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운의 기어-82화 (82/109)

< -- 82 회: 사막으로 -- >

시체는 태울 것도 없었다. 벌거벗겨진 시체는 파도가 휩쓸어갔다. 거대한 바다는 수많은 시체를 집어 삼키고도 푸름을 자랑했다.

"이제부터 전리품을 나눈다."

전리품은 상당했다. 남쪽으로 이주를 가던 상인들도 있었고 가족들도 있었다. 기회의 땅이라고 알려졌기에 재산을 처분해 가던 도중 사막 전사들을 만나는 변을 당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재산은 남부에 지원을 하기 위해 보내던 보급물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면 연합이 3개월 정도 버틸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쓴다면?"

"넉넉하게 써도 1년은 충분히 넘겠죠."

다후트의 답변에 신운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보급 물자는 전사의 수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한다. 그리고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얹어주고."

"그럼 여자와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여자들을 끌고 와."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으면 여자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가면 되지만 신운성은 일부러 끌고 오게 했다. 아주 사소한 문제지만 움직이지 않고 타인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도 힘을 과시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다지 급할 일이 없었다.

"대령했습니다."

끌려온 여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시커먼 사막 전사들의 눈치를 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딱 한 가지만 묻겠다. 대답이 너희들의 생사를 가르게 되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도록."

차가운 경고에 여자들은 침을 삼키며 신운성의 입에 집중했다. 목숨이 걸린 질문이 날아온다고 생각하니 일단 희망이 보였다.

"파우론을 부정하고 남부인이 될 사람은 일어나 크게 외쳐라.

'난 악신 파우론을 부정한다!'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질문의 요지는 간단했다. 파우론을 버리고 한 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적으로 남을 것인가?

신운성은 인구를 늘릴 생각이었다. 여자들이 아군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더 많은 수의 전사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한 자발적인 노동력이 늘어나니 이것은 곧 전력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여자들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죽음도 무서웠다.

잠시 침묵이 돌더니 한 여자가 일어나 외쳤다.

"난 악신 파우론을 부정한다!"

살기 위한 외침이었다. 한 명이 외치자 여자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외쳤다. 혼자일 때는 두렵지만 혼자가 아니게 되자 용기를 얻은 것이다.

외치지 않는 이는 매우 극소수였다. 신앙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약 30여명.

"너희들은 악신을 부정할 수 없나?"

"파우론님은 세상의 빛이자 정의이시다. 부정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한 여자가 강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신운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신운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 여자들의 아이들을 끌고 오도록."

명령이 내려지자 여자들이 저주를 퍼부었다.

"파우론님이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악마! 악마는 지옥으로 돌아가라!"

비난을 받는 신운성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끌려온 아이들은 오들오들 떨었다. 험악한 분위기에 질질 짜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울지 마라. 지금부터 계속 울면 죽인다."

신운성의 경고에 아이들은 놀라 딸꾹질을 하면서 울음을 그치려 필사적이었다.

"저기 너희들이 어머니가 있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신운성이 무서웠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난 악신 파우론을 부정한다!'

라고 외치면 된다. 그럼 너희들은 물론 너희들의 어머니도 살 수 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모조리 파우론을 부정한다고 외쳤다.

"아이들은 놔줘."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이를 보며 신운성은 차갑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의 아이들은 파우론을 부정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식들도 악마인가?"

저주를 하던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악신....... 파우론을 부정합니다."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겨우 말하자 나머지 여성들도 결국 따라했다.

"지금 한 말을 기억하라. 너희는 이제 우리와 하나가 되었다. 파우론의 편에 서게 되면 네 자식들이 악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지켜보던 전사들은 모두 감탄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본보기로 때려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해결해버린 탓이었다.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냥 전사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사들의 머릿속에는 '왕'이란 단어가 맴돌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부상을 입은 전사들 중 더 이상 싸우기 힘들게 된 이들을 중심으로 선택하게 했다. 전사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겨 남부의 미래를 낳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새로운 남편을 선택했다. 아이들도 이를 받아들였다. 신을 부정한 이상 이제는 철저한 남부인이 되는 길 밖에는 없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처리하자 전리품 분배는 거의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몇 권의 책이었다.

"오러 연공서를 구했습니다."

전사들은 오러 연공서를 감추지 않고 가져왔다. 이미 취하는 것을 여럿이 본 상황에서 누군가 그냥 가지게 된다면 불화가 일어날 뿐이었다. 그러니 신운성에게 분배를 맡기는 것이었다.

'연공서의 분배는 중요하지.'

