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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 회: 사막으로 -- >
'요새의 책임자?'
전령의 이야기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
어딘가의 책임자라는 그럴싸한 직책은 부족 사회 안에서도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운성은 책임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 힘은 어둠을 이용한 공격. 방어를 하게 되면 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방어를 하게 되면 공을 세울 기회가 줄어들 수가 있었다. 하염없이 요새에서 적이 덤비길 기다리는 것보다 기습을 통해 작은 공이라도 세우는 편이 신운성은 더 적절하다 판단했다.
'그나저나 요새 따윈 우리가 차지해봐야 짐만 되는 애물단진데.'
유목민족에게는 유목민족의 장점이 있다. 요새를 차지하고 웅크리는 것은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신운성은 판단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군.'
애초에 제대로 통합된 조직이 아니었다. 사람이 여럿이다 보면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서로 한 뜻으로 뭉쳤다고는 하나 뭔가 이익이 될 만한 것이 나타나면 분열하는 일도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내 길을 가야지.'
신운성은 연합 수뇌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고민을 멈췄다. 더 생각해봐야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었다.
'연합 수뇌부의 정리보다는 전쟁이 더 급하지.'
알력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었다. 신운성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계속 승리를 일궈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보면 권력을 잡을 기회는 굴러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건축 자재를 실은 마차는 여기에 대기한다!"
요새를 쓰겠다고 했으면 결국 건축 자재가 필요했다.
"요새는 나와 전사들이 힘을 합해 점령한 것이니 약탈한 것들과 요새에 대한 권리에 해당하는 보상을 합당하게 나눠달라고 전해라. 그리고 요새 지휘관에 대한 권리는 보나르님에게 넘기겠다."
"알겠습니다."
신운성은 유드족 족장 보나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때문에 그에게 권리를 넘겼다. 요새 지휘관 자리를 그냥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이득도 취할 수 없다. 주더라도 자신의 편을 통해 한 다리 걸쳐 줌으로써 권력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쯤하면 그쪽도 만족하겠지.'
신운성은 보나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렇기에 준다. 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는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가 계속 지속 될 수 있다.
"허허허허."
보나르는 기분 좋게 웃었다. 전령이 가지고 온 신운성의 대답은 마음에 쏙 드는 내용이었다.
'어떠냐?'
보나르는 무표정으로 있는 에퀼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요새의 방어 책임자는 아무래도 전투의 흐름을 잘 아는 연륜 있는 사람이 해야 할 것 같으니 전 다미르족의 전사 대장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나르가 언급한 다미르족은 최근 보나르와 깊은 혈연을 맺은 부족이었다. 보나르의 아들이 다미르족 족장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혈연이 맺어졌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연합 수뇌부는 보나르의 선택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요새를 직접 점령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신운성이었다. 때문에 신운성의 뜻을 존중해주어야만 했다. 부족 사회에서 전사들의 지위는 굉장히 높았다. 전사들이 큰 불만을 품으면 족장이 바뀔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전쟁에서는 전사들의 전리품이나 권리는 항상 존중해주는 것이 남부 부족의 관례였다.
권리가 보나르에게 넘어갔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정해질 뿐이었다.
'의외로 족장과의 관계가 돈독한 모양이군.'
연합의 수뇌부는 신운성과 보나르의 관계가 생각보다 끈끈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보나르는 더욱 흡족해졌다.
부족에 속한 전사가 가장 중요한 권리를 족장에게 그대로 넘겨주었으니 하는 판단이었다.
'후하게 대접해줘야겠군.'
우두커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에퀼의 모습이 다시 보나르의 눈에 들어왔다.
태연한 것 같지만 살짝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본 보나르는 기분이 좋았다.
다시 돌아온 신운성과 전사들은 환호하는 부족민들을 보게 되었다.
연합이 생기고 나서 계속해서 밀리던 와중에 얻게 된 승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동시에 신운성의 명성도 한층 더 높아졌다.
이제는 그냥 좀 잘 싸우는 전사가 아니었다.
승리를 가져다 준 영웅이었다.
하지만 환영식은 조촐하게 끝났다. 기분 같아선 성대한 축제라도 열고 싶었지만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할 일은 많았다. 전사들은 빨리 휴식을 취하고 다음 적을 상대해야 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페르나는 집으로 돌아온 신운성을 맞이하며 활짝 웃었다. 승리도 좋지만 신운성이 무사히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 기뻤던 것이다.
"이건 페르나가 적당히 나누어주도록 해. 밖의 무구는 카딘과 호안바트 그리고 레던에게 적당히 가져가라고 하고."
