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운의 기어-55화 (55/109)

< -- 55 회: 서전 -- >

아침이 찾아왔다. 남부의 전사들은 긴장한 눈으로 계속 성황군을 주시했다. 성황군의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단지 담을 경계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시 안에서 싸울까요?"

루앙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다만 적에게 교두보를 내주었을 뿐.

하지만 막대한 전력이 부두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답이 보이질 않았다.

"밤에 기습했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기습은 무리였어."

전사도 사람이다. 쉬지 않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쉬지 않고 적을 괴롭힌다면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쉬지 않은 대가는 언젠가 되돌아온다.

누적된 피로는 전투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고 적이 이를 알게 되면 약점이 된다.

"이대로 루앙을 내줄 순 없습니다."

"알아. 다 부수는 한이 있어도 그냥 내줄 순 없어."

부족 연합의 전사들은 열심히 의견을 교환하며 방법을 짜내었다. 숫자에 있어서 열세였다. 부족 연합이 전사를 모았지만 모든 전사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다른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서도 전사는 필요했기에 전력이 나뉜 상황이었다.

"루앙을 벗어나게 되면 물을 구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루앙을 내주면 우리도 위험해지죠."

"그래, 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물은 바닷물 아니면 우물뿐이었지."

눈을 빛낸 전사 하나가 우물에 독을 풀고 막아버리자고 건의했다.

"물을 구하지 못하게 한다 해도 배를 통해 코벵에서 들여오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지. 적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하는 게 좋다."

루앙을 지키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전사들은 루앙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일단 우물부터 다 처리하고 집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불을 지르고 챙길 수 있는 걸 모두 챙겨 가르농으로 후퇴한다."

결정이 내려지자 전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도 남부인들이 습격해오지 않자 그란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배를 타고 왔던 병력 중에 전투를 치르지 않은 병력을 이용해 밤새도록 적의 기습에 대비했건만 걸려든 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쉽단 말이야. 이번에도 기록에 나온 것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아무래도 적이 겁을 먹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부하의 말에 그란은 연신 입맛을 다시며 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풀어나가자고. 일단 날이 밝았으니 일부 부대를 적의 방벽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쪽으로 집중하고 식사나 하지."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어서 적에게 안식을 내려야......."

"전쟁에선 서둘러야 할 때가 있고 천천히 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옛 기록이 말해주고 있지. 선조가 남긴 교훈을 무작정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우리처럼 전쟁에 무지한 성기사들은 따르는 편이 낫다."

부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교두보는 확실히 점령해야지. 흔들리지 않는 요새로 만들어둔 후 천천히 남부인들에게 안식을 주면 된다. 영토를 빼앗듯이 조금씩 나아가다보면 북부의 욕심 많은 영주들이 달려들 거야."

"그렇군요."

"그러니까 적이 도망가도 그냥 내버려둬. 쓸데없이 쫓아가서 병력 낭비하지 말고. 신의 품에 안기는 것은 조금 천천히 해도 좋은 일이다. 그것보다 할 일이 있다."

그란은 장례식 준비를 명했다. 전투에서 희생된 성기사를 비롯한 병사들을 위한 장례식이었다.

"성전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한 이들이다. 최대한 예를 갖추도록."

장례식을 명하는 그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근엄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경계는 계속 하고 있기에 남부 전사들은 찌를 빈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세상을 밝히는 파우론님이시여. 부디 이들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장례를 직접 주도한 것은 성황군 총사령관인 그란이었다.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가 치러지자 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감정이 떠오르며 잡념을 불태웠다.

두려움도, 슬픔도 모두 태워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싸우겠다는 의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다시 파우론님의 빛으로 가득할 그날을 위해!"

그란의 외침이 병사들의 정신은 뒤흔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갑옷을 입은 그란은 성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마나를 주입한 황금 갑옷은 오러의 영향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러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러 자체가 신의 힘에서 비롯된 것.

병사들은 위엄이 넘치는 모습에 감격하며 무릎을 꿇었다.

'저 자식들 쳐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짓인지.'

신운성은 성황군을 살피고 있었다. 다른 전사들이 루앙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 동안 감시하는 것이 이번에 받은 임무였다.

성황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느긋하게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고 경계하고 진영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느긋해서 근처에 보이는 병사들을 죽이고 돌아와도 충분할 것 같았지만 움직일 순 없었다.

'공을 탐내 내가 움직이면 다른 계획을 망친다.'

병사 몇 명 죽이고 원래 계획했던 작전을 망치게 되면 손해였다. 가끔 전쟁에서 공을 탐하는 이들이 작전을 망치는 경우는 수두룩했다.

완벽할 것 같은 작전도 이행하는 병력이 잘 따라줘야만 완벽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에 세워놓은 작전대로 돌아가기 보다는 현장 지휘관의 임기응변이 중요해지는 순간이 너무나 많다.

