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 회: 인간관계 -- >
적도 계속 당하기만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신운성에게 당하다 의도를 파악하자 아예 목책에서 보초들을 뒤로 물렸다. 그와 동시에 보초들이 서있던 자리는 불로 환하게 밝게 만들어 두었다.
'보초는 없고 불만 켜 놨다? 속이 훤히 보이네.'
목책 안쪽에서 꺼지지 않는 불을 바라보며 적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반응이 약간 느리긴 했지만 계속 당하지 않고 방법을 생각해냈다니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늦었어.'
피식 웃은 신운성은 목책에 다가가 도끼를 뽑았다.
'시작해볼까?'
도끼에 오러를 주입하자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적이 있었다면 금방 발견하고 공격했겠지만 보초는 주변에 하나도 없는 상황.
"하아아아아압!"
기합까지 여유롭게 지르며 도끼를 휘두르자 목책의 기둥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쾅! 콰앙!
목책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리자 적 병력이 달려오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처음부터 적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신운성은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에 다시 기마병이 출격했다. 하지만 신운성을 잡지는 못했다.
위치를 짐작하고 수색해도 도착하면 신운성은 이미 멀리 도망친 뒤였다.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는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잘 들렸기에 신운성은 위치를 적의 위치를 파악하며 항상 방향을 바꾸어 도망쳤다. 말보다 사람이 느리다고는 하지만 오러 마스터의 문턱에 다다른 신운성과 서은하는 아주 짧은 시간만큼은 말에 버금가는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
적의 지휘관 머리 꼭대기에서 놀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자 신운성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파괴 활동을 진행했다.
목책은 서서히 파괴되어갔다. 단단히 만들었다고 하지만 오러를 사용한 도끼질에 목책은 오래 버틸 순 없었다.
단 번에 부서지거나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박힌 기둥들이 파괴되자 목책이 조금씩 흔들렸다.
위쪽은 아직도 단단했지만 아래부터 흔들리니 어쩔 수 없었다.
이쯤 되자 적도 결단을 내렸는지 과감한 행동에 나섰다.
기마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사방으로 모두 흩어지며 신운성을 찾았다. 하지만 신운성은 공격을 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공격당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망을 형성해 빠르게 조이려고 하겠지.'
상대의 수를 바로 읽어버린 상태에서 일부러 걸려 고생할 생각이 없는 신운성은 뒤로 물러나 수색하는 기마병들을 구경했다.
혼란은 지속되었고 결국 목책은 무너졌다. 나중에 적 지휘관은 포기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병력을 모두 미완성의 요새로 물린 탓이었다. 덕분에 신운성은 목책을 무너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지친다.'
밤새 적을 두드리다보니 신운성과 서은하도 많이 지쳤다. 특히 목책을 무너트리기 위해 오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체력 소모가 빨라졌다.
'체력을 더 올릴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력과 지혜를 올려 철심과 문일지십으로 만들었기에 지금과 같은 전투가 가능했을 뿐이었다. 상대의 움직임과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는데 제일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이 두 능력치임을 신운성은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강운을 올린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일이 잘 풀린 것도 어쩌면 운이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 선택이 잘 풀렸으니 하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인벤토리에 꽉 채워놓았던 단검들은 큰 역할을 해주었다. 상점에서 바로 사서 무기를 사용했다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으나 인벤토리에서 바로 뽑아서 던지는 것은 시간 낭비가 거의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뽑아 던지는 것을 아군이 봤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둠 속에서 그러한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검 좀 회수해야지.'
신운성은 철저히 하기 위해 단검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불빛 아래에 몸을 드러내 적의 몸을 뒤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은하가 방패를 양손에 들고 요새 방향을 막아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신운성은 빠르게 단검을 회수하며 적의 품을 뒤져 돈이 될 만한 것을 주머니에 챙겼다. 아군이 멀리서 봤을 수도 있으니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요새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화살이 몇 번 날아오긴 했지만 서은하가 모두 막아냈다.
적의 기마병이 다시 잡기 위해 나왔지만 그럴 때마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빠르게 물러났다.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면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비가 오기에 흔적도 남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어둠을 밝혀줄 달도 없었다.
하지만 어둠은 영원하지 못했다.
서서히 새벽빛이 어둠을 아주 조금씩 몰아내기 시작했다.
단검을 대부분 회수한 신운성은 가차 없이 물러났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기에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위험했다.
"목책이 무너졌다."
전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친 표정으로 툭 던진 말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벽과 온 것과 함께 멀리 사물을 조금씩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목책은 없었다.
"요새는 미완성이다. 빨리 부족 전사들을 불러와. 그리고 그 전에 우리는 시간을 끌면서 적이 아군을 부르는 것을 늦춘다."