"알겠어요."
신운성은 가지고 온 전리품의 처리를 명하고는 휴식에 들어갔다.
'이제 좀 잘 수 있겠다.'
씻고 눕자 피로가 어둠을 몰고왔다.
한바탕 푹 자고 일어난 신운성은 옆에 누워있는 서은하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어디를 가든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제품이라는 공통점은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평소에는 별로 말도 안 하고 애정 표현도 안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손으로 볼을 쓰다듬으니 서은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
"응."
아이처럼 품에 파고드는 모습은 순진한 소녀 같았다. 지금 모습만 보고는 서은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의 머리를 박살낸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신운성은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았음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서은하는 여전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피곤하면 좀 더 자."
"아냐. 안아줘. 얼른."
어린 아이처럼 보채는 통에 두 사람은 한 바탕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사랑의 열풍이 지나간 뒤에 방을 나오니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페르나와 아미야, 그리고 카리나가 식사를 준비하곤 다소곳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먹자."
신운성이 자리에 앉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없었다. 신운성이 뭔가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편도 아니었고 서은하와 페르나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늦게 부인이 된 아미야와 카리나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면서 식사를 할 뿐이었다.
"잘 먹었어. 맛있네. 누가 한 거지?"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신운성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원래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식사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었기에 나름 노력하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중요하니까.'
식사라는 것은 단순히 음식물 섭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문화가 꽃피는 때 중 하나가 바로 식사 시간이었다. 인간으로서 친밀감을 느끼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며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셋이 같이 했어요. 이건 제가 했고. 저것은 카리나가......."
페르나의 설명에 신운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주었다. 대화도 그렇고 시도가 모두 어색했다. 페르나를 비롯한 여자들도 신운성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에 살짝 웃었다. 어쨌거나 소중히 대해주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 밤에는......."
밤을 함께 보낼 아내를 택한 후 신운성은 오러 연공법 수련에 들어갔다.
루앙.
성황군의 총사령관 그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건설 중이던 요새가 함락 당했다?"
"네, 보급을 하기 위해 보급대가 갔다가 남부인들이 점령한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거지?"
"생존자가 없어 사정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것 참 문제로군."
그란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습격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점령까지 당했는데도 정보 부족으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있는데 말해도 됩니까?"
"쯧, 말해봐."
그란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매우 싫어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혼선을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어디 심부름 가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면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누가 죽거나 큰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린 전쟁이었다.
정보를 다루는 이들도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 생각하고 움직여야만 했다. 자신들의 수집한 잘못된 정보가 아군의 패배로 이어지며 수많은 생명을 잃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추측이라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전쟁을 하며 항상 정확한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릴 순 없다는 내용이 그란이 읽은 병법서에 적혀있었다.
"우선 적들이 요새를 함락한 것은 비오는 날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비오는 날?"
"네, 비가 오기 전날 보급대가 보급을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습격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계속 해봐."
"그리고 남부인들이 요새에 달라붙어 작업한 것을 보면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오러 마스터급의 존재가 비오는 날을 이용해 기습을 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흠......."
요새의 수비 전략은 사실 그란이 짜내서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전방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로 받으면 그란이 해결책을 짜내 보내준 일이 상당히 많았다. 지역 책임자들도 그란의 해결책이 가장 뛰어났기에 의지하는 면이 있었다.
남부에 온 모든 사람들이 다 뛰어난 전략적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고 상황 판단 능력이나 지휘 능력이 우수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얻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지역 책임자들은 자존심을 굽혀가며 그란에게 의지했다. 그란이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교단 사람이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다.
"오러 마스터라."
그란은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자가 비가 오는 날 기습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밤이라면 효과가 극대화 될 수도.'
오러 마스터에 도달한 성기사들의 능력을 잘 아는 그란은 미소 지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부에서 실력자를 동원했다 이거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신빙성 있는 정보였기에 일단 염두에 두기로 했다.
'그럼 오러 마스터가 있다는 가정 하에 요새를 다시 빼앗을까? 어떻게 할까?'
그란은 고민했다. 공격을 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았다. 남부인이 차지한 요새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아니야. 공사는 남부인이 하게 내버려두자. 대신 나중에 확실히 빼앗아주지.'
그란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요새를 완공한 뒤에 공격한다면 피해가 클 수 있다. 하지만 적의 공격을 통해 그란도 한 수 배웠다.
'비오는 날 우리도 오러 마스터를 보내주지.'
칼날을 숨긴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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