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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90화 (90/109)

< -- 90 회: 혈전 -- >

전령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따라 달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가가 보였다. 멀리 배들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여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하지?'

배가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적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시선 안에 두는 것 뿐.

"지금 사실을 다른 곳에 알렸나?"

"아닙니다."

합류한 정찰대와 전령에게 이번 일에 대한 것을 함구하도록 명했다.

'이 일로 포위를 푼다면 타격이 크다.'

신운성은 머리가 아팠다. 루앙을 함락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적이 후방으로 배를 보내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아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포위작전은 모두 허사로 돌아갈 상황.

모든 것은 자신의 밑에 있는 부대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했다.

'미치겠군.'

불리한 요소가 늘어나니 신운성은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어쨌거나 싸워야만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다. 배는 유유히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에 신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적들이 빨리 상륙하는 것뿐이었다.

해안선에 한 무리의 기마병이 계속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배들의 정체는 바로 타우스와 동료들이었다. 루앙을 떠나 천천히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신운성의 부대에 포착된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남부인들 같은데."

"우릴 죽이려 할 거야.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동료들은 멀리 도망치자고 말하고 있었으나 타우스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옆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저게 정말 태풍이 온다는 징조냐?"

"맞아. 태풍이 오면 배 같은 건 그냥 뒤집혀."

태풍이 무엇인지 몰라도 타우스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배를 대자. 태풍이 온다고 한다. 배에 있다가 다 뒤집어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 저들과 협상을 하자."

"하지만!"

"싫은 놈들은 그냥 계속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돼."

타우스는 강경한 뜻을 밝혔다. 이에 동료들은 서로 토론을 벌이다 결국 타우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이 타우스였으니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검은 먹구름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시간, 타우스와 동료들은 상륙을 결심했다.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전원 전투 준비!"

배가 다가오자 신운성은 주먹을 질끈 쥐었다.

'됐다!'

다소 희생이 따를 수는 있으나 여기서 적을 물리친다면 위험 요소 하나는 확실히 제거할 수 있었다.

25척의 배는 무작정 뭍을 향해 돌진했다. 이를 본 신운성은 의아해졌다.

"저러면 배를 못 쓰게 되지 않나?"

"잘못하면 그렇게 되죠. 부두도 없는데 어디 걸리면 움직이기도 힘들고 암초에라도 걸리면 침몰하죠."

"누군지 몰라도 과격하군."

배를 다시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지휘관 같아 보였다.

운이 좋은지 꽤 가까운 곳까지 배는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배들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멈췄다. 그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배에 탄 사람들 중 일부가 내려 다가오는 모습에 신운성은 의아해졌다.

"저건 뭐하자는 걸까?"

물 밖으로 나온 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상태였다. 손에 무기를 쥐지 않고 서있기만 하니 적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죽여 버릴까요?"

"잠깐. 얘기라도 해보자고."

레던에 질문에 고개를 내저은 신운성은 전사들을 이끌고 다가갔다.

"살려주십시오. 우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맨 앞에 선 이가 목적을 밝혔다.

"거짓말! 이놈들은 거짓말 하는 겁니다! 배까지 저렇게 끌고 와서 싸울 생각이 없다니!"

레던이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불안한 분위기를 조장하자 말을 하던 남자가 변명했다.

"아닙니다. 우린 탈영병입니다."

"탈영?"

"그렇습니다. 아비트에서 왔는데 싸우기 싫어서 탈영했습니다."

남자의 말에 신운성은 지그시 눈을 바라보았다.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불안한 빛도 없었다.

"이름이 뭐지?"

"타우스라고 합니다."

"그래, 타우스. 어떻게 탈영했는지 얘기해봐."

타우스는 코벵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더불어 배에 탄 사람들은 절대 자의로 병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렇지만 너희들을 어떻게 믿지?"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습니까? 신이라도 부정할까요?"

"그래, 부정해라. 악신을 부정한다면 조금이라도 믿음이 생길지도 모르지."

"나 타우스는 악신 파우론을 부정합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선언이었다. 타우스가 파우론을 부정하자 그의 동료들도 서슴지 않고 파우론을 부정했다. 비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라 마치 세상이 이들의 배신에 분노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됐습니까?"

"그래, 네가 했던 말은 믿기로 하지."

"그럼 이제 그쪽이 믿음을 주실 차례입니다. 우릴 공격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지?"

신운성의 반문에 타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싸우게 될 테니까요."

