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 회: 사막으로 -- >
승리의 선언.
그것은 계속 밀리던 연합 전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승리.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달콤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쾌감은 그 어떤 것보다 황홀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사들은 환호했다.
높은 곳에서 승리를 선언한 신운성을 가슴에 새겼다. 짜릿한 승리를 안겨주었기에 모든 것을 믿고 계속 뒤를 따르고 싶다 생각했다.
"닥치는 대로 챙겨라! 그리고 돌아간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한 번 더 환호해준 전사들은 미소 지으며 흩어졌다. 주변에 적과 아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고 부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리품을 챙길 생각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사냥을 했으면 먹이를 뜯는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약탈을 선언한 신운성은 다시 미완성의 요새 안으로 돌아갔다.
'챙길 건 챙겨야지.'
신운성과 서은하는 계속 이어진 전투로 몹시 피곤했으나 기력을 쥐어짜내며 요새 내부를 뒤졌다.
힘든 사냥을 했으니 보상을 바라는 것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요새의 함락으로 명성이란 가장 큰 보상을 얻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칠 순 없었다. 지금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칭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반복 된다면 다르게 일이 흘러가게 된다.
처음에는 착한 사람이다 정말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칭찬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칭찬의 틀에 갇히게 되면 사람들은 양보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 분은 이런 것은 원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챙겨주지 않거나 무엇인가를 요구할 땐,
'왜 이런 것을 욕심내지? 변했어.'
라고 하며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었다.
인간은 이익에 민감한 생물. 모든 사람이 양보를 아는 성현이 아니니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니 챙길 수 있을 땐 필요 없어도 챙긴다.'
훗날 정말 필요한 것을 챙겨야 할 때에 분란이 오지 않도록 신운성은 대가를 챙겨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챙길 건 챙기다 아주 가끔 양보할 때 오히려 효과가 더 큰 법이었다.
항상 양보 하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만 양보 안 해도 욕심 부렸다고 말이 나돌지만 항상 욕심 부리던 사람이 어쩌다 양보하면 양보 받은 사람은 의외로 감격하는 경우가 많다. 양보 받은 이유가 자신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 감격은 더욱 커진다.
물론 항상 양보하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많이 따르고 욕심 부리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는 현상도 무시할 순 없다.
'적당히 챙기는 거야. 적당히.'
이것이 바로 신운성의 판단이었다. 남들 챙기는 정도. 남들이 욕심을 부리는 정도를 챙기는 것을 나무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 모자라지도, 그리고 지나침도 없이 자신의 몫을 챙기는 길을 선택한 신운성이었다.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다면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기에 편하고 좋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모를 사람들 천지.
그렇다면 사람들의 '욕망'을 다스려 자신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요새의 지휘관이 있던 곳을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방이 하나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가니 좁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나왔다.
침대와 책상은 고급스러운 나무로 되어 있었고 한 쪽에 놓여 있는 상자 또한 화려한 문장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안에는 작은 양초만이 방안을 밝히는 중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상자를 열어 본 신운성은 안의 내용물을 꼼꼼하게 살폈다. 안에는 각종 종이 다발과 책이 들어 있었다.
종이 다발은 일종의 계약서였다. 대부분 병사들을 지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계약서였다. 하지만 이제 계약서는 쓸모없어졌다.
계약에 사용될 땅은 이미 점령되었고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사망한 상태였다.
계약서들은 가차 없이 버려졌다.
'오러 연공서!'
남은 것은 책 3권. 모두 오러 연공법을 담은 책들이었다.
'1권은 완전 기초적인 것이군. 다른 두 권 중 하나는 꽤 수준이 높고 남은 하나는 오러 연공법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신운성은 마지막 오러 연공서를 들고 탐독했다.
검은 가죽으로 된 표지에 황금으로 된 글씨가 찍힌 오러 연공서의 제목은 '플라긴의 마나 사용법'이었다.
'문일지십을 올린 내가 봐도 아직 이해가 안 된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얻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더구나 오러 연공이 아닌 마나 사용법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몸으로 흡수해 오러로 방출하는 것은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책의 서두에 나와 있었다.
'흡수 하지 않고도 사용한다니.'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종종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들이 있었다.
'느껴라? 알게 된다? 뭘?'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있었다. 뭘 느끼고 뭘 알게 된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라는 지는 나오질 않았다.
그냥 뜬구름 잡는 식이었다. 하지만 기어를 통해 얻게 된 능력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건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자만 익힐 수 있는 것 같다.'
선천적인 재능. 신운성은 곧 그것이 마나를 느끼는 힘과 비슷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철심에 더 투자해야겠네. 그리고 문일지십에도.'
어쩌면 수치가 낮기에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신운성의 뇌리에 스쳤다.
