐 관계로 사적인 자리에선 친구처럼 지내게 된 카딘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신운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위로하는 마음은 알지만 위로가 되지 않아서였다.

'나를 좋게 보지 않는 놈들이 움직였다는 증거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

안 그러면 소문이 퍼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이건 일러도 너무 이른데.'

권력을 잡게 되면 반대하는 세력이 생기게 되리란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계획했던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반대 세력이 드러났다고 신운성은 판단했다.

'소문에는 소문으로 대응해야지.'

"카딘. 헛소문이 맞지만 이걸 가지고 날 음해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할까봐 걱정이지."

"누가 그런 짓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특히 거대한 이권이 연관되면 선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 있어."

카딘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족장 보나르. 어느 순간 권력에 집착하더니 서서히 변해갔던 족장의 모습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신운성이 밖으로 나가자 카딘은 뒤를 따랐다.

어슬렁거리며 걷던 신운성이 도착한 곳은 전사들이 술을 마시며 고기를 구워 먹는 곳이었다.

"어? 오셨습니까?"

"그래, 나도 한 모금 달라고."

손을 비비며 전사들 틈에 끼자 전사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건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모두 열심히 싸워준 덕분에 좀 편히 쉬었지. 크으! 좋다."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 양념도 제대로 되지 않은 고기를 뜯는 모습은 무척 소탈해보였다. 전쟁 영웅이라 이젠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치에 올랐지만 신운성이 가까이 다가오니 전사들은 즐거워했다. 신운성이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함께해왔기에 유대감은 남달랐다.

카딘은 신운성을 바라보며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현재 신운성이 하려는 일이 뭔지 알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 선택이 옳은 것일까?'

카딘이 갈등하는 사이에도 신운성은 술을 마시며 흥겹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하나둘 거나하게 취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술이 약한 이들이 먼저 취해 드러눕자 신운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왜 한숨입니까아?"

"그게 말이야. 요즘 걱정 되는 게 있어서."

"엥? 뭐가 걱정입눼까아?"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혀가 점점 꼬이는 상황에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악마라고 소문내는 놈들이 있잖아. 헛소문인데....... 푸후우........."

"내 이눔들을!"

아직 정신만큼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사들이 분노하며 일어났다. 신운성은 그런 전사들을 달랬다.

"소문이 문제가 아니야."

"잉? 그게 왜 문제가 아뉩뉘까?"

"소문이야 날 수도 있는 거지. 문제는 그게 이간질일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보고 걸려들 수도 있으니까."

"아하! 이거 참. 하크님은 마음이 너무 착하시눼요. 헛소리하는 눔들은 혓봐닥을 몽땅! 뽑아야 하는데!"

"그래도 같은 남부인끼리 싸우면 쓰나. 아군인데 그러면 안 돼."

"예이! 알겠습뉘다!"

엄하게 말하니 전사들은 모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운성은 한 동안 더 술을 마시며 전사들이 모조리 쓰러질 때까지 버텼다.

"후우......."

전사들이 모조리 쓰러지자 신운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몸 안의 마나를 이용해 술기운을 모아서 제거했다. 몸 밖으로 술기운이 모조리 밀려나오자 주변에 술 냄새가 확 퍼졌다.

"마스터는 그런 것도 되는구나."

"그래. 이런 것도 가능하지."

몸 안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알려진 마스터가 술기운에 취해서 쓰러지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취하지도 않는 것이 오러 마스터였다.

카딘은 더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 침묵 속에 계속 응시하는 시선에는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입 밖에 내면 되돌릴 수 없는 말들이 많아 갈등하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신운성은 그런 카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전사들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불편한 거지?"

카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아. 이런 내가 위험해 보인다는 거.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할 수도 없어."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다 당하게 되면 과연 나 하나로 끝날까?"

아니었다. 신운성 하나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명분 싸움이 된다면 신운성 하나만 잡고 끝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희생될 수 있어. 그렇다면 좀 더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어? 유드족이 나 때문에 망하는 것은 볼 수 없어."

"정말....... 유드족을 위해서냐?"

"그것만은 아니야."

"그럼?"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해서지. 나와 내 가족들이 유드족이고 사막인이고 남부인이니까."

카딘은 신운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권력을 원하든 뭘 하든 막지 않겠다. 너와 난 이제 형제니까. 대신."

"대신?"

"가족을 버리지 마라."

"그럴 일은 없어."

"그럼 됐다."

카딘은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갔다. 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기에 아무리 말로 다짐을 받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지켜보면 알 일이었다.

'페르나를 어찌 대하는지 보면 알겠지.'

신운성은 카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딘이 아니어도 페르나는 사랑스러웠다. 서은하가 없었다면 페르나에게 푹 빠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카딘이 나가고 나자 신운성은 서은하를 찾아갔다. 페르나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루앙에는 없으니 잘해줄 순 없었다.

"일은 잘 풀렸어?"

"그래, 카딘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문제는 없을 것 같아."

"페르나에게 더 잘해줘야겠네."

"부탁해."

"그럼 오늘은 오빠가 날 즐겁게 해줘."

뜨거운 밤이 시작되고 신운성은 밤새 머슴처럼 일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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