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1 회: 인간관계 -- >
점심을 먹은 이후에 신운성은 오러 연공법을 수련했다. 현재 가진 것은 강한 무력뿐. 그렇다면 이를 활용해 입지를 다져나가야만 했다.
정신력과 지혜가 철심과 문일지십으로 바뀐 뒤에 신운성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주 약간의 수련을 해도 예전에 하루 종일 수련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성기사의 편지에 담긴 오러 연공법에 대한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에 찾아온 변화는 무시무시했다.
'주변의 마나가 빨려들어 온다.'
민감해진 만큼 주변 마나의 흐름이 확연히 보였다. 마나를 몸 안에 빨아들여 정착시키고 몸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마나에 대한 이해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높아졌다.
'이 정도 추세라면 1년 안에 마스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한 힘을 빨리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 신운성은 더욱 오러 연공법에 빠져들었다.
수련이 끝난 뒤에 기다리는 것은 바로 족장의 식사 초대였다.
"어서 오시게나."
유드족 족장 보나르는 후덕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웃는 모습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첫인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첫인상은 첫인상일 뿐이었다.
'진실은 첫인상 뒤에 숨어있는 법.'
신운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첫인상이 좋아도 성격은 거지같은 인간들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다. 지구에서 보낸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에 그러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웃음에는 웃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정석이다. 진실이야 어떻게 되었든 사람이 서로 원활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탄생한 것이 예의다. 그러니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교류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자, 얼른 드시게나."
식사는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전쟁 중인데 수뇌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사치를 한다면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전사들이 먹는 것보다 약간 더 좋은 정도의 요리들이었다. 대신 양이 푸짐했다.
"이번에 정말 수고가 많았네. 덕분에 우리 부족의 입지가 탄탄해졌어."
"별 말씀을."
식사를 하는 와중에 보나르는 연신 칭찬을 날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배가 부른 상태로 만들며 기분까지 들뜨게 하면 보통 경계심이 무뎌진다. 이 틈을 이용해 거리를 좁히면 상대를 설득하는데 더 효과가 있는 경우가 꽤 많았다. 보나르는 이러한 사실을 경험을 통해 습득했고 사용했다. 족장의 자리에 오래 앉아있으려면 이런 저런 사회적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그다지 없었다.
'빤하네.'
지구에서의 지식을 가진 상태에다 문일지십까지 이른 신운성의 눈에는 모든 의도가 보였다. 월척을 낚기 위해 미끼를 던지는 행위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뭘 원해서 이러는 걸까?'
상대의 의도를 알면서도 기분 좋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척하는 신운성이었다.
신운성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걸신들린 거지처럼 연신 먹으며 보나르의 칭찬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척 보기에도 순진해 보이는 모습.
모든 것은 연기였다. 그러나 보나르는 신운성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수룩한 상대라면 자신의 손에 넣고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더 먹지 그러나?"
"많이 먹었습니다."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신운성이 식사를 멈추었다. 보나르는 손자를 챙겨주는 할아버지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이에 황송해 할 무렵, 한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술을 가지고 들어온 소녀는 지금까지 시중을 들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나?"
슬쩍 곁눈질해서 살폈을 뿐인데 대뜸 질문을 던지는 보나르였다.
"네?"
"마음에 들면 데려가면 어떤가? 부인으로."
"그게......."
신운성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혈연을 맺자고 이러는 거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척 보였다. 혈연을 맺어 강력한 전사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 혈연이 생기면 보나르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은 신운성까지 자연스럽게 배제하게 될 테니 최소한 강력한 적이 생기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여기에 신운성이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면 금상첨화였다.
'어떻게 할까?'
혈연. 맺는다면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부인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권력을 위해 혈연을 여기 저기 맺다보면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서로 적대하는 세력 중간에 끼어 집안에서 여자들끼리 반목하는 상황을 매일 봐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신운성은 일단 거절하기로 했다. 유드족의 족장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유드족에는 이미 관계를 맺게 된 카딘이 있었다.
'그라면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갈 테니까. 차라리 카딘과 족장이 연결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난 카딘만 도우면 되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 신운성은 팔불출처럼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헤헤, 지금 부인이 둘이나 있습니다. 또 데려가면 혼납니다."
잡혀 사는 남자인 척해버렸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멍청하다 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운성이 노리는 바였다.
사람들이 방심하게 만드는 것.
