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 회: 인간관계 -- >
아침을 먹은 후 신운성은 전사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집은 그래도 제대로 찾아왔네!"
오랫동안 보지 않은 사이에 전사의 수는 좀 줄어 있었다. 전투로 인한 사망은 어쩔 수 없는 일. 항상 허허 웃으며 반겨주던 사드하가 없다는 사실이 허전하게 다가왔다.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느낀 신운성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이들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이들이 이제 나와 함께할 사람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웃는다. 죽은 사람의 빈자리가 허전하긴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힘을 뭉쳐야 할 때. 신운성은 전사들과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아. 사막에서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발전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전사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 그럼 실력 한 번 봐도 될까?"
"살살해주시죠."
엄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준비를 마친 전사와 신운성은 공터에서 마주했다. 두 사람은 나무로 된 무기를 들고 섰다.
"간다!"
전사는 공격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빈 공간을 가로지른 목검은 목을 향해 찔러졌다. 신운성은 가볍게 방패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막아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어서 나무로 만들어진 메이스가 휘둘러졌다. 하지만 먼저 찔렀던 것은 허초. 검은 메이스를 살짝 쳐내더니 팔뚝을 향해 독사처럼 달려들었다.
사막으로 떠나기 전의 신운성이라면 피하지 못할 공격.
그러나 신운성의 눈은 전사의 움직임을 보고 이미 공격을 예상한 상태였다.
스윽.
아주 슬쩍 몸을 돌리는 것으로 목검을 피함과 동시에 나무 메이스로 전사의 복부를 슬쩍 쳤다.
"진짜 많이 늘었군."
전사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무기를 다루는 솜씨만 놓고 본다면 신운성이 자신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오러를 넣은 무기로 전투를 벌인다면 양상이 달라질 순 있었지만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오러를 이용한 대련을 하는 것은 금지 되어 있었다.
부족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어 분쟁을 대련이란 명목으로 풀어버리는 것을 방지함은 물론 진짜 무기를 사용해 대련한 나머지 부상을 입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전사가 물러나자 또 다른 전사가 대련을 원했다. 창을 든 전사는 검을 든 전사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돌격하면 된다지만 창이란 무기가 길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슬쩍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공격이 가능했고 다리를 공격해 접근을 막기도 했다.
방패를 들고 있다 해도 다리까지 완벽하게 가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리는 쉽게 좁히지 못했다.
창을 든 전사가 다리가 느렸다면 작정하고 돌진하면 되지만 속도도 꽤 빨랐다.
결국 한참동안 빙글빙글 돌며 추격전 비슷한 대련을 벌인 끝에 신운성이 이길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사막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웃음에 전사들은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오러는 어떤가?"
"이거요?"
신운성은 오러를 일으켰다.
푸스스.
손에서 빛나는 순간 메이스의 손잡이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툭 떨어지는 메이스를 따라 전사들의 눈이 떨어졌다. 이내 시선은 다시 빛나는 손을 향했다.
오러를 머금은 검처럼 환하게 빛나는 손을 보며 전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보다 강하다.'
빛의 밝기가 전사들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밝았다. 전사들은 신운성이 자신들보다 더 강한 존재임을 그제야 인식했다.
신운성이 강해졌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다. 유드족은 자신들의 전사 중에서 오러 마스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강자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은 안정을 안겨준다. 전쟁 중인 상황이라 강자의 출현이 주는 기쁨은 더욱 컸다.
상인이었던 마르시드는 신운성이 강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나섰다.
'설마 그렇게까지 강해질 줄이야.'
전사들의 대장 사드하에게 부탁할 때도 이렇게 빨리 강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마르시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혼란의 시기에 권력은 부를 지켜주고 키워주는 가장 강한 원동력이 된다. 상인들이 괜히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것이 아니었다.
투자를 했다. 과실은 다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내버려두면 애써 투자한 것은 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관리해야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신운성을 다시 만난 마르시드는 공손하게 대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아래였다고 하나 이제는 당당한 전사였다. 또한 미래에는 전사들의 대장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신운성을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냥 편히 대해주시죠."
"아닙니다. 예전에야 고용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그냥 편히 대한다면 더 친근하게 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다. 예전에 좀 도와줬다는 것을 빌미로 계속 아랫사람 취급하면 속으로 내심 언짢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처음에는 예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서 기분 좋을지 몰라도 그것이 계속 유지된다는 법은 없다.
"이거 참......."
신운성이 약간 부담스러워하자 마르시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친분을 포기하고 마음의 빚을 지워두는 것에 성공한 까닭이다. 하지만 마르시드는 신운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신운성은 슬쩍 웃었다. 지혜가 100이 되어 문일지십이 되자 사람들의 행동에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빨라졌다. 과거에 자신을 밑에 두고 부렸던 마르시드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가 주는 의미는 이미 파악한 상황. 신운성은 장단을 맞춰주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줄건 주고받을 건 받을 사람이니.'