'그때까진 인벤토리에.'
플라긴의 마나 사용법은 그렇게 인벤토리로 직행했다.
'이거 2권과 말 2마리. 그리고 죽은 자들의 무구 정도면 되겠지.'
욕심 많은 자라면 가장 큰 전공을 세웠으니
'전부 다 내꺼!'
라고 외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신운성과 서은하가 목책을 무너트리고 적의 방어를 뚫어 길을 열었으며 내부로 파고 들어가 기사들을 때려잡고 지휘관까지 잡았으니 가장 많은 몫을 챙기겠다고 해도 다른 전사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방 안을 살폈지만 더 쓸 만한 것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자 한 구석에 약간의 보석과 금화가 담긴 자루가 전부였다.
'군자금이었나?'
나쁘지 않은 수익. 보석과 금화도 같이 챙기기로 한 신운성은 다시 내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침대를 뒤집고 책상과 상자를 박살 내 혹시라도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 한 뒤에 방안의 벽을 일일이 두드려 빈 공간이 없는 것까지 확인했다.
밖으로 나오니 전사들이 수레에 전리품을 싣는 것이 보였다. 어떤 전사들은 적의 말을 이끌고 나가는 중이었다.
"말 두 마리와 죽은 기사들의 무구를 내 몫으로 챙겨 놔라."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신운성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전사는 명령을 바로 받아들였다. 신운성이 요구한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뒤늦게 와서 기사들의 무구를 챙겼던 이들도 신운성이 원하는 물건이라고 하니 순순히 내놓았다.
자신들이 죽인 자의 것이 아니니 내놓으라면 내주는 것이 남부 전사들의 사고방식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욕심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는 자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소유권을 두고 분쟁의 당사자들끼리 결투까지 가는 경우도 흔했다.
"돌아가자."
전사들은 별 것을 다 챙겼다. 미완성의 요새를 짓기 위해 쌓아둔 석재와 재료들까지 모조리 챙겼다. 요새를 완성해 연합에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다시 갖다놔야 할 물건들이었지만 일단 다 챙겼다. 건축 자재도 어쨌거나 전리품이었다.
상당히 많은 양의 물건을 챙길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요새에 남겨져 있던 마차들이 한몫했다.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전사들은 유유히 요새를 떠났다.
"허허허? 점령에 성공했다고?"
"이렇게 경사스러운 일이!"
미리 달려온 전령을 통해 소식을 들은 연합의 수뇌부들은 매우 기뻐했다. 이제야 승리다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과정이 대부분 신운성의 공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 또한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크, 그 자가 정말 큰일을 해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전사들을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최전방에 전사 대장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거야 본인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니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고 지금 중요한 것은 미완성의 요새의 처분 문제입니다."
"흐음......."
수뇌부는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 살짝 사람들의 사심이 섞였다.
'요새라. 그것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부족의 입지가 좀 더 유리해지지 않을까?'
'근거지를 얻는다면 나중에 더 큰 결정권을 가질 수도 있다.'
몇몇 사람들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때였다. 한 사람의 입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본인은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죠?"
"우리가 전쟁에서 계속 밀리면서도 전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동'에 있습니다. 불리해지면 주저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덕분에 큰 피해는 별로 입지 않았죠. 하지만 요새와 같은 건물을 차지하게 되면 사람을 투입해야 하고 사수하기 위해 후퇴하지 못하고 계속 남게 됩니다. 지켜낸다면 다행이지만 못 지키면 요새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잃게 됩니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요새를 차지하게 되면 적의 진격로 하나를 봉쇄한다는 효과 이외에는 더 큰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적이 차지하려던 지역을 막음으로서 우리의 영역을 지킬 수 있고 적의 영역 확장을 막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전쟁 중입니다.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수뇌부의 분위기는 어느새 요새를 사용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럼 그곳의 책임자는 누구로 정하는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공을 세운 하크가 책임자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드족 족장 보나르의 말이었다. 이에 다른 부족의 족장들은 살짝 인상을 썼지만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데."
"경험 많은 전사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습니다."
"어흠."
반대 의견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묵살되었다.
"그래도 본인 의사란 것이 있으니 한 번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보나르의 뜻대로 요새의 책임자로 신운성이 내정되려는 찰나 다른 부족의 족장이 웃으며 제안했다.
'저놈.'
보나르는 인상을 썼다. 방금 제안을 한 자는 에퀼이라는 포레앙족의 족장이었다. 사사건건 보나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묘한 순간에 은근히 반대를 하며 일을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자였다.
에퀼의 제안에 보나르를 제외한 수뇌부는 대부분 찬성했다.
"그럼 일단 그가 돌아오는 대로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죠."
"그러지 말고 전령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럽시다."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전령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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