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 회: 인연의 고리 -- >
'기사부터!'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대항하는 상인들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신운성은 사각지대로 달렸다. 기사는 여전히 상인들의 호위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걸리는 대로 절단 내는 광경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안겨주었다.
'싸워야 해!'
하지만 여기서 도망칠 순 없었다. 이젠 싸워야 할 때였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언제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원하는 것은 내 손으로!'
이를 악문 신운성은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속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오러를 쓰던 기사는 뭔가 빠르게 다가오기에 몸을 돌려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오러가 맺힌 검은 다가온 적을 건드리지 못했다.
검을 휘둘러 몸통이 빈 상태가 되자 묵직한 충격이 옆구리에 느껴졌다. 갑옷 위에 맞았지만 기사의 몸이 접히며 허공에 떠올랐다.
"커헉!"
충격이 전신으로 퍼지며 내부를 울렸다. 기사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검이 떨어졌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순간 상인들의 호위가 기사의 숨통을 끊었다.
'다음!'
신운성은 기사 하나를 처리하자 다음 기사를 찾아 움직였다.
기사의 수는 총 30명.
1명을 처리했기에 29명 남았다.
'흩어진 놈부터.'
기사들은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다. 보통 2명이 짝을 지어 움직였지만 코벵에 내려선 기사들은 조금 달랐다. 자신들의 상대가 될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느긋하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도왔다.
때문에 신운성의 눈은 더욱 빛났다.
'계속 그렇게만.'
바람처럼 움직여 기사들을 잡았다. 괴력과 신속을 더 올리자 몸이 좀 더 빨라졌다. 이 때문에 방심한 사이에 덤벼들면 기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했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라 하더라도 맞지 않으면 무서울 것은 없었다. 대신 정면에서 싸울 땐 맞지 않으려면 계속 뒤로 물러나야 했다. 오러 없이 정면에서 맞서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고 절단나기 때문이다.
'다섯!'
벌써 5명을 해치웠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슬금슬금 다가가 단숨에 숨통을 끊는 식이었다.
기사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제르모의 기사들은 병력을 끌고 모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서 상인들을 때려잡으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마족으로 간주하겠다! 무기를 내려라!"
제르모의 기사는 다시 한 번 경고했지만 이미 싸운 상인들은 무기를 내릴 생각이 없었다.
"역시 마족들답군! 위대하신 아버지 파우론의 인정을 받으신 성황의 명을 전한다! 마족을 멸하라!"
남부 상인들을 마족으로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북부 상인 하나가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미천한 이 몸에게도 성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허락한다!"
그러자 북부 상인들이 무기를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친분을 다지며 거래를 하던 이들이 갑자기 돌아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남부와 거래는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성전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남부 상인들을 잡고 그들이 가진 상품과 재산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장사하지 못해 입게 될 피해를 조금이라도 충당하려는 속셈이었다.
북부 상인들이 전투에 참가하려 하자 남부 상인들은 이를 갈았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피부색이 죄냐!"
"개새끼들!"
남부 상인들의 가슴에는 원망이 들끓었다.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상실감과 함께 찾아온 원망은 피를 끓게 만들었다.
어딘가에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항상 냉철하게 거래에 임해오던 상인들도 이때만큼은 참지 못했다.
"죽여라!"
"으아아아아아아!"
남부 상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이에 북부 상인들과 제르모의 병력이 함께 충돌했다. 남부 상인들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중간에 끼어든 신운성이 재빨리 움직이며 기사와 병사들을 처리했다. 그러자 점점 균형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남부 상인들에 의해 북부 상인들은 계속 밀렸다. 성전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이익을 얻기 위한 참전이었기에 몸을 사린 것이 원인이었다.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었지 목숨 건 싸움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북부 상인들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부 상인들은 버티다 못해 자신들의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며 제르모의 병력이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이익! 이게 무슨 부끄러운 짓이냐! 감히 성전 중에 등을 돌려?"
제르모의 지휘관은 핏발이 선 눈으로 배에 올라타는 북부 상인들을 노려보았다.
"뒤로 후퇴해 부두를 봉쇄한다. 그리고 배에 불을 질러!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선 안 된다!"
제르모의 지휘관은 발악했다. 살아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빠르게 후퇴해 길목을 막고 배에 올라타는 북부 상인들을 죽이며 상인들의 배를 불태웠다.
아비규환.
북부 상인들은 용서를 빌었지만 제르모의 지휘관은 냉정했다.
"배교자들이다! 자비를 베풀지 마라!"
결국 배는 모두 불태워졌다. 하지만 제르모의 병력도 무사하진 못했다. 분노한 남부 상인들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은 탓이다.
