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 회: 서전 -- >
코벵이 함락 당했다.
루앙에 전해진 소식은 방어를 위해 힘을 합쳤던 남부인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정말 알 수 없게 됐군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저들을 어찌 막아낼 지."
부족의 족장들이 모인 회의에는 암울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파우론이란 신을 믿는 이들은 성전이란 이름아래 한 뜻으로 뭉쳤다. 그리고 군대를 조직해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남부인들도 뭉쳐야만 했다. 하지만 남부의 부족들의 뜻은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기전을 예상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울 생각으로 방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에 북부에서 도망쳐 온 이들이 비난을 날렸다. 싸우자고 하는 남부인들도 방관자를 비난했다.
그러자 오히려 방관자들이 자기들끼리 뭉치며 대립각을 세웠다.
남부는 아예 반쪽으로 갈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왜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오? 우리의 피로 방관자들을 보호해주다니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기어코 말이 나왔다. 방관하는 놈들부터 다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뱉은 말은 분위기를 타고 족장들을 흔들었다.
싸우자고 모인 이들 사이에서도 또 파벌이 갈리게 생겼다.
"그래도 루앙을 버릴 순 없습니다. 여길 포기하고 길을 내주게 되면 북부의 군대가 계속 내려와 결국 남부인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으음......."
이해득실의 문제가 얽혔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남부를 위한다는 명분만으로 부족의 미래를 걸고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루앙을 위해 싸운 부족만이 앞으로 루앙의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합시다. 피를 흘리지 않은 자가 권리를 누리는 일은 없어야지요."
"그럼 누가 루앙에 남겠소?"
루앙의 권리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선뜻 나서는 부족은 없었다. 코벵이 함락된 시점에서 다음 목표는 루앙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즉,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전장이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지 말고 여러 부족에서 전사를 차출하도록 하죠. 루앙은 이미 교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니까요. 그리고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을 잡아 노예로 삼아 요새를 만들어야 합니다."
유드족의 족장이 꺼낸 말에 다른 족장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그럼 루앙의 권리도 나눠가질 수도 있고."
"그것도 그렇지만 이참에 부족 연합을 만들도록 하죠. 이 자리에서 정합시다."
유드족 족장의 제안에 반대하는 족장들은 없었다. 그렇게 남부 부족 연합이 탄생했다.
그리고 연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망친 부족의 사냥이었다.
"우리는 남아서 루앙을 지킨다."
사드하의 말에 전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성전이 선포되었다고 군대가 바로 쳐내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를 모으고 침략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유드족 전사들도 마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단련하며 전쟁 물자를 비축했다.
신운성과 서은하도 열심히 수련한 결과 기사들만큼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섰다.
'이제 기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눈부신 성장이었다. 유드족 전사들은 다들 기뻐하면서도 어디 가서 떠들지 않았다. 강한 자가 있는 부대는 언제나 위험한 일에 투입되기 쉽다. 강하니까 가장 어려운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운성과 서은하가 아직은 오러 마스터가 아니기에 위험한 일을 맡게 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유드족 전사들은 침묵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오러 마스터란 존재였다.
"내일부터는 전사들만과 일꾼들만이 루앙에 남게 된다. 그러니 오늘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사드하의 말이 떨어지자 전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족을 찾아갔다. 여차하면 루앙을 포기해야 하는데 부족이 남아 있으면 후퇴가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동이 어려운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은 일단 다른 곳으로 이동 시키고 전사들을 조금씩 차출해 루앙을 지키기로 한 것이었다.
신운성은 가족과 지내란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진짜 가족은 다른 세상에 있다. 지금 가장 소중한 사람은 서은하였고 언제나 같이 움직이기에 따로 작별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떼어놓으면 죽는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페르나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페르나에게 가족이란 느낌은 그다지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 결혼하고 관계를 맺었을 뿐.
첫날 밤 이후 페르나와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오러 연공 때문에 바쁜 것도 있었지만 애정이 그다지 없었기에 서먹했다. 페르나가 살갑게 구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오늘 밤 페르나 좀 부탁한다."
전사들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있을 때 카딘이 다가왔다.
"성질이 고약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다. 부탁한다."
카딘이 고개를 숙였다. 항상 묵묵한 카딘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니 신운성은 마음이 흔들렸다.
"알겠습니다."
카딘은 동료였다. 친절하게 단검술을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신운성의 전투력은 놀랍게 늘어났다. 라말은 가르치다 답답해지면 그냥 열심히 하라면서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게 했지만 카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주었다. 자신이 아는 요령 같은 것도 친절하게.
