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 회: 서전 -- >
파도를 가르며 빠르게 부두를 향해 전선이 돌진했다.
"이대로 가면 위험합니다!"
"속도 줄여!"
명령이 떨어지자 노를 젓는 속도가 느려졌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돛대만 사용하는 배였다면 할 수 없는 일을 노를 사용하면 가능해졌다.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은 물론 방향 전환은 물론 전투시에는 뒤로 물러나는 것도 가능했다.
노군들은 명령에 따라 박자에 맞춰 노를 저었다. 무섭게 부두를 향해 달려들던 전선이 갑자기 방향을 틀며 측면을 가져다 대었다. 잠시 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멈추었다.
"방패병부터 뛰어내린다!"
배가 부두에 정박하자 대량의 화살이 날아왔다. 성황군은 방패병을 앞세워 화살을 막으며 병사들을 부두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두의 공간은 넓지 않기 때문에 모든 배들이 정박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뒤이어 오는 배들은 앞쪽에 선 배에 배를 바짝 붙이고는 병력을 이동시켰다. 나중에 배를 빼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지고 파손이 우려되는 짓이었지만 성황군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상륙에 전념했다.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성황군은 멈추지 않았다. 먼저 상륙하는 대부분의 인원은 노예와 천민으로 구성된 방패병이었다. 이들이 할 일은 적의 예봉에 맞서는 것이 전부였다.
"으아아악!"
"방패를 더 높이 들어!"
방패로 아무리 가린다고 해도 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운이 나쁜 이들은 이 틈으로 파고든 화살에 맞았다.
"순조롭군."
그란 산 파멜. 성황 가르노스 산 파멜과 같이 파멜 대신전 출신의 성기사는 무심한 눈으로 전황을 살폈다.
남부인들이 뭉치는 것은 예상했던 저항이었다. 때문에 그란은 성황군을 움직이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었다. 숫자를 충분히 모은 뒤 노예와 천민들을 상대로 정신 교육을 시켰다.
정신 무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병사는 전투에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행여나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게 되면 다른 병사들도 동요하게 된다. 이런 혼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면 군대는 쉽게 무너진다. 그러니 먼저 정신 교육이 우선이었다.
죽어도 끝이 아니라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말에 노예와 천민들은 조금씩 빠져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지나며 집단으로 뭉쳐있는 시간이 오래 되자 광신도로 변해갔다.
훈련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사기가 형편없으면 무너지기 쉽다. 조금만 강한 저항을 받으면 흩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훈련이 안 된 군대라 하더라도 사기가 높은 군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란은 대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전쟁 기록들을 전부 읽어본 몇 안 되는 성기사였다. 과거 파우론의 구원자들이 악마들을 상대로 싸웠던 기록을 보며 전쟁에 대한 것을 간접적으로 배운 그란은 기록에 따라 군대를 조련했다.
"역시 파우론님은 위대하시다."
그리고 노예와 천민들이 무서운 병사로 돌변한 것을 목격한 그란의 신앙은 더욱 깊어졌다.
전장을 바라보는 그란의 눈은 담담하기만 했다.
끝없이 배에서 내리는 적들을 보며 전사들은 긴장했다.
"화살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불을 붙여서 쏜다!"
화공. 자칫하다가는 도시를 태울 수도 있는 공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도시는 이미 비어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 적에게 넘겨줘 거점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느니 그냥 못 쓰게 만드는 편이 더 나았다. 물론 화공을 날린다고 도시가 쉽게 타지는 않는다. 나무 같은 것을 별로 쓰지 않고 흙으로 만든 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불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기름주머니까지 달고 있던 불화살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적에게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살려줘!"
"불이다! 불을 꺼!"
불화살은 용맹하던 성황군의 방패병들을 흔들었다. 빈틈이 생겼다.
"돌격!"
불화살 공격이 끝나자 전사들은 돌격했다. 자신들보다 수배나 많은 적들을 보고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성황군은 남부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기에 전사들은 모두 독한 마음을 품었다.
"하아아아아아앗!"
요란한 기합 소리와 함께 충돌이 일어났다. 맨 앞에 섰던 전사들은 보통 전사가 아닌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오러 전사였다.
신운성도 맨 앞에 서서 적을 날려버렸다.
오러를 머금은 메이스가 휘둘러지자 적의 방패가 박살났다. 놀란 방패병이 움찔하는 순간 휘둘러진 메이스는 머리를 박살냈다.
뇌수와 피가 튀며 시체가 쓰러질 때 메이스는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았다.
몸통을 치고 나가는 메이스는 살을 한 움큼 뜯어냈다. 뜯겨 나간 곳을 통해 피가 흘러내리며 적은 무너졌다.
신운성의 메이스에 자비는 없었다.
마주치는 것은 무엇이든 박살내고 뜯어냈다.
방패병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은 악착같이 덤벼들었지만 오러를 쓰는 전사를 막아내지 못했다. 포위하고 사각지대를 공략한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적을 상대하면서도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오러 전사들이었다.
이들에게 사각지대는 없었다.
전사들의 돌격에 갑자기 방패병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란은 슬쩍 웃었다.
