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 회: 혈전 -- >
타우스는 범죄자였다. 죄목은 귀족 모독, 살인, 방화, 반란. 귀족에게 반항하는 자로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남부로 보낼 병사가 더 필요하다는 말에 사형 당해야 할 죄수는 병사로 둔갑했다. 죽다 살게 된 타우스는 기회를 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이딴 전쟁에서 싸울까보냐!'
타우스는 귀족들을 혐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높은 세금을 먹여 항상 먹을 것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가 길을 잠시 막았다는 이유로 때려 죽였다.
하지만 타우스는 안다. 길을 막았다는 이유도 그냥 핑계라는 것을.
지나가다 짜증난다고 아무데나 화풀이 했는데 그 존재가 타우스의 아버지였을 뿐이었다.
이를 고스란히 본 타우스는 귀족에 대한 증오를 품었다.
그래서 산적이 되었지만 결국 오래 가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물이 없어? 이 새끼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반항심이 강했던 타우스는 배급에 불만을 품었다. 억지로 싸우는 것도 화가 나는데 배급도 형편없어졌다.
"이봐, 물이 없다는데 저 놈들은 왜 저렇게 쌩쌩해?"
그늘에 앉아 쉬는 귀족들을 보며 타우스는 불평했다. 그러자 타우스와 친하게 지내던 병사들이 욕을 하며 동조했다.
"저 새끼들이 배급 받을 리가 없잖아. 젠장. 딱딱한 빵을 물도 없이 먹으라고 주냐? 이빨 빠지겠네."
"빵 먹게 물 좀 달라고 했더니 바닷물에 불려 먹으래. 개자식들."
불만이 폭주했다. 불만을 떠들다 발각되면 매질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불만은 더욱 거세졌다.
"어차피 싸우다 죽을 거 차라리 저 새끼들 죽이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 보아하니 이거 우리한테는 물도 안 줄 거 같은데."
몇 모금 되지도 않는 물을 가지고 며칠을 버티다보니 병사들은 상황이 극도로 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밥은 못 먹어도 좀 버틸 수 있지만 물 없이 오래 버틸 수는 없다. 더구나 여긴 선선한 곳도 아닌 사막지대였다. 바닷가라고 해도 뜨거운 태양이 어디 가진 않는다.
"그래, 씨발. 죽어도 저 새끼들은 죽이고 죽자."
힘이 더 떨어지기 전에 일부 병사들은 싸우자며 동조했다.
밤이 오고 모두가 잠잘 시간에 일단의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약 3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조용히 조를 짜서 사방으로 퍼졌다.
"자는 놈들 목을 쑤시는 거야. 내가 소리칠 테니까 동시에 한다."
폭동의 주모자는 타우스였다. 단검을 손에 쥔 타우스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었어.'
모욕적인 언동과 경멸어린 시선을 하고 있던 이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그것은 부하가 아닌 가축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니지, 가축도 아냐. 벌레지.'
자신을 벌레 취급 하던 놈들을 벌레처럼 죽이고 싶은 살심은 타우스에게 힘을 안겨주었다.
타우스 일행이 지휘관의 숙소 근처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누구하나 막지 않았다. 아군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휘관 숙소에는 경비도 없었다. 코벵이 텅 빈 사실을 알고 외곽에만 보초를 세우고 안쪽은 무방비 상태로 놔두었다. 물 배급 문제로 힘든 상황에서 일을 많이 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숙소는 거의 파괴가 되어 볼품 없었다. 철저한 파괴가 이뤄져 겨우 벽이 남은 정도였다. 천장도 없는 건물은 바람이나 겨우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모두 잠든 상황이었다. 타우스는 램프의 불빛에 의지해 지휘관의 얼굴을 확인했다.
"죽여어어어어어어어어!"
지휘관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으며 타우스가 외쳤다. 원한이 서린 외침은 사막의 밤하늘에 길게 울려 퍼졌다.
수많은 귀족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운이 좋은 귀족은 살아남아 발악했지만 여럿이 대기하던 병사들의 손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벌레에게 벌레처럼 죽는 기분이 어떠냐?"
타우스는 생명이 꺼져가는 지휘관을 보며 침을 뱉었다.
"빨리 가자!"
동료가 몸을 흔들자 타우스는 고개를 돌리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적이다! 암살자들이 들어왔다! 모두 일어나 경계하라!"
타우스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이 마구 외치고 다니니 사정을 잘 모르던 이들은 당황해서 무기를 챙겨들고 코벵을 뒤지거나 바깥쪽에 경계를 선 이들을 지원 나갔다.
지휘관들이 살아 있었다면 혼란을 수습할 수도 있었겠지만 명령을 내릴 이들은 모두 죽은 상황. 때문에 타우스를 비롯한 병사들이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가자!"
코벵이 혼란스러워지자 일을 저지른 이들은 얼른 물과 식량을 배에 실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밤이었지만 불을 밝히고 있던 상황이라 배를 출항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부두가 파괴되어 작은 뗏목을 이용해야 했지만 배까지 물건을 싣고 가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거기 뭐하는 거야?"
"명령이 내려졌다. 적이 물과 식량을 건드리기 전에 배에 실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뭐? 확실해?"
"그래!"
타우스의 확신에 찬 말에 의문을 표했던 병사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지원할 병사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타우스 일행은 이미 배를 몰고 나간 상황이었다.