타우스의 눈에 광기가 맴돌았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어차피 내버려둬도 너희들은 죽을 운명이다. 북부인이 남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결정한 순간 남부인들도 북부인을 보면 무작정 죽이려 할 테니까."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이죠. 어차피 늙으면 다 죽지 않습니까?"

"그래.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운성은 고민했다.

'살릴까? 죽일까?'

배에서 내려온 것은 소수이기에 죽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배에 있는 이들을 죽이려면 배까지 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전혀 없으란 법은 없었다.

"제안 하나 하지."

"뭡니까?"

"내 부하가 되어라."

"네?"

"부하가 되면 죽이지 않겠다. 노예로 삼지도 않겠다. 공을 세우면 보상을 해주겠다."

고민하던 와중에 스쳐지나간 생각 하나가 제안을 하도록 만들었다.

파격적인 제안에 전사들은 물론 타우스도 놀랐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무슨 꿍꿍이입니까?"

"신뢰를 쌓아야 하니 말해주고 싶지 않지만 알려주지. 그전에......."

신운성은 전사들을 멀리 물렸다. 곁에 남은 것은 레던과 다우트, 그리고 서은하 뿐이었다.

이젠 타우스와 동료들의 수가 더 많아서 숫자만 본다면 기습을 해서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타우스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널 이용할 생각이다."

"네?"

"우린 루앙을 함락시킬 생각이다. 루앙을 함락시키고 다시 코벵으로 진출한 뒤 아비트까지 칠 것이다."

"그래서요?"

타우스는 자신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얘기에 삐딱하게 되물었다.

"루앙 함락을 네가 도와줘야겠다."

"제가요? 우린 300명밖에 안 됩니다."

"방법은 이미 네가 알려주었다. 저 배를 이용하면 가능하지."

"그럼 배만 가져가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니지. 적의 방심을 이끌어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까. 네가 해줘야 한다."

위험한 일이었다. 잠깐 속이는 것과 점령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칫하다간 기사한테 걸려서 죽습니다. 싫은데요."

"알았다. 싫다면 할 수 없지. 너와 네 동료들은 전부 배를 남겨두고 떠나라."

"정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내가 보내준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받아줄 거란 착각은 하지 마라. 소문이 나면 북부인을 싫어하는 이들이 너희들을 사냥하기 위해 나설 테니까."

타우스는 피식 웃었다.

'더 이상 튕기는 건 무리겠군.'

끝까지 버티며 좀 더 좋은 조건을 이끌어 내려 했지만 신운성은 만만치 않았다. 타우스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신운성이 제안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최악의 경우 노예가 될 각오까지 했다. 물론 노예가 되었다고 순순히 계속 노예로 살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보아 주인 행세하는 자들을 죽이고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예가 아닌 전사라면 해 볼만 하지.'

위험한 일이란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노예보다는 그래도 전사 대접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 신운성을 마주하고 있으면 믿음이 생겼다.

'저 사람은 정말 북쪽까지 쳐들어 갈 거야.'

알 수 없는 믿음이었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신운성이 북부로 진출해 귀족들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았다.

문득 타우스의 뇌리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귀족들이 떠올랐다.

'그 놈들을 죽일 수 있다면!'

신운성과 함께한다면 복수가 가능할 수도 있겠단 희망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좋습니다. 대신 정말 부하 맞는 거죠? 노예 같은 거니 뭐니 그런 식으로 대우하면 떠날 겁니다."

물론 곱게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얼마나 심한 짓을 할 건지 말해 상대가 경계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네가 공을 세운다면 네 충성을 받아주지.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전사의 가족 중 한 명과 혈연을 맺어야 할 거다."

"혈연? 결혼도 시켜주는 겁니까? 그거 좋죠! 하하하하!"

타우스가 호탕하게 웃자 타우스의 동료들도 함께 웃었다.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니 안심했다.

"그럼 일단 배부터 접수해야겠군."

"잠시만요. 제 동료가 태풍이 온다고 했으니 배에 타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태풍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자 하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친 파도가 넘실거리자 배가 뒤흔들렸다. 배가 출렁이는 모습은 조금만 밀면 넘어갈 것 같아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신운성은 이를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배를 잃게 되면 루앙을 공략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신운성은 잠들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어둠에 물든 바라를 계속 바라보았다.

아침에도 계속 불던 비바람은 낮이 되면서 서서히 줄어들더니 저녁때가 가까워지자 멈췄다.

"됐다!"

배가 하나도 뒤집어지지 않을 것을 본 신운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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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토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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