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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69화 (69/109)

< -- 69 회: 인간관계 -- >

길고 긴 여정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점점 줄어들며 습기를 살짝 머금은 촉촉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다 왔다."

미칠 것 같은 여정이었다. 신전을 나선 이후 태양의 위치를 보고 계속 남하했다. 길을 모르니 무작정 걸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중간에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사막의 끝이 보이니 정신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뜨겁게 몸을 달구던 사막의 열기가 점점 식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 심해지도록 다리가 앞으로 나가갔다.

달린다. 심장이 뛴다.

한 발 앞으로 갈 때마다 더 가까워지는 사막의 끝.

공기마저 상큼해지는 기분에 머릿속에 희열이 분수처럼 화려하게 솟구친다.

"빌어먹을 안녕이다!"

사막의 끝에 도달한 외침이 퍼져나갔다. 신운성의 눈은 사막을 한 번 쓱 노려보고는 돌려졌다.

"가자."

'집으로'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본체는 지구에 있는 복제품일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다면 돌아갈 집 따윈 없었다.

'집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과거를 바라보며 잃은 것을 아파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며 뭐든 손에 잡을 것을 선택한 자의 눈은 사막의 열기를 담았는지 뜨겁게 불타올랐다.

남부 부족 연합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루앙과 가르농을 비롯한 중요 거점을 빼앗긴 뒤로 계속해서 주변의 땅을 빼앗겼다. 한 번 땅을 차지한 북부인들은 아예 정착할 생각으로 개발에 착수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많은 땅을 빼앗긴 뒤였다. 북부에서는 서로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고 남부로 계속 사람들을 보냈다. 농민들 또한 남부에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권력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땅을 나누어 준다는 달콤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것도 아닌 것으로 약속했음에도 사람들은 움직였다.

함께 싸워서 이득을 분배하자는 말은 욕망을 일깨웠다.

꾸역꾸역 남부로 내려오는 북부인들은 자신의 땅을 받았다.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정말 티끌 같지만 자신의 땅을 가진 지주가 된 북부인들은 이를 악물고 전투에 임했다. 죽으면 모처럼 받은 땅도 끝이었다. 만약 성황군을 비롯한 귀족들이 무리한 전쟁을 계속 일삼았다면 땅이고 뭐고 다시 북부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매우 느렸다. 더구나 땅을 받은 이들은 정착하게 내버려두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주들은 더 악착같이 수비에 임했다. 공격하러 가는 것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니 싫지만 방어는 목숨을 걸고 했다.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하면 목숨 걸고 싸웠던 것이 허사가 되니까.

땅은 생명이다.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손바닥만한 땅이 없어 소작을 하고 매번 시달리던 것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북부인들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남부 연합은 하염없이 밀려났다. 처음부터 방어라는 개념이 없던 남부인들이었다. 유목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땅에 정착한 삶을 살았다면 건축 기술이 뛰어났겠지만 유목을 하다 보니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대신 부대의 기동력 하나만큼은 월등했다. 그래서 전장을 선택하기도 유용했다. 보급 문제로 골치 아플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땅을 점령해서 방어 시설을 갖추는 이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적이 깊게 파고들어야 뒤통수를 치든 뭐든 할 텐데 아주 느긋하게 점령해오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운성은 쉽게 남부 부족 연합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저 자식들."

북부인들의 요새화된 지역이 멀리 보였다. 매일 같이 기사와 성기사들이 말을 타고 주변을 순찰하며 땅을 지켰다. 높은 성벽은 야습 따윈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하듯 우뚝 선 상태였다.

절로 흘러나온 욕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닿지 않을 감정을 내뱉은 신운성은 하염없이 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가르농까지 빼앗기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남부인들이 당한다.'

보급선이 긴 군대는 위험부담도 크다. 하지만 아예 장기적인 전쟁을 노리고 안정하는 식으로 내려온다면 얘기가 달랐다. 목책이 아닌 돌로 성벽을 쌓았기에 공략도 쉽지 않다. 사람들의 거주지 또한 드문드문 떨어져 집을 지은 형태가 아니었다.

집단으로 목책을 만들어 만든 작은 요새 형태로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이쯤 되면 땅을 차지한 농민들을 습격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시간이 좀 있다는 건가.'

북부의 전략은 장기전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낼만한 전쟁이 아니니 천천히 간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부인들이 모조리 남부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남부인들의 땅을 전부 차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점령 방식이라면 방어할 병력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인구가 필요했다.

인구는 하루아침에 늘어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후에도 아이들이 자라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도 죽지 않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중에는 이것이 어렵다. 점령에 필요한 인구를 만드는 것이 어려우니 결국 장기전으로 가면 싸우다 지쳐 적당한 선에서 멈추게 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인구가 채워져 다시 싸울 힘을 얻을 때까지.

'북부인들이 어느 정도 힘이 빠지면 쉬겠지. 아직 반격을 준비할 시간은 있어.'

