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 회: 인연의 고리 -- >
며칠 후, 신운성은 한 남자와 만나게 되었다.
"전사가 되고 싶다고?"
"네, 오러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전에 우선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네가 우리 부족의 일원이 되긴 했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신운성을 바라보는 남자의 이름은 사드하. 나이가 들어 이제는 독침 빠진 전갈이라 불리는 유드족의 전사였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흠, 뭘 하면 될까?"
오러 연공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부족 전사의 비전을 함부로 가르쳐 줄 순 없다. 만약 오러 사용자 중에 배신자가 나온다면 뼈아픈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사드하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 떠나는 부족이 어디라고?"
"칼루족. 붉은 전갈입니다."
"아, 그래. 칼루족 겁쟁이들이 오늘 떠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독침 빠진 전갈이라 불리지만 나이가 들 때까지 부족의 전사로서 싸워왔던 인물이 바로 사드하였다. 수많은 전사들에게 사드하는 아버지와 동급이었다. 자신들이 애송이일 때 앞에서 끌어주는 것은 물론 위험한 순간에 나타나 등을 지켜준 존재였다. 때문에 사드하의 부하처럼 행동하는 전사들은 꽤 많았다.
"그 놈들이 우리랑 같이 전갈을 쓰는 게 참 마음에 안 드는데. 넌 어찌 생각하지?"
사드하는 갑자기 신운성을 보며 물었다.
"몇 놈이나 죽이면 됩니까?"
"눈치가 있어서 좋군. 좋아. 가서 10놈만 잡아와."
"10명이나요?"
"네 뒤에 서있는 아내도 항상 같이 움직인다며? 그러니 10놈이지. 혼자면 한 3놈 정도로 봐줄 생각은 있지만."
"10놈 잡죠."
"좋아. 카딘! 가서 제대로 싸우는지 지켜보고 와!"
"네, 어르신."
"그럼 붉은 전갈 문신 10개 일단 가져와보라고."
신운성과 서은하는 바로 움직였다.
루앙을 벗어난 칼루족은 남부 초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게 되자 족장의 막사 주변으로 심복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모였으니 식사부터 하자고."
돼지를 통째로 구워 먹는 화기애애한 시간이 흘렀다. 칼루족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루앙은 곧 전쟁터가 될 것처럼 폭발적인 분위기였지만 초원의 밤은 평화롭기만 했다.
어찌 보면 싸움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자들이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칼루족은 절대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저 이기적일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부족들과 함께 루앙에서 터를 다지고 부와 세력을 늘렸다. 그리고 코벵에서의 사건을 듣자 칼루족의 족장은 딴 생각을 했다.
"성황이 우릴 마족으로 만들다니. 유감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남부는 넓어. 사막도 많고. 절대 우릴 다 죽이지 못해."
식사가 끝날 때쯤 칼루족의 족장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렇죠. 희생이야 좀 나오겠지만 전부 다 죽일 능력이 북부에는 없죠."
"그러니까 차라리 잘 된 거야.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우린 대부족이 될 수 있다. 아니 남부에 왕국을 세울 수도 있어!"
왕국의 왕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왔다. 대부분 나쁜 의미에서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힘을 가진 권력자들은 오히려 다르게 받아들였다.
언제고 다시 이룩하고 싶은 이상향이 바로 왕국이었다. 만인 위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권력자들은 희열에 젖었다. 때문에 입밖에 잘 내지 않고 속에만 품고 있던 꿈이었다.
그런데 성전이 선포되었다. 남부는 모두 마족으로 치부한다는 이야기는 빠르게 퍼지는 중이었다. 이로 인해 파우론을 버리는 배교자가 속출했다. 피부색이 갈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을 마족으로 치부한 성황과 파우론을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믿음을 버리지 않은 이들은 어리석게도 배를 타고 북부로 향했다. 그 뒤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북부를 탈출해온 이들의 증언은 남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재산을 압수하는 것은 기본이고 고문은 정해진 일이라고. 선한 사제들에게 심판을 받은 이들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다시 잡히길 반복했다. 악질적인 이들은 억지로 누명을 씌워 목숨을 빼앗아갔다.
남부에는 더 이상 파우론교가 설 곳이 없어진 상황. 그렇다면 남는 것은 더 큰 힘을 가진 존재가 거대한 왕국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먼저 나서서 싸워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싸움 끝에 세력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겠죠. 그때 선심을 쓰며 도와주며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 이득입니다."
칼루족 족장의 심복들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족장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반대는 없고 모두 족장의 판단이 현명하다는 식의 의견만 나왔다.
"후후후, 그래. 지금은 욕하는 놈들이 있지만 결국 힘이 있어야 하는 거지. 나중에 무슨 소릴 하면서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나?"
"맞습니다."
