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운의 기어-67화 (67/109)

< -- 67 회: 밝혀진 정체 -- >

진실은 잔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받아들이려 하질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이미 전해진 상태. 의식은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이성이 그것을 막았다.

'복제품이라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무척이나 질 나쁜 농담으로 들렸다.

모든 기억이 생생한데 자신이 복제품이라니.......

신운성은 무릎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이미 내 인생은 굴러가고 있다고? 지구에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곳에는 이미 본체가 원래 살아야 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의심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네 말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믿으라고? 그냥 말해주면

'아 예 그렇습니까? 하하하!'

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냐!"

- 분노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현실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손해일 뿐입니다.

"크크크크크크크."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에 보이는 징조처럼 웃음이 흘러나왔다. 분노를 머금은 웃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소롭게 여기며 비웃었다.

"손해?"

-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화산은 폭발하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을 가졌던 신운성은 가까스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해봐."

- 지금 거부한다면 모두 처음부터 시작하게 될 뿐입니다.

"뭐?"

- 라스틴님께서는 저에게 정보를 주시며 당신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당신과 당신을 비롯한 지구인들을.

순간 신운성의 뇌리에 스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럼 설마 내가 좀비였단 거냐?"

- 정확히 말하면 좀비를 변형시킨 거죠. 라스틴님이 주신 정보와 힘으로 지구인 '신운성'으로 재구성된 겁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다른 세계의 존재가 아니었던 거군."

- 맞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던 것. 다만 기억과 형태만을 지구에서 빌려온 것이죠.

"왜 그런 거지?"

- 현재 당신은 그것을 알 자격이 없습니다. 라스틴님을 받아들인다면 자격이 생기지만 그 외에는 자격이 없습니다. 일단 당신의 손해란 이유를 밝히죠. 여기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에게 돌아갈 것은 죽음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죠. 죽음의 숲에서부터.

"그래?"

확실히 손해였다.

'내가 죽고 또 다른 내가 다시 그 지옥에서 그 짓거릴 하겠지? 그리고 분노해서 또 죽고 또 그 짓거릴.'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새롭게 죽음의 숲에서 태어날 객체는 자신과는 분명 다른 개체이다. 그러나 같은 기억을 가졌다.

'기억이 같으니 동일인....... 은 아니군.'

같은 기억을 공유한 것일 뿐이었다. 어차피 현재 모습도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을 본체와는 전혀 다른 객체가 되었다.

'그래, 내가 본체든 복제든 무슨 상관이냐. 앞으로가 중요한 거지.'

분노와 혼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신은 이미 새로 개척할 미래로 향하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신운성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세상이 싫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 그럼 '나'라는 존재는 끝을 맞이한다. 물론 같은 과거를 가진 다른 존재가 또 다시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겠지만 그것은 '현재의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만약에 라스틴님이 이 세계를 다시 되찾는다면 나에게 생길 보상은 뭐지?"

- 무궁무진하죠. 권력을 원하면 권력을. 영생을 원한다면 라스틴님 곁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노리고 있던 것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포기해야만 했다.

- 그건 안 됩니다. 몰래 정보를 빼낸 거니까요. 대신 이 세상에서의 기억을 본체에 주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구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신운성은 달리 생각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고 했지?"

- 그렇습니다.

피식. 신운성은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의미가 없었다. 돌아갔는데 할아버지의 몸이라면? 이 세계에서 파우론을 몰아내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이 세계의 신운성이 더 오래 살아 돌아갈 몸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

'돌아가지 않는다.'

신운성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지구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아예 지웠다.

이성의 선택에 의한 이별에 가슴에 슬픔이 스며들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상실감에 어깨가 쳐졌다.

"후우........"

길고 긴 한숨을 토해 감정을 추스른 신운성은 다시 눈을 빛냈다.

