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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62화 (62/109)

< -- 62 회: 밝혀진 정체 -- >

벨로트족과 만난 첫날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고기를 먹고 웃으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룬타우의 아로크족 전사와 나누었던 대화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갔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건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건물에 흥미가 있다고?"

"네, 지금 저기도 그렇고 신기해서요. 위에 나온 부분은 얼마 안 되는데 사람은 많은 것 같거든요."

"보여주고 싶지만 부족의 비밀이라서 안 되고. 대신 다른 부족의 건물이라면 보여줄 수 있지."

"그래요? 볼 수 있을까요?"

"그럼. 따라 오라고."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이미 한 번 들어가 본적이 있는 곳이었다. 기룬타우의 아로크족이 살던 건물이었다. 내부를 이미 알지만 신운성은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며 안을 살폈다.

"그런데 이렇게 안을 보여줘도 되요? 건물이 다 같은 구조면 비밀이 알려지는 거잖아요."

"건물이라고 다 같은 구조는 아니니까."

벨로트족의 전사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멈추고는 웃었다. 무엇인가 의심스러웠지만 신운성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나저나 이런 건물이 얼마나 더 있는 거죠?"

"모르지. 대부분 부족들은 이렇게 건물 안에서 지내."

"그렇군요. 그럼 물이나 그런 것이 부족하진 않나요?"

"그건 말해줄 수 없군."

'이것도 비밀인가? 참 비밀도 많아.'

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자원이 부족한 사막이니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막의 손님이라고 이렇게까지 환대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교역을 하면서 남았던 풍습이 아니라면 보자마자 한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을 수도 있었다.

신운성은 더 묻지 않았다. 너무 캐묻다보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건물을 둘러본 신운성은 이후 다시 벨로트족의 근거지를 향해 움직였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여정이 끝나자 호안바트가 건물 밖에 나와 환대해주었다.

"건물은 잘 보았는가?"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잘 된 일이군."

"그런데 이렇게 나와 계신 걸 보면 제가 한 제안에 대한 결정이 끝난 건가요?"

"그렇다. 우리 벨로트족은 남부인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호안바트의 말에 신운성은 기분이 좋아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러. 방심을 끌어내기 위해 거짓말 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는 신운성은 호안바트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뭡니까?"

"그건 자네들이 여기 남는 거야."

"네?"

"우리 부족의 근거지를 알게 된 이상 쉽게 보내줄 수는 없네. 다른 근거지를 찾게 되기 전에는 말이야."

부족의 위치를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상당했지만 신운성에게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남겠습니다."

"대신 우리 부족의 여자와 결혼해 일족이 된다면 보내줄 수도 있지."

포기하려고 한 순간 호안바트가 한 제안은 신운성과 서은하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어떤가? 하겠는가?"

"저는 이미 아내가 둘이나 있습니다."

"둘이나?"

"네, 여기 한나와 부족에 남겨둔 둘째 부인이 있습니다."

호안바트는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둘이나 부인이 있다라."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중얼거리던 호안바트는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이가 몇이나 되나?"

"아이는 아직 없습니다."

그러자 호안바트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셋째 부인으로 내 딸을 받아들이게나."

"네?"

"어떤가?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저 궁금해서 그럽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조건을 거신 겁니까?"

여자를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 챙길 수는 없었다. 여자를 거느린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호안바트의 딸과는 면식도 없었다. 즉, 정략결혼이란 소리였다.

'정략이라면 뭔가 노리는 게 있을 텐데. 뭐지?'

신운성이 경계하자 호안바트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사막인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들다네. 그래서 입을 줄이기 위해 싸우지. 여자들은 부족의 미래와 연결 되었으니 포기할 순 없지만 남자는 싸워서 계속 약탈해야만 해. 교역을 나가기도 하지만 교역 결과가 좋아도 다른 부족의 전사들과 어차피 싸워야만 하지."

호안바트의 입에서 사막인들의 생활상이 전해졌다.

"나는 내 딸이 고생하는 걸 바라지는 않네. 북부인보다는 그래도 남부인들이 사막인들에게 조금 더 관대한 편이지. 그러니 딸을 보내려는 거네. 입도 줄이고 관계도 맺고. 또 잘하면 자네를 통해 내 가족이 남부에 정착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숨김없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호안바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정직하네.'

그냥 말만으로는 신뢰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 어렵기에 호안바트는 혈연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혈연을 맺게 되면 신운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받아들인다면 앞으로의 행보는 더욱 쉬워질 터였다. 전사들의 대장을 혈연으로 묶어놓는 것은 굉장히 유용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운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 아내는 충분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신운성은 서은하를 생각하면 여자를 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받아들인 페르나와의 관계도 서먹한 판에 또 다른 여자를 받아들인다면 머리가 터질 지도 몰랐다.