'배가 모두 불타다니.'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르시드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신운성의 말대로 배를 타고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제르모의 지휘관이 모두 마족이라고 하며 죽이려하자 마르시드도 분노해버렸다.
울컥 치솟은 화를 다스리지 못해 죽어라 무기를 휘두르며 싸웠다. 북부가 영주들 간의 영지전으로 단련이 되어 있다면 남부인들은 부족 간의 대립으로 항상 싸웠다. 때문에 남부의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루는 것을 배웠다. 때문에 남부 상인들이 북부 상인들과 병력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남부 상인들의 피해도 무척 컸다. 살아남은 자들이 반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기사들은 무서웠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마르시드는 문득 신운성을 떠올렸다.
싸우는 모습을 떠올리니 전율이 솟았다. 기사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맹수처럼 상대의 약점을 순식간에 끊어놓았다.
강렬했다. 멀리서 보아도 싸우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단한 녀석.'
힘만 센 줄 알았는데 싸움도 잘했다. 호위로 쓴다면 딱 좋았다. 그리고 조용히 신운성의 뒤를 따르던 서은하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내렸다. 눈에 보이는 실적을 올리진 않았지만 신운성을 확실히 보조해주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하크. 이번에 내 호위가 되는 건 어떠냐?"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아내도 어떻게 안 될까요?"
"그래, 네 아내도 함께 써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신운성을 고용한 마르시드는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신뢰하게 되었다.
'저 녀석이 정말 복덩이야.'
싸움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시드가 신운성을 신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위험을 감지한 능력이었다.
'저 녀석만 곁에 두면 큰 일은 없겠어.'
갈색 피부를 가진 남부 상인들을 마족이란 혐의로 잡아들이려 했다. 이미 성황이 내린 명령이라면 아비트의 상황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그때 그냥 남아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마족이란 혐의를 받고 잡혔다면 일단 상점이 몰수 되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진 재산들도 모두 빼앗겼을 것이다. 나중에 혐의가 풀려 목숨을 건진다면 다행이지만 재산을 차지한 이들이 슬쩍 분위기를 조장한다면 마족이란 혐의를 받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계기를 준 것이 바로 신운성이었다. 신운성의 말을 들었기에 마르시드는 위험을 피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금치 못했다. 또한 자신의 상인으로서의 안목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코벵이 습격당하고 3일 후, 남부에서 한 척의 배가 들어왔다. 남부에서 올라온 상선은 항구의 상황을 보고 경악했다.
"뭐라고요? 남부인을 마족으로 선포했다고요?"
"그래, 우릴 모두 죽일 속셈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피부색만 가지고 마족 혐의를 씌우다니!"
원래 정확하게는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을 체포해 혐의를 밝힌다는 것이었지만 남부인들은 그게 그거라면서 성황을 비롯한 북부인들에게 불신을 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빨리 내려가서 이 일을 알려야 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세!"
"나도!"
남부 상인들은 저마다 배에 올라타길 원했지만 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배는 다시 돌아갔다. 남겨진 이들은 죽은 이들의 상품을 챙기고 제르모의 병력이 소지했던 무기를 정리했다.
"앞으로 코벵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상인들은 모여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코벵은 원래부터 영주가 없던 도시. 상인들이 북부와 교역을 하면서 편의 시설을 조금씩 갖추다가 형성된 도시였다. 하지만 이젠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교역을 할 것도 아닌데."
한 상인이 고민하지 않고 내놓은 의견에 바로 반박이 나왔다.
"하지만 버릴 순 없죠. 내버려둔다면 앞으로 여기가 북부인들의 침략 거점이 될 겁니다. 생각해 보시죠. 배로 한 번에 사막지대를 건너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중간 지점인 여기 코벵에서 한 번 정도 머물게 되죠. 차라리 이곳과 사막에서 북부인들의 남하를 막는 편이 낫습니다. 그럼 저들도 우릴 함부로 못할 겁니다."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거대한 사막이 존재했다. 사막은 교류에 거대한 장벽이 되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방어를 위한 방벽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차라리 여길 요새화 하자 그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길 빼앗긴다면 북부 놈들이 남부에 배를 타고 내려와 해안가를 초토화 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다를 지킨다고 해도 전부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배가 지나는 길목을 틀어막는 것이 최고였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 코벵을 요새로 만들도록 하죠."
"하지만 여길 요새로 만드는 자금은 어떻게 합니까?"
"부족들이 생각이 있다면 지원하겠지요."
"하지만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은 다 죽어도 자기만 괜찮으면 된다는 부족이 어디 한둘 입니까?"
"으음......."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고 그것으로 회의는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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