족장을 위시한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술을 한잔씩 들고는 자신들의 여자를 찾아 움직였다.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씩 했으니 여자 생각이 슬슬 났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무르익어 갈 무렵, 칼루족을 향해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신운성과 서은하, 그리고 카딘이었다.
카딘은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볼까?'
전쟁이란 꼭 정면에서 칼을 부딪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중요한 인물을 암살하는 것도 전쟁의 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적을 몰래 기습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신운성은 칼루족 보초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딘은 기습 하나만큼은 잘하겠다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손에 든 무기는 짧은 단검이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신운성은 보초의 눈에 띄지 않고 다가가 입을 막았다. 이어서 목을 땄다.
짧은 떨림과 흐르는 피의 축축함이 한 생명이 꺼져갔음을 알렸다. 신운성은 죽은 보초의 어깨에서 전갈 문신을 도려내 준비한 주머니에 넣었다.
말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움직일 뿐.
보초를 죽이고 비어있는 곳으로 들어가자고 있는 칼루족을 습격했다. 자고 있는 인간들의 목을 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깨어 있는 사람이 없다면 들킬 일은 절대 없었다.
순식간에 열 명을 죽이고 문신을 챙긴 신운성과 서은하는 조용히 루앙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칼루족은 갑작스런 기습을 당하고도 아무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떨며 멀리 도망쳤다.
"어땠어?"
"기습은 잘 하더군요. 가르쳐 볼만 한 거 같습니다."
카딘의 이야기를 들은 사드하의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배신할 수도 있는데."
"또 그 소립니까? 다른 부족 사람을 죽이라고 해서 이렇게 죽여서 증거를 가져왔는데도?"
여전히 의심하는 사드하의 말에 신운성은 조금 답답했다.
"시키는 일을 잘 해내는 거야 전사의 기본이지. 하지만 사람으로서. 같은 형제로 널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르시드처럼 우리 부족이었던 것도 아니고."
사드하는 연신 뜸을 들였다.
"그렇다고 네 부인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이네."
"뭡니까?"
"우리 부족 여자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해."
"네?"
"둘째 부인으로 맞이해서 가정을 꾸린다면 그나마 믿을만하지. 아니면 한 10년 동안 그냥 지내던가."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만이 사람의 진실 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사드하의 신조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인성을 확인하는 방법이라면 혈연이 있었다.
혈연을 맺어도 배신할 놈은 배신하지만 옆에 붙어 있는 가족의 눈을 피할 방법은 별로 없다. 때문에 배신도 쉽게 하진 못한다. 결혼한 부족의 여자가 자신의 남자를 따른다고 해도 여자를 항상 지켜보는 다른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감시망이 형성된다. 또한 혈연을 맺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는 부족의 일원이 된다. 이렇게 되면 부족을 배신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사드하의 계산이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신운성이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서은하가 앞으로 나섰다.
"난 괜찮아요."
"오호, 정말 좋은 부인이군. 남자의 앞길을 위해 질투하지 않고 조언하다니."
사드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신운성은 굳은 표정으로 서은하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서은하의 표정은 보기 힘들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허허, 하루 시간을 줄 테니까 잘 생각해보라고. 가봐."
사드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운성은 서은하를 끌고 외진 곳으로 갔다.
"화 안 나?"
"내가 왜?"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해. 오빠가 나 좋아하는 것도 알고."
"그런데 괜찮다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신운성이 이렇게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나 서은하의 신뢰를 잃을까 두려워서였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필요하니까 받아들여야지."
서은하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서러운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오러 연공법 꼭 필요하잖아. 빨리 익혀야지. 안 그래?"
"은하야."
신운성은 서은하를 꽉 안았다.
"오빠. 나 버리면 안 돼. 알았지?"
품에 안긴 서은하는 떨고 있었다. 처음부터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던 일이 다시금 신운성의 뇌리에 스쳤다.
"내가 널 어떻게 버려. 말도 안 돼."
"그럼 다른 여자랑 내가 싸우면?"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정말이지?"
"그래."
"약속이다?"
품 안의 서은하가 응석을 부렸다. 신운성은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
"어기면 나 죽어버릴 거야."
"알았어. 약속할게."
신운성은 굳게 약속했다.
"그럼 오늘 밤 안아줘."
어렵사리 나온 말에는 흥분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그건 좀. 나 못 참을 거 같은데."
"괜찮아. 나 오늘 괜찮은 날이야."
"그래?"
신운성은 서은하의 말을 굳게 믿었다. 임신의 걱정이 없다니 솟구치는 욕구를 참기가 어려웠다.
밤이 깊어지자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 마주한 서로의 몸에 이끌리듯 뭉친 뒤 연신 사랑을 표현했다.
몸으로, 소리로, 그리고 열기로.
처음으로 맞이한 뜨거운 밤,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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