요새의 성벽은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았다. 만약 성벽이 다 지어졌다면 목책이 아닌 돌로 된 성벽과 마주해야 했을 터였다.
목책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족 연합은 빠르게 전사들을 보냈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전사들은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기회가 왔을 때 치지 못하면 전투는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말을 탄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때까지 요새 주변을 감시하며 빠져나가는 전령을 처리한 신운성은 공격을 명했다.
요새가 완성되었다면 농성을 펼치는 것만으로 오래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요새의 성벽은 미완성인 상태였다. 처음 목책을 만들 땐 대군이 밀려와 순식간에 만들어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돌로 된 요새는 아무리 대군이 있어도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적들은 군대를 뒤로 물렸다. 목책만으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 적의 실수였다.
"가자!"
피곤했지만 신운성은 맨 앞에서 달려 나갔다. 이제는 과실을 따야할 때였다. 여기서 쉬게 되면 기껏 밤새 고생한 과실을 엉뚱한 놈이 차지할 수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지우는 말발굽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적들이 성벽의 빈 공간에 집결한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빼곡하게 세워진 창들은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속력을 늦춘다!"
기다란 창으로 앞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무식하게 말을 들이대 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었다.
신운성이 속력을 늦추자 전사들이 모두 속도를 늦췄다.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간 신운성은 말에서 내렸다. 더 이상 말을 타고 돌격하는 것이 의미 없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후미는 적의 기병에 대비하고 선두는 나를 따르라!"
명령이 내려지자 후미의 기병들은 불평을 하면서도 말에 올라탄 채 남겨진 말들을 지켰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신운성을 따르는 전사들은 적을 압도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달리는 말이었다면 그냥 세워둔 긴 창에도 꽤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말을 타지 않은 전사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창이 너무 길어 사람을 상대로 한 찌르기 공격은 제대로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조금만 조심해서 지나치면 창대 옆으로 계속 달릴 수 있었다.
적은 금방 창을 버리고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가장 앞에 선 신운성에게 방패만을 든 허술한 방어는 통하지 않았다.
쿠아아아앙!
오러를 머금은 메이스에 사람과 함께 방패를 박살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된 병사를 뒤로한 신운성은 성난 사자처럼 날뛰었다.
"으아아아악!"
오러를 머금은 메이스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되었다.
"차앗!"
이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적의 기사가 덤벼들었다. 그러나 기사의 검은 서은하에게 막혔다. 그 순간이었다.
퍼억!
신운성의 메이스가 기사의 머리를 박살냈다. 아주 잠깐의 틈이었지만 기사는 이를 허용함과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퍽! 퍼퍽!
계속해서 전진하는 신운성은 무자비했다.
혼자서 계속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좌우로 뛰며 길을 더 넓혔다. 그 사이로 전사들이 뛰어들며 전투는 서서히 전사들 쪽으로 기울었다.
난전이 시작되자 전사들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군은 급조한 병사들이 많기에 숙련이 덜 된 상태. 하지만 남부의 전사들은 원래부터 싸움꾼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신운성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후욱! 후욱!"
힘을 많이 소모한 탓에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난폭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좁은 통로에서 신운성의 전투력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오러를 머금은 방패는 기사의 공격으로도 뚫지 못했다. 반면 기사는 피할 공간이 적었다.
퍼억!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신운성을 막지 못했다. 통로가 넓었다면 한꺼번에 덤벼들 수도 있었으나 요새의 통로는 좁았다.
결국 기사들은 하나둘 쓰러졌고 마지막에는 지휘관만 남았다.
"죽어라! 악마!"
지휘관의 검은 오러를 흩뿌리며 날아왔다. 순간 신운성의 방패가 환하게 빛나며 검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요새 지휘관은 살짝 휘청거렸다. 충격으로 인해 잠시 균형을 잃은 탓이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아주 작은 틈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빛나는 메이스가 날아오자 서둘러 막았지만 오러를 머금은 검은 튕겨나갔다. 이어서 신운성의 발길질이 이어졌고 충격에 몸이 구부러짐과 동시에 메이스가 번개처럼 내리쳐져 머리를 박살냈다.
퍼억!
오랫동안 신운성을 애먹이던 적 지휘관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쓰러진 몸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후우우우우우.
바닥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보며 숨을 고른 신운성은 전투가 거의 끝났음을 깨달았다. 주변에 싸우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통로는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흘러넘치는 피가 돌바닥을 흥건하게 만들어 피를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피를 밟는 소리가 통로에 울렸다.
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쳐 다시 밖으로 나온 신운성은 아군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보아라!"
가장 높은 곳에서 신운성이 외치자 전사들은 모두 신운성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승리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미완성의 요새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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