'지금의 나에게 최대한 이익이 남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대를 믿을 수 없긴 하다. 하지만 믿지 않는 것도 그렇다.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작정하고 속이는 것이라면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

'힘이 없고 아는 것이 없는 게 죄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보니 정보의 허실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진실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정신을 쏙 빼놓을 거짓된 정보로 속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운성에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좀 더 힘을 키우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해.'

하지만 배움이란 쉽지 않다. 지금만 하더라도 전쟁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좋든 싫든 기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가진 것을 활용해야만 했다. 상대가 전해준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며 신용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부정하며 외면하는 것도 현명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싸우는 것.'

신운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신전을 찾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치면.'

답은 하나였다. 싸움에 있어 불리해지면 항상 도망치는 신운성을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라 그거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야. 불필요한 존재라면 날 이렇게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 퀘스트도 주지 않고 그냥 죽여 버리면 될 테니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유용하다는 의미.'

쓸모가 없으면 속일 이유가 별로 없다. 속여도 남는 것이 없으니까. 거짓말을 연습하거나 유희라면 모를까 생기는 것도 없이 남을 속이는 행위는 낭비였다.

'좋아. 그렇다면 더 성공해주겠어. 지금은 더 강해지는 거야.'

상대가 속이고 있을지 몰랐지만 선택에 변함은 없었다. 신운성은 좀 더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많이 휘둘렸지만 냉정을 되찾고 생각하며 많이 회복되었다.

"좋아. 받아들이겠다."

- 현명한 선택입니다. 라스틴님의 축복이 그대의 앞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신전을 빠져나왔다.

"오빠, 그 말 진짜일까?"

"진짜일수도."

"그럼 가짜일수도 있는 거네?"

"그렇지."

서은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진짜라면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가지 않아.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정말?"

순간 표정이 밝아진 서은하가 팔을 붙잡았다. 기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돌아가고 싶던 거 아니었어?"

"하지만 정말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악몽일 거 같아. 여기서의 일을 그대로 기억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거잖아? 그리고 거기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돌아갔더니 할머니? 그런 거면 뭐......."

"가족은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신전에서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린 기억만 가진 거라며."

맞는 말이었다. 타인의 기억이 주입된 것뿐이라면 엄연히 말해서 가족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러네."

"그럼 이제 난 정말 한나가 되는 걸까?"

"그래도 난 은하라는 이름이 더 좋은데?"

"왜?"

"우리의 시작점이잖아."

"시작점......."

서은하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그것도 그러네. 맞아."

서늘한 통로에서 서은하는 품에 안겨들었다.

"오빠."

"응?"

"나 아이 갖고 싶어."

갑작스러운 얘기였다. 하지만 서은하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젠 여기서 살아야 하잖아. 전쟁도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러니까 오빠 아이 갖고 싶어. 우리가 살았던 걸 증명해줄 유일한 증거를 갖고 싶어."

아이.

세월이 흐르면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또 아이를 낳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삶을 반복한다.

2세대 3세대까지는 자신의 선조를 기억할 순 있다. 하지만 그 이상 넘으면 대다수는 자신들의 선조가 누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도 서은하는 원했다.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가지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신운성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것은 모두 멀게만 느껴졌다.

"여기서 사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우리가 낳은 아이가 왕이 되면 어떨까? 막 세상 바꾸고."

"그것도 재미있겠네."

"그치?"

"하지만 지금은 좀 그렇다. 사막이잖아. 애 잘못되면 어떻게 해?"

"그러게.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얼른 가야겠다."

가족계획은 후다닥 끝났다.

이젠 사막에서 벗어나는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은 통로를 지나쳐 다시 되돌아 나왔다. 그러면서 도마뱀인간들의 시체를 보았다.

"아, 그런데 이것들은 뭔지 못 물어봤네."

"물어볼 필요 있을까?"

"있어. 정보는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아."

신운성은 다시 되돌아갔다. 그러자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그들은 사막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은 존재이기에 그렇게 만들었죠. 영원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키는 존재로 만든 겁니다.

'이걸로 하나 확실해졌군.'

파우론도 그렇지만 라스틴은 결코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