남겨진 병사들은 물과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다 전원 사망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신운성이 가장 함락하기 어려운 곳인 루앙을 맡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거 들었어? 하크가 루앙을 친데."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그건 그렇고 요즘 유드족 콧대가 다시 높아졌다는데 이거 그냥 두고 보긴 그렇지 않나?"
"그건 그래. 전쟁이 끝나면 유드족 위주로 연합이 돌아가는 거 아닌지 걱정이야."
소문의 주인공인 신운성은 여전히 호의를 이끌어냈지만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는 우려를 안겨주기도 했다. 특히 신운성과 혈연을 맺지 못한 남부 부족들은 위기감을 표출했다.
날이 갈수록 뻣뻣해지는 보나르의 행태는 신운성의 소문과 함께 빠르게 퍼졌다.
"우리 부족 전사들은 모두 겁쟁이인가? 에이."
"그런 말 할 거면 네가 루앙 점령에 지원하던가."
"에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가봐야 방해만 될 텐데."
전쟁 준비가 빠르게 이뤄지는 동안 퍼지는 소문은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여러 부족의 수뇌부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크가 루앙을 점령했는데 이걸 그냥 보나르에게 넘긴다면.......'
신운성이 이미 점령했던 요새의 권리를 보나르에게 넘긴 일이 있기 때문에 루앙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루앙은 크게 될 거점이다. 그냥 넘겨선 안 돼.'
훗날 코벵이 복원되면 다시 북부로 이어지는 요충지가 될 터였다. 여기를 고스란히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부족의 영향력이 더욱 커진다는 소리였다.
'우리도 루앙 점령에 함께 해야 한다.'
신운성은 벌써 15번이나 손님을 맞이했다. 모두 루앙 점령에 지원하겠다는 타부족의 족장 아들들이었다.
"효과가 생각보다 좋네?"
"그렇지?"
신운성은 빙긋 웃었다. 현재 퍼지고 있는 소문의 근원지는 바로 신운성이었다. 신운성이 아미야를 통해 호안바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호안바트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잠잠한 호수에 돌 하나 던진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의외로 파장이 컸다.
덕분에 신운성은 타부족의 아들들과 전사들을 휘하에 거두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노리는 사람들은 아직 안 걸렸어."
"그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신운성은 자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다음 손님을 맞이했다. 16번째 손님은 선물까지 들고 왔다.
찾아온 사람은 신운성과 함께 아비트를 떠나온 마르시드였다.
보나르의 거처.
"하크의 집에 또 다른 부족에서 찾아갔다고?"
"네. 이거 월권 아닙니까? 경고해야 합니다."
보나르의 아들은 격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보나르는 그런 아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멍청한 녀석! 그들이 찾아간 이유가 함께 싸우자고 간 것인데 그걸 가지고 경고한다고?"
함께 싸우자고 찾아온 이들을 맞이한 것 가지고 족장의 이름으로 경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족장의 속 좁음을 모두 비웃게 될 뿐이었다. 권력자가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따르려는 사람이 줄어드니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녀석이 만약 딴 마음을 먹게 되면!"
"그만!"
보나르는 카딘과의 혈연을 믿었다. 하지만 신운성이 급격히 성장하니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 밑에 둬야하는데.'
문제는 신운성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을 두고 꽁꽁 묶으려고 했는데 틀어진 상황이었다.
사냥감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너무나 크고 강해서 보나르가 준비한 혈연이라는 거미줄로는 묶기가 부족했다.
'잘못하면 부족 전사들이 모두 그 놈에게 붙을 수 있다.'
생각에 잠긴 보나르는 턱을 쓰다듬었다. 나이와 함께 생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지혜를 짜내는 중이었다. 그때 보나르의 작은 아들이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마르시드가 하크를 찾아갔습니다!"
"뭐?"
"마르시드가 남은 재산을 모두 하크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전쟁 자금으로요!"
마르시드는 상인이었다. 다시 부족에 복귀 할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의 절반을 내주고도 상당히 많은 부를 유지했던 부유한 상인이었다.
"하크와 관계가 돈독하니까 그런 거겠지."
큰아들의 말에 보나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이 너무 단순해.'
자신의 후계자로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보나르는 마르시드라는 변수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조용히 돈만 벌더니 갑자기 관계를 맺어?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땐 안 주더니.'
괘씸하기도 했지만 의혹이 생겼다.
'혹시 루앙에 대한 권리를 약속 받은 건 아닐까?'
가능한 얘기였다. 상인이라 직접 전사를 데리고 전투에 뛰어들진 못해도 자금과 물자를 대주고 보상을 약속 받을 순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군.'
보나르는 작은 아들에게 명령했다.
"넌 어서 하크에게 가서 루앙 점령에 참전하겠다고 뜻을 밝혀라."
"제가요?"
"그래. 그리고 엉뚱한 녀석들이 루앙에 손대지 못하도록 막아라."
"알겠습니다."
이때 보나르의 큰아들이 끼어들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가서 제가 확실히 매듭을 짓도록 하죠."
보나르는 과격한 큰아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허락했다.
'그래, 하나보다는 둘이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두 아들은 서둘러 신운성을 찾아가 참전 의사를 밝혔다.
노리던 이들을 낚은 신운성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