사람을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신운성이었지만 계속해서 친절을 베푸는 카딘에게는 마음이 조금 열렸다.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지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는 함께 할 생각은 있었다.
"오빠 나 신경 쓰지 마."
카딘이 돌아가고 나자 서은하가 웃으며 등을 밀었다.
'바보 같은 녀석.'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신경 안 써. 네가 제일 중요한데."
"진짜?"
"그래."
서은하는 바보처럼 웃었다.
"먼저 집에 가 있어."
서은하를 먼저 집으로 보낸 신운성은 마르시드를 찾아갔다.
"내일부터 헤어지게 될 거야."
"얘기 들었어요."
페르나는 담담하게 신운성을 마주 보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알아. 너도 갑작스러웠을 거고."
신운성은 옆에 앉은 서은하를 한 번 보고는 페르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잘 지내보자."
품에서 팔찌를 꺼낸 신운성은 페르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팔찌는 마르시드한테 외상으로 산 것이었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황금 팔찌였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페르나는 당혹스러웠다. 싫은 기분은 절대 아니었다.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고마워요."
페르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빠 나는?"
둘만 남게 되자 서은하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신운성은 반지를 꺼냈다.
"급하게 준비해서 미안해."
반지는 아무런 문양도 없는 간단한 것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반지를 왼손에 끼워주자 서은하의 표정이 풀어졌다.
"고마워."
저녁 식사 분위기는 조금 훈훈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자 열기가 더해졌다.
결국 훈훈함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간밤에 황홀한 밤을 보냈던 페르나는 신운성과의 이별을 몹시도 아쉬워했다. 페르나는 살짝 울면서 무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운성은 꼭 돌아오겠다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울지 말고 있어. 밥 잘 먹고."
"네."
"그럼 나중에 보자."
페르나가 친정 가족과 함께 루앙을 떠났다. 그러자 카딘이 다가왔다.
"정말 고맙다."
"뭘요. 그럼 전쟁 준비나 합시다."
전쟁 준비는 계속 이어졌다. 전사들은 계속 자신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며 루앙의 방어 시설을 늘리는 일을 감독했다.
남부 부족 연합은 꾸준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부족들을 사냥했다. 남부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싸움에서 등을 돌린 배신자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소규모 부족들을 차례차례 각개격파 했기 때문이었다. 뭉칠 틈도 없이 몰아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행보가 알려지자 겁을 먹은 중립 부족과 약소 부족들이 남부 부족 연합에 들어갔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남부인들이 연합을 통해 점점 하나로 뭉쳐가고 있는 상황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통합을 이루기 전 성황군이 쳐내려왔다.
코벵을 점령한 성황군은 코벵이 안정되자 루앙으로 쳐내려왔다.
"일단 상륙부터 막는다."
상륙하게 되면 바로 루앙의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요새화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단기간에 많은 것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부두를 중심으로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담을 쌓아 관문을 설치하는 일이 모두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항구로 향하지 않고 우회해서 해안가에서 상륙한 다음 치고 들어온다면 다른 방향이 비게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전쟁을 생각하고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기에 취약점이 넘쳐흐르는 곳이 바로 루앙이었다. 때문에 수비하는 입장에서 편하게 농성을 벌이긴 어려웠다.
'드디어 전투인가.'
혼자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도망쳤다. 지금도 목숨을 생각한다면 전투를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는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남부인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
죽을 때까지 끝까지 도망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쫓기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이 더 좋았다. 더구나 남부인을 도와 싸우면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파우론이 설 곳이 없어지게 되면 할 일이 다 끝나니 어쨌든 편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운성은 전쟁에 참여했다.
'오러도 배웠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싸우다 불리해지면 같이 후퇴하면 그만이었다.
'가슴도 불안하지 않고.'
무엇보다 예전처럼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신운성은 겁내지 않았다.
멀리 성황군의 배가 보였다. 하얀 돛에 파우론의 문양이 새겨진 배들이 상당했다.
'척 봐도 수백은 될 것 같은데.'
질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신운성은 물러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드하가 미리 말해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배에서 한꺼번에 병력이 내려 상륙할 순 없다. 앞에 오는 놈들부터 정비가 안 된 놈들을 계속 잡는 거야.'
다시 한 번 작전을 상기하며 신운성은 무기를 점검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평점 코멘트 쿠폰 후원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