"드디어 나왔군."
예상했던 바였다. 남부인들이 저항을 할 때부터 전사들이 공격해 올 것을 알았다.
"루클란. 때가 되었다."
"간악한 마족들에게 안식을 주고 오겠습니다."
그란의 휘하에 있는 성기사 루클란은 미리 전부하고 있던 성기사들과 합류했다.
"가자 형제들!"
"파우론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기사들의 함성에 방패병들은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내주었다.
빠른 속도로 전방에 도착한 성기사들은 그대로 오러 전사들과 충돌했다.
"크악!"
오러 전사들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면 대결에서는 성기사들이 조금 더 강했다.
오러를 뿌리는 성기사 집단은 무서웠다. 오러 전사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계속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신운성도 1명의 성기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성기사의 빠른 검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방패를 들어 막았다.
쾅!
오러를 주입한 방패는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냈지만 충격이 컸다.
'마나 소모가 심하다.'
사드하가 말했던 대로 방패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대로는 오래 못 버틴다.'
방패병들을 상대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신운성은 이를 악물었다.
"하압!"
성기사가 재차 공격해오는 타이밍에 맞춰 기합을 주었다. 동시에 방패에 오러를 잔뜩 주입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검이 방패에 부딪치려는 찰나 신운성은 방향을 살짝 틀었다.
콰앙!
충돌로 인한 폭음이 일어났지만 신운성은 방향을 틀어 충격을 흘려낸 상태였다.
아주 잠깐 성기사의 자세에 틈이 생겼다. 신운성은 기회를 잃지 않고 파고들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쾅!
오러를 머금은 메이스는 갑옷을 찢어발기며 몸의 일부분을 갑옷과 함께 뜯어냈다.
"컥!"
성기사는 다음 공격을 하려 했지만 힘을 모으지 못했다. 간신히 공격 당한 몸을 바라보더니 충격에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후우......."
성기사를 처리하기 위해 많은 마나를 소모한 신운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스탯 포인트가 올라갔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전투 중이라 신운성은 메시지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죽어라 마족!"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다른 성기사가 달려들었다.
신운성은 성기사를 4명 더 처리했다. 하지만 금방 위기에 빠졌다.
'이 이상은 무리야.'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나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교대!"
힘이 빠진 자는 뒤로 물러나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신운성이 교대를 외치자 다른 전사가 앞으로 나왔다. 옆에서 함께 싸우던 서은하도 교대를 외치며 뒤로 물러났다.
"후우......."
뒤로 살짝 물러난 신운성은 물을 마시며 전장을 살폈다.
'이대론 힘들 것 같다.'
전사와 성기사의 싸움은 성기사가 약간 우위였다. 신운성이 5명을 죽였지만 다른 쪽에선 전사들의 피해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후퇴 안 합니까?"
"천천히 뒤로 물러나야지. 지금 등을 보이면 다 죽는다."
함께 쉬고 있던 사드하의 인상은 펴질 줄 몰랐다.
"그럼 활이라도 쏠까요?"
"쉬어둬. 빨리 힘을 회복하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전사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서도 악착같이 싸웠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 살벌하게 휘둘러지며 뒤엉켰다. 폭음이 일고 욕설과 고함이 난무했다.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자는 없었다.
전투는 전사들이 세우고 있던 관문 근처로 밀린 뒤에야 끝났다. 높은 담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사들이 활을 쏘니 성기사들도 무시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전사들은 뒤로 후퇴했고 전투는 소강 상태에 빠졌다.
휴식을 하며 전투에 몇 번이고 뛰어들었던 신운성은 무려 10명의 성기사를 죽일 수 있었다. 검만 쓰는 전사에 비해 압도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쉽게 지쳤기 때문에 오래 싸우지는 못했다.
'다른 전사들이 버텨주니까 내가 활약할 수 있었다.'
다른 전사들이 활약상을 칭찬해주었지만 신운성은 우쭐해하지 않았다.
'좀 더 강해져야 해.'
전투에서 오래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동료가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소리였다.
'마나를 더 모아야 해.'
무기를 바꾸는 것도 고민했었지만 역시 마나를 더 모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새로운 무기의 숙련을 높이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검과 같은 무기는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 성기사를 상대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신운성은 퀘스트창을 확인해보았다. 갑자기 전투 할 때 들었던 메시지 때문이었다.
'새로운 퀘스트. 성기사를 죽이면 1 스탯 포인트.'
10명을 죽였기에 10 스탯 포인트가 모인 상황. 신운성은 주저하지 않고 정신력에 몽땅 투자해 정신력을 85로 올렸다.
정신력이 늘어난 상태에서 오러 연공을 하자 모이는 마나의 양이 더욱 늘어났다. 신운성은 마나를 컨트롤해 연공법에 따라 움직였다.
몸 안의 세포가 새롭게 깨어나는 기분이 느껴졌다. 전투로 인한 피로가 풀리며 활력이 넘쳐흘렀다. 빠르게 회복된 것이었다.
"후우......."
연공을 끝낸 신운성은 서은하와 교대했다. 이후 일꾼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식사를 하며 밤하늘을 감상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첫날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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