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 회: 인연의 고리 -- >
제르모의 실패가 알려졌다. 아비트에 있던 지노스는 소식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짓을......."
말 그대로 제르모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지노스의 보고가 신전을 통해 올라간 이후 대신전에서는 갈색 피부를 가진 남부인들에게 추적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제르모에서는 다르게 해석했다.
남부인을 추적해 잡아오라는 식으로. 또한 성황이 명한 일이니 거부하면 모두 악마와 결탁한 마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해석 배경에는 코벵에 대한 악감정도 한몫했다. 부유했던 제르모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을 보며 자란 제르모 영지의 사람들은 코벵이 악의 소굴처럼 보일 뿐이었다.
제르모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남부인들을 마족으로 치부해버리며 혈사를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 남부인과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빨리 말려야 해.'
지노스는 마지막까지 비극을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과격주의자들은 지노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과격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북부에서는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로디......."
살인자들에게 아내와 자식을 잃었던 남자는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매듭을 보며 중얼거렸다.
"복수해주마. 로디. 노아."
자식과 아내의 이름을 중얼거린 남자는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매듭을 작은 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주머니는 목에 걸렸다. 이후 남자, 마일론의 눈빛은 독하게 빛을 발했다.
"네 동료는 어디 있지?"
복수를 맹세했던 마일론은 성기사들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였다.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당하던 날 마일론은 똑똑히 보았다. 갈색 피부를 가진 건장한 사내들이 떠나던 것을.
마을에는 두 명의 갈색 피부를 가진 시체들이 있었다. 화살에 의한 사망. 하지만 마일론은 복수를 하지 못했다.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내와 자식을 죽였던 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마일론의 가슴 속에 원수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풀지 못한 원한은 원수들에 대한 복수심을 더욱 크게 키웠다. 때문에 마일론은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을 서슴지 않고 악마들이라고 주장했다.
"무, 무슨 소리야.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우린 아비트에서 왔어."
"아비트? 그럼 남부의 마족들하고 내통을 했었겠네."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마족이라니!"
"어쨌든 바른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몰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그냥 상인이라고!"
아비트에서 준주민이었다가 영지민으로 받아들여진 상인들은 외부로 나올 수 있었다. 때문에 남부 출신이면서도 북부를 오가며 상행위를 했다. 아비트의 물건을 가져다가 팔면 이득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 하고 있군."
마일론은 뒤쪽에 있는 성기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성기사는 마일론의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군.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직접 끌고 가 심문 하는 수밖에."
"뭐야? 왜 이래!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남부 출신 상인들의 불행이라면 피부가 갈색이라는 것뿐이었다.
마일론은 상인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발톱을 하나씩 뽑은 다음 손톱을 뽑았다. 그리고 이빨을 뽑은 뒤에 상처를 내고 소금을 뿌리는 잔인한 고문을 이어갔다.
"으아아아아아! 이 나쁜 놈들아! 파우론님이 두렵지도 않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파우론님을 위한 것이다."
마일론은 성기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성기사도 허락한 일이니 끔찍한 고문을 행하면서도 죄책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강한 복수심과 명분은 연민이나 죄책감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해주었다.
"파우론님을 팔아서 우릴 현혹시키려는 말까지 하는 군."
성기사의 말에 마일론은 더 심하게 고문했다. 결국 고문을 받던 상인은 저주를 퍼붓다 숨이 끊어졌다.
다른 이들은 겁에 질려 뭐든지 말하겠다고 했고 결국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거짓 자백이야 말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역시 이들은 마족이었다. 정화와 안식이 필요한 이들이다."
정화를 위해 기둥에 묶인 채 산 채로 태워졌다.
마일론은 타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가슴에 걸린 주머니를 꼭 쥐었다.
"아직 부족해. 이 정도론 어림없어."
중얼거리는 마일론의 눈빛은 더욱 강하게 빛났다.
신운성은 마르시드를 따라 남부에 도착했다. 남부의 대표적인 항구 루앙. 항구라고는 하지만 여러 부족들이 함께 세운 곳으로 정확한 소유주는 없다. 단지 부족 연합체들이 돌아가면서 관리하고 있었다.
마르시드는 바로 루앙에서 나고 자랐던 남자였다.
'여기라면 조금 안심해도 되겠어.'
신운성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루앙은 온통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 뿐이었다. 백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피부색에 의한 위화감이 없었다.
남부는 북부와는 조금 달랐다. 사막과 가까운 지역인 만큼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다. 웃통을 벗고 다니는 자들도 종종 보였다.
"어서 가자."
마르시드는 거침없이 혼잡한 인파를 뚫고 어딘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흙으로 만들어진 집 앞이었다. 다른 집들보다 좀 더 큰 것과 입구에 경비로 보이는 이들이 서있는 것이 다른 집들과는 달랐다.
"누구냐?"
가까이 다가가자 경비의 질문이 날아왔다.
"가베스의 아들인 마르시드입니다."
