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 회: 혈전 -- >
뜨거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피곤할 법도 하지만 신운성의 여자들은 모두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만 집을 나선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막이 아닌 남부의 공기가 인사해온다. 뜨겁지 않은 선선한 아침 공기가 폐를 상쾌하게 일깨운다.
'좋다.'
더 좋은 땅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것은 또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또 다시 큰 승리를 안겨준 영웅에 대한 예의였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자신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고 자신이 더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신운성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즐거운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요새를 빼앗겼다고요?"
"그래,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러 마스터들이 야습해왔다."
카딘에게 들은 이야기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니 지키지도 못할 것을 뭐 하러.'
낭비였다. 수많은 전사들을 잃고 노동의 결과물도 잃었다. 더불어 연합에 대한 신뢰도 조금 잃었다.
'만약 내가 패배하고 돌아왔으면 난리 났겠군.'
사막 부족과의 연계마저 별 다른 효과가 없었다고 알려지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면 적을 앞에 두고도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적이 항복을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항복하려는 자들도 생겼겠지.'
부담이 어깨를 누르며 위를 콕콕 찔렀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형편없었다.
'보나르. 그 인간도 알고 보면 별 거 아니었어.'
사람에게는 제각각 그릇이 있는 법이었다. 보나르는 한 부족의 족장으로서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연합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수뇌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욕심이 항상 문제야.'
신운성은 보나르를 키워주려던 생각을 버렸다.
'날 이용해서 잃은 것을 만회하려 하겠지.'
이용당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당해줄 수 있었다. 단, 대가가 확실해야 했다. 보나르의 과도한 욕심을 보며 신운성은 보나르를 포기했다. 욕심만큼 능력이 뒤따라주어 일을 잘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능력 이상의 욕심을 부리는 사람과는 함께 하는 것이 어려웠다.
'문제는 누굴 밀어주느냐 하는 것.'
보나르와 바로 관계를 끊는 것은 어려웠다. 카딘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다른 아내들과 함께 잠자리에서 빛을 발하던 페르나가 떠올랐다.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은 잊히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신운성은 카딘과 함께 전사들을 찾았다.
다시 만난 전사들은 이제 신운성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운성이 전사들에게 하대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우리야 요새 근처에도 안 갔으니까요."
카딘이 전사들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보나르도 카딘의 뜻을 많이 존중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나르의 전사들도 좀 보이는 군.'
문제는 보나르를 지지하는 전사들과 카딘과 신운성을 따르는 전사들이 사이가 무척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이래선 잘라내기 힘들다.'
잠시 고민하던 신운성은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신운성은 연합 수뇌부에 회의를 신청했다. 보통 전사가 회의를 요청한다면 받아주지 않았겠지만 신운성은 달랐다. 각 부족의 족장들이 참여한 회의가 열렸다. 연합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하크입니다."
인사를 하자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자리에 모여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지지가 있기에 제가 사막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다 안다. 자신들이 직접 도와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신운성이 겸손하게 나오니 일단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니 가슴에 호의가 살짝 스몄다.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사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듣기로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 전에는 공격을 미루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크흠, 사실이네."
추궁 받는 느낌이 든 온건파 쪽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이에 신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가는 결정입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없는데 무리한 공격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긴 합니다."
질타? 비난? 그런 것이 전혀 없는 말에 온건파 사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코벵을 함락했고 그곳의 물을 당분간 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얘긴 들었소. 정말 잘한 일이오."
"감사합니다."
신운성은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앞으로 흔치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사막인들과 연합한 것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저들이 코벵을 다시 정상화시키고 남부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전황은 더욱 불리해질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약간 더 우세한 상황일 때 남부에 내려온 세력들을 일소하는 편이 좋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싸운다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네."
온건파 쪽에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피해를 피하면 나중에는 더 큰 피해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남부로 온 이들만이 아닙니다. 북부인 전체입니다."
거대한 적을 언급하니 온건파 쪽에서는 신음을 흘렸다. 이들도 알고 있는 문제였다.
"우리가 왜 연합을 만들었습니까? 바로 파우론이란 신을 앞세워 남부를 핍박하는 북부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저들은 우리를 몰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희생이 따르겠지만 모두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운성은 강하게 자신을 생각을 밝혔다. 이에 강경파들은 모두 호응했다. 온건파쪽에서는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앞장서겠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말을 꺼냈으니 제가 제일 앞에 서겠습니다."
