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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89화 (89/109)

< -- 89 회: 혈전 -- >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대군. 한가하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여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길고 긴 행군이 지겨워 하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육포를 씹으며 무료함을 달래는 사람도 있었다.

대규모 전투를 앞둔 군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의 요새에서 전령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정찰만은 쉬지 않았다. 정찰을 갔던 기마병들이 돌아와 하는 보고에 사람들은 서서히 긴장했다.

"이동하느라 무리했으니 오늘은 여기서 쉰다. 반나절 거리가 약간 넘게 남았으니 무리할 것 없다."

총 지휘관의 말에 모든 전사들은 야영준비를 했다. 몰고 왔던 가축을 도축한 뒤 고기를 삶아 나눠먹고 약간의 술로 전투 직전에 마지막으로 피로를 씻어내며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신운성도 자신과 함께 하는 이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내일부턴 누군가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불길한 말에 신운성을 바라보는 전사들의 눈빛은 떨떠름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몫까지 신나게 살 게 될 거다."

떨떠름한 눈빛은 더욱 떨떠름해졌다.

"그러니 죽지 마라. 마시자!"

"그렇죠! 죽는 놈만 손해죠!"

"꼭 살아서 다시 보자고!"

마지막 말에 호응해주는 레던과 다후트 덕분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사막 전사들과 카딘을 비롯한 유드족 전사들은 일제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누군가 불 앞에서 춤을 추자 흥에 겨운 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유쾌한 시간.

전사들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신나게 춤을 추었다. 죽음을 앞두고 마냥 긴장만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어차피 누군가 죽게 된다면 죽기 전에 신나게 한 번 놀아보는 것도 좋을 터. 전사들의 춤은 흥겹게 이어졌다.

피가 끓고 땀이 나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쉴 때 밀려오는 나른함은 즐거웠다는 여운을 잠들 때까지 이어주었다.

적의 야습은 없었다. 반나절 걸리는 거리를 넘어서 야습을 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본대는 쉬고 있었다고 하지만 정찰대는 날이 저물 때까지 감시하며 쉬지 않았기 때문에 야습의 걱정은 별로 없었다.

새벽부터 움직인 본대는 해가 지기 전에 요새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꺼번에 덤빈다면 순식간에 요새를 점령할 수도 있을 규모의 대군이었다.

"으으, 방어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요새를 에워싸니 북부군은 나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요새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공격은 없었다.

이를 두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의문은 다음날 풀렸다.

대다수의 병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남부군이 모든 요새를 한꺼번에 공략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요새를 아직도 포위하는 남겨진 병력도 상당했다.

남부군은 지속적으로 움직였다. 정찰대는 몇 번 정도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언제나 승리했다. 요새에 틀어박힌 군대를 상대하는 것에는 취약하지만 말을 타고 싸우는 일에는 천부적인 남부인들이었다.

워낙 대규모의 병력 이동이었기에 북부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북부군은 거점에 많은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물자가 있기에 당황을 떨쳐내고 거점에 틀어박혔다. 개간한 땅이 엉망이 되는 것이 보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러한 소식은 그란에게도 전해졌다.

"드디어 오는군."

코벵을 함락했으니 남부군이 맹공을 펼쳐올 거라 예상한 그란이었다. 이에 대비해 물자 비축에 더욱 신경 써왔기에 1년 정도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는 좋지 않았다.

"배는 완성 되었나?"

"2주 정도면 완성 됩니다."

"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완벽하게 하라고 해."

그란은 재촉하지 않았다. 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사정을 알기에 그란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두르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만든 것은 어딘가 잘못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상황을 아는 장인들은 그란이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밤을 세워가며 배를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북부의 전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 배가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배들이 오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래, 아비트에서도 이상을 파악하고 지원을 보낸 것이 틀림없어!'

그란의 표정은 여유로워졌다.

'이젠 적의 공격을 받아내며 계속 지원군을 받아 한꺼번에 반격하면.......'

단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영역 확대를 가속화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미소는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일그러졌다.

코벵에서 사고를 친 타우스는 배를 몰아 남하했다.

"루앙이 저긴가 보다."

"어떻게 할까? 공격할까?"

타우스의 동료들은 걱정했다. 이대로 계속 배에만 머물게 되면 언젠가 굶어죽기 딱 좋았다. 식량과 식수에는 아직 여유분이 있었다. 배에 보급 물자를 잔뜩 실은 뒤에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배를 몰았기 때문에 25척의 배를 몰 수 있었다.

"그냥 가긴 그렇지. 저 놈들이 우릴 뒤따라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공격할 방법이 없잖아. 저쪽엔 기사도 있을 텐데."