"가베스의 아들? 어떤 가베스?"
"율리한의 아들 가베스입니다."
"아아! 알겠다."
남부인들은 성이 따로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는 직함이나 부족명을 부가로 부치지만 딱히 정해진 격식은 없었다.
"마르시드. 장사를 위해 아비트로 갔다고 하더니 무사했군!"
코벵에서 일어난 참사는 이미 남부에 퍼지고 있었다. 코벵으로 가는 길목이라 알려진 루앙은 이미 이 사실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애초에 루앙에 모인 부족들은 코벵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오랫동안 부를 누려왔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니 벌써 빠져나가려는 부족들이 속출하는 중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족장님을 찾아온 건가?"
인사를 나누던 경비병은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이제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비트에서 살 수 없게 돼서 말이죠."
"흐음. 알았다. 족장님께 얘기해보마."
경비원이 직접 안으로 들어가 마르시드의 용건을 전했다. 일족을 이끄는 족장의 권력은 막대했다. 때문에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나기는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경비병에게 얘기하면 적당한 선에서 일이 처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르시드는 조용히 기다렸다. 한 때 아비트에서 정착하겠다고 부족을 뛰쳐나간 몸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돈은 좀 있는 상인이라고 하나 부족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현재 상황이 특수하기에 부족에서도 받아 주리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마르시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허락이 떨어졌다. 족장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부족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라고 명하셨다. 대신 지금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내라."
"내겠습니다."
마르시드는 이날 바로 자신이 가졌던 재산의 절반을 바쳤다. 재산이란 아무리 많아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상태라면 무거운 짐이 될 뿐이었다. 혼자 떠돌이로 돈을 많이 가졌다고 알려지면 다른 부족에서 돈을 노리고 덤빌지도 몰랐다.
다른 부족을 공격하면 전쟁이 되지만 혼자 있는 자를 공격하는 것은 사냥일 뿐이었다. 혼자서만 지내다 털려도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데도 없으니 차라리 재산을 조금 바치고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머지 재산도 지킬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재산을 바치고 마르시드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유드족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족이 되었다는 의미로 앞으로는 부족의 상징인 검은 전갈 문신을 어깨에 해야만 했다.
"다 끝났다."
"감사합니다."
신운성은 어깨의 문신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쫓길 걱정은 없었다. 적어도 유드 부족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안전하다고 봐야 했다.
'이제 쫓기기만 할 필요는 없다.'
가슴 속에 느껴지는 불안감은 어느 덧 해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빨리 오러를 배워야 해.'
신분 문제가 해결되자 신운성은 마르시드를 찾았다.
"마르시드님.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오러 연공법이란 것을 혹시 배울 방법이 있습니까?"
"오러 연공법?"
"네, 코벵에서 싸울 때 기사들이 쓰는 걸 봤는데 역시 무섭더라고요."
마르시드는 코벵에서의 전투가 떠올랐다. 신운성은 정말 잘 싸웠다. 하지만 여기에 상상을 가미해보았다.
'하크가 오러를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이 날개를 펼치고 높게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구름 위로 날아오른 상상이 내려다 본 곳에서 신운성은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베어냈다.
단순한 호위로 쓰기에는 아까운 강력한 부족의 전사가 날뛰고 있었다.
"으음......."
상상을 하던 마르시드는 신음을 흘렸다. 갈등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오러까지 쓸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내 밑에 두긴 힘들 텐데.'
오러를 쓸 줄 아는 자는 부족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강력한 전사가 많아야 부족의 영향력이 더 커지기 때문에 전사는 언제나 귀한 대접을 받는다. 때문에 지금은 마르시드가 호위로 부려먹기는 하지만 아랫사람처럼 대하긴 어렵게 된다.
'하지만 더 강해진다면 부족에서 내 영향력도 나쁘진 않은데.'
계산 때문에 마르시드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상인이 계산해야 할 것은 단순한 상품 거래만이 아니었다. 인간관계 자체가 바로 상인에게는 돈이 된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 놓으면 무슨 일을 할 때 남들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친분을 다져 놓으면 필요할 때 도움을 받기도 한다.
'배우게 해주는 게 좋겠지.'
다른 때였다면 조금 더 욕심을 부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굉장히 나빴다. 강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좋았다.
'남부인들은 앞으로 살아남기 힘든 세상.'
힘을 모으고 뭉쳐야 할 때였다.
"좋아. 내 알아보마. 하지만 나중에 오러를 익혔다고 나를 잊지 마라."
"물론입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신 마르시드님을 제가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됐다."
의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듣게 되니 마르시드는 마음이 흡족해졌다. 상대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정말 잊지 않고 갚을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입으로만 은혜를 갚는다고 하고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마르시드는 아비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상인으로서 자신의 안목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상황이 참.......'
신운성을 돌려보낸 마르시드는 하인이 알려주는 루앙의 소식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 수많은 부족들이 루앙을 벗어나 자신들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하려고.'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남부인들은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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