더 강한 무력을 가질 수 있는 수단이었다. 죽은 기사들의 소지품에서 나온 연공서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전사 대장들이 보는 앞에서 연공서를 읽었다. 아무도 이 작업을 방해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분배를 해주려면 수준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만약 공이 적은 이에게 더 좋은 것이 돌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품게 될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두 사람은 오러 연공서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문일지십을 갖추면서 생긴 놀라운 기억력 덕분이었다.

'수준은 다 별 볼 일 없군.'

하지만 건질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모두 색다른 방식으로 시작을 하지만 중간쯤 가면 거의 가 엇비슷해졌다.

'역시 마나 사용법이 훨씬 나아.'

별로 탐낼 것은 없었다.

"수준은 모두 비슷비슷한 것들이다. 다만 처음 시작하는 방식이 색다른 것들이니 일단 설명을 해주겠다."

신운성이 하나씩 설명해주자 레던과 다후트를 비롯한 전사 대장들은 집중해서 들었다. 수준이 비슷하다고 해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아니면 좋은 것이 아니다.

전사 대장들은 하나씩 선택했다. 그래도 남은 것들은 알아서 나눠주라고 넘겼다. 눈에 차지 않은 것들에 욕심을 내봐야 전사들의 인심을 잃게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전사들이 강해져야 나도 좋고.'

이미 충성을 맹세한 상태니 이제부턴 신운성이 이들의 족장이나 다름없었다.

분배가 모두 끝나고 나자 전사 대장들은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해졌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일단 여기 있는 모든 보급 물자는 2일 거리에 있는 부족 근거지로 옮긴다."

부족 근거지는 바로 부족들이 생활하던 터전인 건물을 의미했다.

"그럼 거기서 지내는 겁니까?"

"아니, 지내는 것은 코벵에서 30분 떨어진 언덕 뒤편에서 한다. 보급물자만 이동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은 남부가 아닌 사막에서 부족 근거지 하나를 잡아 거기서 생활하게 한다."

전투 한두 번 하고 다시 돌아가 보고하던 식으로 전쟁을 할 순 없었다. 이 때문에 지휘관의 결정이 중요했다. 지금 현재 있는 전사들로 계속해서 적을 괴롭히는 역할이 바로 신운성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남부로 보내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수의 전사들이 호위로 따라가야만 했다.

'일단 이곳에서 적을 최대한 괴롭히는 게 좋다. 아마 몇 번 더 배들이 이곳에 들릴 테니 그들을 모두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일이 있었다.

배에 탄 사막 전사들은 전부 토하고 난리가 났다. 난생 처음 배를 탄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배를 습격해 약탈을 하기도 어려웠다. 자칫하면 반격에 전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막 전사들은 배에 적응했다.

"후우, 살 것 같습니다."

신운성의 곁에 서 있던 레던도 배는 처음이었다.

"흥, 겨우 배 멀미 가지고. 한심하긴."

다후트의 핀잔에 레던은 발끈했지만 뭐라고 욕을 내뱉거나 하진 않았다. 이번 일은 자신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일이기에 그랬다. 그리고 지금은 신운성이 바로 옆에 있었다. 도발 좀 당했다고 자꾸 싸우다가는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기에 레던은 꾹 참았다.

레던이 반응하지 않고 넘겨버리니 다후트도 곧 입을 다물었다.

반면 신운성은 두 사람의 기 싸움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사람이 모여 살다보면 다툼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직이 커진다면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세력들이 한 솥밥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봉합하기 위해 나선다면 오히려 피곤해질 수 있었다.

'싸울 놈은 싸우고 살 놈은 살고.'

편들어 줄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는 신운성이었다. 다후트가 충성을 맹세하며 많은 전사들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후트를 일방적으로 편들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레던의 편을 들어주어 다후트를 핍박할 생각도 없었다.

'아직은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줄 때가 아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고 벌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쥐기 전에 나서서 자꾸 무엇인가 시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신운성은 판단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어린애처럼 헤헤 웃으면서 악수할 사람들도 아니고.'

부족의 미래를 걸고 싸웠던 이들이 쉽게 화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신운성은 선을 그어놓고 어떤 녀석이 먼저 선을 넘게 될지 지켜보기로 했다.

루앙.

"배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혹시 태풍이라도 불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급을 기다리던 그란은 날짜가 되도 배가 도착하지 않자 조금 불안해졌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란은 남부 연합이 코벵을 공격했을 거란 상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사막인들에 대한 것을 아예 배제하고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오판이었다.

"코벵에 무슨 일이 있는지 연락선을 보내봐. 이쪽에서 챙긴 물건도 보내야 할 때가 됐으니까 수송선도 같이 보내고."

"알겠습니다."

그란의 명령에 따라 연락선 한 척과 수송선 세 척이 코벵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연락선을 보내고 한참이 지나도 연락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란은 무엇인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지만 먼 곳에 있기에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코벵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성기사들을 모아."

결국 그란은 성기사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