지금은 계속 점령지를 늘리고 있는 것 같아도 무한할 수 없는 걸 아는 신운성은 표정을 굳혔다.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땅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영원히 빼앗기는 것도 아니다. 공성은 불리하지만 사막 부족을 통해 세력을 불리고 있는 상황에서 적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얼른 돌아가자.'

남부 부족을 찾는 신운성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하크! 잘 돌아왔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돌아오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카딘이었다.

카딘은 처음에는 신운성이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벨로트족이 찾아오고 신운성과 서은하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기뻐했다.

"네 덕분에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

연합의 입장에서는 정말 큰일을 해낸 신운성이었다. 조금 늦었다면 사절단이 해냈겠지만 그래도 빠르게 벨로트족을 끌어들인 것은 칭찬 받을 일이었다.

"페르나는 잘 있나요?"

"그래, 잘 있다. 얼른 가봐."

카딘은 얼른 신운성의 등을 떠밀었다.

페르나의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종되었다는 말에 가슴 한구석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맛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정이 들었음을 깨달은 페르나는 울고 말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과부가 된 것도 슬프지만 신운성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심장이 자꾸 슬프다며 아파했다.

그러다 벨로트족이 찾아왔고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을 한바탕 쏟았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기쁨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크!"

제비처럼 날아 하크의 품에 안긴 페르나는 정신없이 키스했다. 따스한 피부의 촉감이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진짜임을 증명해주었다.

재회의 기쁨이 심장에 아로새겨졌다.

환대를 받은 신운성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집에 온 느낌이네.'

키스를 받은 이후에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러 나간 페르나의 뒷모습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부드러운 촉감이 팔에서부터 피어났다. 촉감의 원인은 서은하의 가슴이었다. 팔을 꼭 끌어안고 열정적인 눈으로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키스가 이어졌다. 서은하는 페르나의 숨결을 지워버리려는 듯 열정적이었다. 숨이 가빠질 때까지 격렬한 키스를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말은 필요 없었다.

서은하가 느꼈던 감정이 질투임을 알기에.

신운성은 서은하를 살짝 안아주며 안심시켜주었다.

"언제나 옆에 있어줄 거지?"

"응."

"그래, 그럼 씻고 쉬자."

사막의 묵은 먼지를 씻어낸 후 즐긴 식사 그리고 수면은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신운성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식사 이후 바로 잤더니 일어나는 시간이 애매했다. 더 잘까 싶어 눈을 감아도 한 번 잠에서 깨어나니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더 자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일어나 한 일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는 것. 잠든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보니 밤하늘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검은 천장은 아름다웠다. 사막에서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진짜 내 고향 밤하늘.'

신운성은 지구에서의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는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이름을 버릴 생각도 없고 기억을 통해 얻게 된 경험들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 스스로를 지구인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난 지구인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이야.'

정착하기 위해선 세뇌든 뭐든 해야 했다. 마음이 정착하지 못하면 몸이 구속 되어 있어도 방황하는 법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몇 번이고 다짐을 하며 떠올린 것은 이 세계에서의 추억이었다. 추억보다는 악몽 같은 기억이 훨씬 많았지만 그래도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배를 타고 움직이던 일. 서은하와 함께 첫날밤을 보낸 일. 아비트에서의 부부와 같은 삶.

힘들었던 상황들만 빼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뭐하나?"

한참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딘이었다.

"잠이 빨리 깨서요. 그런데 어쩐 일입니까?"

"나는 이제 일 끝나서."

"그렇군요. 피곤하시겠습니다."

"말도 마."

신운성의 옆에 앉은 카딘은 많은 전사를 거느리는 위치로 올라섰다. 대장은 아니었지만 휘하에 많은 전사가 있어 무시할 수 없는 계급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어. 연합인지 뭔지 정말 때려치우고 하고 싶을 정도로."

치안을 담당하는 일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어느 한 쪽의 편만 들어선 안 된다. 공정하게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요구되기도 했다. 분쟁의 처리를 잘못할 경우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이어서 내부에 적을 만드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치안 담당자는 신경을 많이 써야만 했다.

남부인들은 겁준다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따를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드하님은 뭐하고 있습니까?"

불평을 듣다가 툭 던져진 가벼운 질문은 침묵을 불러왔다.

심상치 않은 침묵에 신운성은 불안을 느꼈다.

"후우....... 돌아가셨다. 전투에서."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말에 신운성이 충격을 받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좀 안타까울 뿐이었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다시 못 본다고 해도 별로 아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기억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카딘이 먼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조금만 쉬려고 했는데 많이 쉬어버렸네요. 이상하게 쉬어도 계속 두통에 뒷골이 당기면서 힘드네요. 다른 작품도 써야하는데 큰일입니다. 지금 한 편도 겨우 써내는 형편입니다. 당분간 연재 시간과 주기, 연재량 모두 불규칙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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