신운성은 마르시드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의 정이나 과거 관계를 들먹이며 이용하려 했다면 단번에 내쳤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시드는 그러지 않았다. 다시 만나서 한 일은 신운성을 인정하고 관계를 새롭게 맺으려 하려는 것이었다.
관계를 새롭게 맺는다는 것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소리다. 즉, 신운성의 가치만큼 대우를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쓸모없어지면 멀리하겠지만 그건 피차일반.'
오히려 이런 사람이 거래를 하기에는 더 좋다. 서로 이득이 안 된다면 냉정하게 돌아서지만 이득이 있다고 판단되면 계속해서 우군으로 남아줄 확률이 높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지.'
이런 상대가 오히려 마음의 부담은 덜하다. 약간의 정이나 은혜를 빌미로 사람을 압박하는 부류가 가장 까다롭다. 은혜를 갚지 않는다며 사방에 떠들고 다니면 형성했던 인간관계가 흔들리며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참 마르시드와 대화를 한 신운성은 적당히 돌려보냈다. 마르시드 또한 신운성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호의 상태로 만들어두고 싶었던 것이지 무엇인가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평소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찾아온다면 상대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마르시드는 아무런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운성을 찾았다.
마르시드는 목적을 이룰 수도 있었으나 상대가 신운성이기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신운성이 마르시드를 적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르시드가 돌아간 이후 찾아온 것은 벨로트족의 전사들을 통솔하던 호안바트였다.
"이 친구 이거 대단한 사람이었군.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감쪽같이 숨겼나?"
마르시드와 달리 호안바트는 존대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호안바트는 전사들을 통솔하는 입장이었고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이었다. 쉽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미야는 잘 있나요?"
"그래, 잘 있다네. 잊지 않고 물어보니 기분이 좋군."
"잊을 리가요."
호안바트가 혈연을 맺기 속셈으로 붙여주었던 여자를 잊을 리가 없었다.
"그래, 언제 데려갈 건가?"
"오늘 보내주시죠. 하지만 시중 두는 시녀의 신분이란 건 아시죠?"
"물론이네. 대신 잘 돌봐주길 바라네."
호안바트의 용건은 간단했다. 용건이 끝나고 잠깐 잡담을 나눈 뒤에 바로 돌아갔다.
이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금까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던 이들이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식사 초대는 바로 유드족 족장의 초대였다.
족장 보나르의 초대는 일단 선물을 안겨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받으시지요."
고급 옷감과 향신료를 가져와 다짜고짜 선물부터 안겼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것을......."
"사막에서 한 일에 대한 감사 인사입니다. 그리고 족장님께서 식사를 함께 하고자 청하셨습니다. 편한 시간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찾아뵙도록 하죠."
약속은 금방 정해졌다. 이후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니 아미야가 도착해 있었다.
"이 여자는 뭐에요? 시녀라뇨?"
"벨로트족 전사 대장의 딸이야."
"그래요?"
아미야를 감시하고 있던 페르나는 화내거나 하지 않았다. 시녀라고 하지만 미래의 아내 자리를 노리고 보내진 여자였다. 질투를 할 수도 있었으나 페르나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 아내로 받아들일 건데요? 원래 이런 경우에 너무 오래 시녀로 두면 관계가 나빠져요."
페르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페르나에게는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강한 남자들은 아내를 많이 두었다. 강한 남자와 혈연을 맺길 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미야가 보내진 것은 자신의 남자가 그만큼 강한 남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질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었다고 알았을 때 느꼈던 슬픔은 질투를 잠재웠다.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아.'
페르나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본 신운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뒤에 서있던 서은하가 살짝 등을 밀어주었다.
슬쩍 돌아보니 서은하는 눈을 찡긋했다.
'바보 같이.'
질투가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서은하 또한 문일지십의 보유자. 페르나의 뜻을 읽었기에 허락한 것이었다. 남자를 공유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더 큰 세력을 이루기 위해선 여자를 많이 얻는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길을 두고 배신당할 위험이 큰 길을 걸으라고 할 순 없었다. 지금 세상에서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친다한들 신뢰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먹힐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운성은 페르나를 꼭 안아주었다.
"여자가 많아지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
페르나를 향한 질문이었지만 서은하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괜찮아요. 강한 남자의 여자가 된 운명이니까요."
신운성은 슬쩍 등을 토닥여준 뒤 서은하를 바라보았다.
서은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질투나 슬픔도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강한 신뢰뿐이었다.
'오빠 믿어.'
강렬한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빛을 읽은 신운성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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