힘은 뛰어나지만 머리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이런 경우 의견을 내면 무시당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힘쓰는 것에 관해선 사람들이 신뢰하며 권력을 조금 나눠주는 것에 민감하게 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힘이 없어도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고 똑똑하면 자신의 자리를 노릴 가능성이 있기에 경계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곁에다 놓고 부려먹고 싶어 하는 것이 신운성이 아는 권력자들의 특징이었다.
"자네가 하겠다고 하면 누가 말리겠나?"
"그래도 안 됩니다. 밤에 쫓겨나고 싶지 않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과 비례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지는 말. 보나르는 허허 웃더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런가? 하지만 벨로트족의 아이도 받아들이지 않았나?"
"아직 건드려보지도 못했습니다. 시녀로 받아들인 거라서요. 그리고 저랑 상관없이 부인들이 받아준 겁니다."
날 공략하려면 부인들의 환심을 사라! 이런 뉘앙스에 보나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이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고 보나르는 고급 옷감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앞으로도 부족을 위해 힘써 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선 신운성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밤이 깊어지자 서은하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후 다른 여자 한 명과 같이 들어왔다.
"오늘은 얘하고 자."
벨로트족의 아미야는 서은하에게 얘기를 들어 완벽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신운성이 보나르와 식사를 하는 동안 몸을 깨끗하게 씻고 향유를 바르고 조용히 기다렸다.
"응."
이미 한 차례 교감이 있었기에 슬퍼하거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서은하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편히 살아가기 위해선 권력을 가져야 했고 빠르게 권력을 가지는 길은 강한 이들과 혈연을 맺는 것이었다.
강한 자들이 한 가족으로 묶이게 되면 더 강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고 골치 아픈 일이다. 하지만 서은하는 신운성을 믿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그만한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구에서의 가치관이 점점 무너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것을 슬퍼할 틈은 없었다.
단 둘이 남게 된 신운성과 아미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미야는 신운성이 싫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신운성에게 이질감을 느끼긴 했지만 동시에 강한 남자라는 인상이 박혀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시작된 감정은 점점 뜨거워졌고 결국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호안바트가 아미야를 선택해 보냈기에 일은 잘 풀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신운성은 조용히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살짝 힘을 주니 스르르 옷이 흘러내리며 몸이 드러났다. 희미한 불빛을 받은 검은 피부는 빛나고 있었다.
신운성이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아미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안겼다.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신운성에게 전해졌듯 아미야는 자신에게 없는 단단함을 느꼈다.
신운성이 평소에 아미야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품었다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탐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약에 의한 것. 몸이 뜨거운 것에 비해 이성은 차가웠다.
"넌 세 번째야. 알았지?"
"네."
아미야는 서글퍼하지 않았다. 세 번째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 세상의 여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순종적인 대답과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그것을 느낀 신운성은 호감을 느꼈다.
'그래, 일단 관계를 맺게 된 이상 행복하게 해주겠다.'
정략에 의한 것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생활은 불화를 낳게 되고 정략혼을 통해 맺은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
카딘이 틈만 나면 동생인 페르나를 챙기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
신운성의 눈은 아미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미야는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처럼 꼼짝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신운성의 입술이 입술을 찾았다.
"흡."
갑작스러운 입맞춤. 아미야는 놀라서 어찌 할 줄 몰랐다. 밤일에 대한 교육은 받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교육일 뿐. 직접 경험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미야는 거친 손길에 의해 옷이 벗겨지면서도 반항하지 않았다.
모든 옷이 벗겨지자 검은 피부의 몸이 드러났다. 살짝 켜둔 불빛이 아니었다면 어둠과 구분이 가지 않을 모습이었다.
신운성은 옷을 벗고 아미야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피부가 맞닿게 되자 느껴지는 감각에 아미야는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들끓는 느낌에 이성이 녹아내리고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신운성을 끌어안고 무엇인가를 갈구했다.
신운성은 그런 아미야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진짜 뜨거움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
신운성은 일찍 호안바트를 찾아가 인사했다.
"이제 장인어른이라 부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된 건가? 잘 부탁하지!"
호안바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신운성이 아미야를 다른 곳에 보내게 되면 어찔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제가 너무나 쉽게 해결된 탓이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호안바트의 말에 신운성은 웃으면서도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것은 반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요구하겠다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했다.
혈연을 맺었으니 신뢰 관계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지.'
혈연을 맺었다고 권력이 그냥 굴러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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