전쟁에서 선봉에 선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자네가 보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코벵을 제대로 복구하려면 약 3개월 정도 걸리겠죠. 제가 여기까지 오느라 2달 가까이 지났으니 1달 정도 남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달이라......."
1달 뒤에 적은 더욱 강력하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결국 온건파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제는 전면전을 더 뒤로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격을 주장했으니 계획은 있겠지? 한 번 말해보게나."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씩 공성을 벌이기보다 연합의 역량을 총동원해 적의 본거지를 일시에 공격해 고립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적의 보급대는 만만치 않네."
"그것을 끊어야 공성이 더 쉬워질 겁니다."
신운성이 제안한 계획은 북부군의 본거지를 한꺼번에 포위해 공성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북부군은 본거지에 비축한 물자만으로 버텨야 한다. 주변을 모두 포위했으니 식량을 새롭게 구하기도 어려워진다. 이 점을 파고들면 힘들게 성벽을 공략하지 않아도 쉽게 적을 이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각 본거지에는 기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북부군도 자신들의 약점을 알기에 강력한 기마병과 기사단을 준비해 놓고 많은 물자를 쌓아두었다.
"포위를 해서 보급을 막는다고 해도 1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네. 그러니 지금 총공격해도 소용없지 않나?"
"다른 곳은 포위하고 루앙은 최대한 빨리 함락시켜야죠."
남부원정군의 목줄은 결국 루앙이었다. 루앙을 점령하면 이후 다시 코벵으로 올라가 내려오는 적을 중간에 끊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네가 루앙을 함락할 건가?"
"물론입니다."
자신감에 찬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신운성이 앞장서서 나서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전사 하크의 계획에 동의하오."
온건파의 대표가 먼저 얘기하자 강경파에서도 동의했다. 이어진 회의에서는 세부 사항이 결정되었다.
'결국 내가 실패하면 다 빠져나갈 속셈이군.'
세부 사항이 결정되면서 부대 편성과 작전 계획을 살펴보니 모든 핵심은 루앙 함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남부에 있는 북부군의 전 거점을 일시에 포위하기는 하되 신운성이 1달 안에 루앙 함락에 실패하면 최대한 타격을 주고 물러난다는 계획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운성은 눈을 빛냈다.
'성공하면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다.'
루앙 함락에 성공하면 루앙에 대한 권리는 신운성 그리고 함께한 전사들에게 귀속된다.
'지지부진한 부족 연합 따위로는 파우론을 이기기 어려워.'
지금은 위기 때문에 연합이 그럭저럭 분열하지 않고 돌아가지만 나중에 남부로 향하는 위협이 모두 사라지면 온건파와 피해를 보기 싫어하는 자들은 요지부동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 빤히 보였다.
때문에 신운성은 권력을 더 갖기 위해 모험을 시도했다.
남부 연합군이 전면전을 위해 전력을 끌어 모으고 준비를 하는 동안 북부군은 전선 제작에 박차를 가해 결국 100척의 전선 제작에 성공했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해내다니 수고했소."
"모두 파우론님의 축복 덕분이죠."
장인의 얘기를 듣는 사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배를 살펴본 사제와 성기사들은 배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병력을 싣기 시작했다. 코벵을 점령할 2차 원정대가 꾸려진 것이었다.
"남부에 아직도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 받으며 살아 있을 수 있으니 수고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성기사들의 가슴은 각오로 다져졌다. 이에 반해 배에 탄 병력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번에 꾸려진 병력들 대부분은 범죄자들이었다.
빚을 갚지 못하거나 죄를 지었다고 판정을 받은 이들은 노예로 전락했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노예에서 풀어준다는 조건으로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성정이 거친 자들이었지만 오러를 사용하는 성기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양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범죄자였던 이들이 결국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정 함대는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비트를 떠날 때만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코벵에 도착하자 사정이 변했다.
"물이 없습니다."
"뭐야?"
"막혔습니다. 놈들이 코벵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복구는?"
"빨라야 1달입니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 수가 적어 어쩌면 2배, 아니 3배쯤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빨리 정화를 하고 흙을 파내라고 해! 그리고 배 3척에 최소한의 인원만 태운 뒤 물과 식량을 최대한 실어 다시 아비트로 보내!"
100척에 탄 전투 인원들이 먹고 마시는 수는 상당했다. 빨리 코벵을 점령하고 내릴 생각에 좀 더 많은 인원을 태웠기에 보급 물자는 오래가기 힘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큰일 난다!'
지휘관의 우려대로 일은 곧 터졌다. 범죄자들로 구성되었던 병사들이 물이 부족한 것을 알고는 폭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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