'어쩌면 옛날 영웅들은 집에 들어가면 골치 아프니까 전쟁을 핑계로 싸우러 다녔을지도 모르겠어.'

실없는 상상을 하며 신운성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각, 서은하는 신운성의 곁에 누워 속삭였다.

"오빠, 나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이미 오러 연공법도 배웠는데. 사막만 안 벗어나면 죽진 않잖아. 여기 남아서 수련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신운성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평생 벨로트족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근거지로 이동하게 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는 조건만 걸린 상황이었다.

"벨로트족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 싫어도 움직이게 될 거야. 그땐 우리도 자유로워질 걸?"

"그래도 조금 더 빨리 신전을 찾는 편이 좋잖아."

"벨로트족하고 일이 잘 풀렸으니 조만간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슬쩍 끌어당기자 서은하는 더욱 깊이 품으로 파고들며 키스해왔다.

"나 오늘 괜찮아."

부드러운 입맞춤 끝에 이어진 속삭임에 신운성의 가슴은 불타올랐다.

사막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열풍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이로 인해 밖에서 보초를 서던 전사들은 괴롭고 긴 밤을 보내야만 했다.

벨로트족의 사절단들은 신운성이 만들어준 지도와 편지를 가지고 떠났다. 편지는 남부 부족 연합에게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는 것과 벨로트족과 합의한 일을 알리는 내용이었고 지도는 루앙을 중심으로 가르농까지 이어진 지형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지도는 전쟁 상황에 따라 어찌 변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최대한 서쪽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알았다."

벨로트족의 사절단에는 족장의 아들이 책임자로 내정되었다. 족장의 아들과 그의 심복들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는 떠났다.

한 무리의 전사들이 떠나고 나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벨로트족은 끊임없이 주변을 수색하며 혹시 모를 적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기다리는 것 외에 할 것이 없어진 신운성은 수련과 정보 수집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심심하면 이거나 씹지 그러나?"

이제는 할 일이 없어 한가한지 호안바트가 다가와 뭔가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이거? 환초라는 거지. 씹으면 재미있어. 다른 지역 사람들 표현을 빌리자면 술에 취한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걸 느낄 수 있지."

"그래요?"

신운성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멀리하는 것이 건강에 좋았다.

"거 참. 자네는 정말 무슨 재미로 사는 건지."

"부인이 있으니까요. 재미는 밤에 보면 됩니다."

"그건 그렇지. 낄낄."

어울리지 않게 웃는 호안바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털털한 면이 강했다.

"그나저나 혹시 이 근처에 다른 건물 같은 건 없나요?"

"아, 새로운 건물을 만드는 것에 흥미가 있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요새죠. 그래서 많은 건물을 봐두고 싶습니다."

"사막의 건물들은 대부분 땅에 묻혀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내부라도 봐두면 뭔가 또 건지는 게 있겠죠."

잠시 턱을 쓰다듬던 호안바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쉽게도 이 근처에는 없어. 좀 멀리 간다면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족이 차지했을 가능성도 있고. 좀 위험해서 데려가긴 힘들다."

어렵다는 말에 신운성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사막의 서쪽에는 바다가 있습니까?"

"바다? 있지."

"그럼 그곳에도 코벵 같은 도시는 없나요?"

"없어."

"왜죠?"

"대륙의 서쪽은 모두 사막이니까. 항구를 만들 이유가 없지."

"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신운성은 얼이 빠졌다.

"지금 이렇게 보는 사막도 크지만 서쪽의 사막은 더 커.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우리도 잘 몰라. 다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서쪽은 완전히 사막이란 거야. 북부든 남부든 서쪽으로 가면 사막만 나올 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전쟁 때문이다. 라스틴과 파우론의 전쟁. 두 신의 대리자들이 싸워서 세계가 파멸할 뻔했던 거라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기록에 없어서 모르겠다."

'신의 대리자라고?'

새로운 정보에 신운성은 눈을 빛냈다.

"혹시 그 신의 대리자들이 머물던 장소 같은 곳이 있나요? 건물이라거나."

"그건 모르겠다."

호안바트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부족의 입장에서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이야기해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벨로트족이었다.

"아쉽네요. 옛날에 지어진 신전은 어떻게 지어 졌나 궁금했는데."

"흠, 잠깐 기다려 봐. 지금 생각나는 게 있어서."

대화 도중 호안바트는 잠시 자리를 뜨더니 이내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이건 다른 부족이 가지고 있던 건데."

호안바트가 내민 것은 하나의 지도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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