신운성은 꾹 참았다. 잘 해서 성기사 하나 잡으면 스탯 포인트를 얻을 수도 있지만 작은 공을 탐해 큰일을 그르치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양측이 별 다른 전투를 하지 않는 와중에 전사들은 도시의 우물을 모두 쓸모없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불을 질러!"

준비된 장작과 기름을 이용해 불을 지르며 움직이자 루앙은 삽시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작전인가?'

그란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전에 보관된 전투의 기록에 의하면 상황이 불리해지면 상대방이 도시를 쓸 수 없도록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물러나는 전략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적군의 진군을 늦추는 데에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진군은 성황군이 아닌 영주들이 해야지.'

전쟁에 있어서는 초보일지 몰라도 정치에 대한 것들은 꽤 달통한 그란이었다. 성기사로 지내며 수많은 영주들을 만나보았고 영주들의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식으로 성공했는지 정도는 정보통을 통해 파악했다.

그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성황군이 직접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는 없다. 성황군은 영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군대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해산할 군대. 하지만 성전에는 꼭 필요한 상징적인 군대다.

노예와 천민이 대다수인 군대를 이끌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은 전쟁을 한 번도 치러보지 않았던 그란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란에게는 대제국을 세우겠다는 욕심 따윈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마족으로 추정되는 남부인들을 세계에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영광도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그란은 모든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영광을 원하는 이에겐 영광을.

영토를 원하는 이에겐 영토를.

탐욕스러운 영주들은 영광과 영토를 항상 갈구한다. 이를 알기에 그란은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무리해서 성황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생각도 없었다.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전투만 이기고 완수할 수 있는 작전만 수행할 생각이었다. 나머지 어려운 일들은 탐욕으로 불타는 이들에게 맡기면 된다.

남부인들을 다 죽이고 나면 남을 광활한 영토.

여기에 욕심을 내지 않을 이들은 없다. 대신전에서 이를 모두 관리할 생각도 이유도 없기에 어차피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갈 땅.

그렇다면 자격을 시험한다는 이유로 끌어들이면 된다.

'진군이 늦어도 괜찮아. 천천히 영토를 넓혀가는 식으로 목을 졸라 죽이면 돼.'

세월이 얼마나 걸리건 상관없었다.

성황이 암살당해 교체된다고 해도 파우론교가 존재하는 한 성황군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통 왕국이나 영주들과 교단의 차이였다.

왕국의 전쟁은 왕을 잃으면 끝나지만 교단의 전쟁은 종교 지도자가 암살된다고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그란은 느긋했다.

루앙을 불 지른 전사들은 루앙 밖으로 나와 적의 반응을 살폈다.

"저 자식들 왜 안 움직이지?"

"별 다른 반응이 없는 게 이상해."

아직까지 그란의 의도를 읽지 못한 전사들에겐 성황군의 움직임은 매우 멍청해 보였다.

"뭐 적이 넋 놓고 있다면 우리가 준비할 시간이 더 많아질 뿐이다. 가자."

부족 연합이 완벽하게 완성된다면 성황군이든 뭐든 해볼만하다는 것이 전사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전사들은 빠르게 가르농으로 후퇴했다.

가르농. 루앙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이 도시 또한 사실 주인은 없다고 봐야 했다. 남부는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부족들을 중심으로 사회가 발달하고 있었다. 때문에 부족 간에 영역을 두고 다툴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교역을 하기도 했다.

교역 도시는 대부분 파우론의 신전에 세워진 곳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파우론의 신전이 세워지면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역했다.

하지만 현재 파우론의 신전은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마족이란 누명에 화난 남부인들이 사제와 성기사를 죽이고 신전을 파괴했다. 성기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전사들이 포함된 군중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가르농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신전은 파괴 되었고 부족 연합이 차지한 상황이었다.

가르농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시 주변으로 흙으로 만들어져서 낮기는 하지만 성벽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신운성의 눈에는 부족해 보였다.

'이 정도로는 안 될 텐데.'

북부의 성들을 보았기에 남부의 흙으로 된 낮은 성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들에게도 방법이 있겠지.'

아직 남부의 모든 것을 아는 상황은 아니었다.

신운성은 조용히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우선 오러부터 수련이다.'

한편, 부족 연합의 족장들은 성황군이 빠르게 쫓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우려를 표명했다.

"서서히 목을 조여 올 작정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부족 통합 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 이런 식으로 밀리게 될 지. 자칫하다가는 적의 보급로를 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점령지를 늘려주는 꼴이 됩니다."

부족 연합의 족장들은 그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냈다.

"차라리 견제를 위한 전사들도 통합을 위해 움직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저들이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는다면 진군 속도가 더 빨라질 테니까요."

결국 부족 연합의 회의는 부족 통합을 더 서두르자는 이야기만 하고 끝났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