"부두의 배들만 불 지르고 도망치자."

"잘 될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타우스의 장담에 동료들은 결국 따르기로 결정했다. 어찌 되었건 타우스가 제안한 방법이 지금까지는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배가 들어오자 부두의 일꾼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타우스와 몇몇은 배에 있던 귀족들의 옷을 입고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마중 나온 이들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병력이 무척 적은 것 같은데."

수송선이 아닌 전선이 왔는데 병력이 무척 적은 것을 본 기사 하나가 의아해했다.

"코벵이 못 쓰게 돼서 그렇소. 지금 코벵에 70척의 배가 묶여 있소. 우린 다시 보급품을 싣고 가봐야 하오. 얼른 물과 식량, 그리고 배를 내주시오."

"그게 정말입니까?"

얘기를 들은 기사들은 타우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에 타우스가 열을 내며 일을 서두르니 물어볼 틈도 없었다.

아군의 옷을 입고 아군의 위험을 말하는 상황이라 상대가 '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보급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쓸 만한 배가 있었다면 수송에 참여했겠지만 배가 없어 직접 만드는 상황이었다. 물고기를 잡는 작은 어선 정도가 고작이었다.

밤이 되고 나서야 보급은 끝이 났다. 이제 아침이 오면 바로 떠날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타우스와 동료들은 조용히 식사를 마친 뒤에 휴식을 취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각이 되자 타우스는 움직였다. 보급을 받으며 살펴보았던 부두에 다른 배는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진 조선소가 눈에 가시였다.

"조선소 사람들만 죽이고 불 지르자."

타우스에게 자세한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북부인들과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남부에 정착할 생각이었다.

'300명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피부색 때문에 배척 받을 수 있음을 알지만 어떻게든 숨어 지내며 기회를 본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귀족들에게 반항하며 산적으로 살아왔기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타우스였다.

조용히 조선소에 들어선 이들은 안에서 자고 있던 조선 장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부두의 경비들의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감각했다. 하지만 조선소의 사람들이 다 죽고 불이 나자 이상을 깨달았다.

"불이다!"

"조선소다!"

비상이 걸리며 일단의 병력들이 불을 끄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이미 빠져나와 있던 타우스와 동료들은 배로 향하다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마주쳤다. 병사들은 불을 끄기 위해 물통을 들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한 병사의 질문에 타우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적이 배를 노릴지도 모르니 우린 먼저 출항하겠다! 그렇게 알려!"

"알겠습니다!"

다급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타우스와 동료들은 출항해 남쪽으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그란은 남부인들이 몰래 숨어 들어와 일을 벌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타우스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북부군의 요충지를 하나씩 포위하며 나아가던 남부군은 어느 덧 루앙을 앞둔 상태였다. 며칠만 더 가면 루앙이 나오는 지점에서 신운성의 부대는 휴식을 취했다.

'어떻게 할까?'

루앙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떠나올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야 공략 준비를 하는데 정보가 없으니 답답했다.

희생이 많은 전투가 되리란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루앙이 가까워질수록 전사들의 분위기는 날카로워졌다.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전사들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사고를 줄이기 위해 술을 금지시킨 대신에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풀었다.

'우선 야습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겠지.'

상대가 야습을 이용해 요새를 재탈환했던 일을 떠올린 신운성은 한 가지 걱정이 스쳤다.

'오러 마스터가 많으면 어떻게 하지?'

2명까지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서은하가 함께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3명만 되어도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길 기대해야 하나?'

안타깝게도 신운성과 함께하는 부대에는 오러 마스터가 더 없었다. 다른 거점에 오러 마스터가 있을 것을 대비해 최소 한 명씩 포위한 부대와 함께 해야 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최대 3주 정도.'

어림짐작으로 제한 시간을 설정했다. 적의 움직임을 한 눈에 볼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짐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운성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무엇인가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정찰대가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남쪽으로 향하는 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뭐?"

루앙에서 배가 나왔다는 사실에 신운성은 경악했다.

'설마 후방을 노리고?'

소수라고 해도 북부군이 후방에 내려 혼란을 일으키면 문제였다. 남부군은 거의 대부분의 명령을 이번 전투에 투입한 상황이었기에 후방 방어는 매우 취약했다. 만약 부족민들이 공격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포위를 풀고 물러날 부족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병력 이동은 멈춘다! 기마병을 준비시켜! 어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지자 전사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후방을 털리게 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집결 완료했습니다!"

"준비 됐으면 가자!"

기마병들의 선두에 선 신운성은 이를 악물고 말을 달렸다.

해가 저물어 달빛만이 이들이 달리는 길을 아주 살짝 비춰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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