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 회: 인연의 고리 -- >
마르시드와 신운성이 배를 타고 아비트를 떠나고 5일도 지나지 않아서 항구 봉쇄 명령이 떨어졌다. 영주의 명령에 의해 항구는 봉쇄되었고 모든 상행위는 중지되었다. 상인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죽음의 숲에서 악마들이 나타나 성전이 선포 되었소. 협조 하시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성전이 선포 되었다는 말에 상인들은 꼬리를 말았다. 성전은 굉장히 위험한 말이었다. 자칫 하다가 악마의 추종자라는 소문이라도 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일가친척이 모두 잡혀 고문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고문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이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 뒤, 지노스와 데런을 비롯한 추적자들이 아비트에 들어섰다.
"여기서 갈색 피부를 가진 부부를 보았소?"
지노스는 관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실소를 머금었다. 길을 걸으며 힐끗 본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만 해도 상당했다.
'이래서야.'
남부인들의 피부가 진한 갈색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걸 노린 건가?'
남부인이 출입하는 아비트에서는 죽음의 숲을 벗어난 자들을 구분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신운성과 서은하에 대해 모르는 지노스는 악마들이 교활한 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과거 악마들이 등장하면 무차별 살인이 벌어졌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강해지는 악마들은 죽은 시체들까지 수하로 부렸다.
공포의 군대는 재앙과도 같았다. 그때마다 성기사들이 나서서 해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망자들은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직 초기라서 그런 걸까?'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초기라서 재앙으로 발전하기 전에 모두 처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보고 하자.'
지노스는 자신이 조사한 것을 토대로 보고를 올렸다.
성전의 선포로 인해 대륙은 혼란에 휩싸였다. 독실한 파우론의 신자들은 성전에 참여하길 원했다. 성전에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회였다.
영광된 죽음을 맞이하면 신의 곁에 설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믿는 신자들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싸움에 대한 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다.
한편, 현실적인 계산을 하는 영주들의 반응은 밋밋했다. 화끈하게 결정 내리는 것 없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이익이 없는 전쟁에 병사를 보내는 것은 손해였다. 손해는 곧 힘의 약화로 이어지고 힘이 약해지면 다른 영주에게 먹힌다.
영주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하지만 안 보낼 순 없었다. 보내지 않는다면 파우론의 신자들이 불만을 품게 되고 이는 영주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반 영지민의 경우에는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기사들이 반감을 품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 반감을 품고 밀어낼 명분으로 사용하면 곤란해진다.
그야말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에 한 영주는 은근히 눈치를 보며 성전에 참전 시킬 군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훈련 받은 기사나 병사가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얻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들인 '노예'로 구성된 병사들이었다.
"성전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 가서 싸워라. 그리고 살아남아 공을 세우면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
노예 부대의 탄생이었다.
노예들은 안 싸울 수 없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반항할 법도 했지만 성전이란 명분이 노예들을 억눌렀다. 노예들이 성전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반항한다면 곱게 볼 이들은 없었다. 화가 난 영주는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무기를 쥐었다고 반항하긴 어려웠다. 기사들은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예들은 성기사들의 지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자 대륙에는 노예병 광풍이 불었다. 노예를 보내고 전력을 아낄 수 있다면 차라리 노예를 보내는 편이 나았다. 노예는 노동력이었기에 생산력에 차질이 올 수 있지만 주변 영지로 쳐들어가 다시 노예를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 잃은 전력은 다시 채우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이러한 일들은 큰 후폭풍을 불러오기 마련이지만 영주들은 우선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할 뿐이었다.
남부. 코벵.
코벵은 교역 도시다. 사막 지대의 해안가에 세워진 도시는 어느 영지의 소속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상인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며 식수를 얻기 위해 머무르는 장소였던 것이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라고 해도 인구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대신 적은 인구가 가진 부는 꽤 컸다.
아비트를 비롯해 교역항으로부터 떠나온 배들이 코벵에 한 번 모여든다. 그럼 코벵에서 즉석으로 거래를 해서 자신들의 지역으로 가지고 갈 상품을 바꾸기도 한다. 어떤 상인은 남부로 가지 않고 코벵에서 물건을 다 처리하면 바로 북부로 돌아가기도 했다.
교역 루트를 정하는 것은 상인의 권한.
수많은 교역이 이루어지기에 코벵에는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런 코벵에 신운성과 서은하가 도착했다.
'정말 번잡하네.'
첫 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수많은 배들이 들어가고 나가며 뒤엉킨 것처럼 보였다. 부두에는 일꾼들로 가득했다. 그 옆은 바로 시장이었다.
시장은 거래를 위한 고함으로 시끄러웠다.
아수라장 같았다. 하지만 생기가 느껴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기분은 어때?"
마르시드의 말에 신운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묘합니다. 조금 불안하긴 한데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여긴 그럭저럭 안전한 거네."
"그럴지도 모르죠."
"좋아."
신운성의 말만 믿고 왔지만 마르시드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상인이 자신의 안목을 믿지 못하게 되면 남에게 의지하게 된다. 상인에게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남에게 의지하다보면 속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상이 되고픈 마르시드는 자신이 무모했나 싶기도 했지만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약 10일이 지났을 때 신운성을 완전히 신뢰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한 척의 배가 코벵에 들어섰다. 배는 평범한 교역선이 아니었다. 배가 정박하자 기사와 병사들이 내렸다.
"뭐야 저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일이기에 사람들은 모두 기사와 병사들을 보며 긴장했다. 어떤 영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교역 도시에 군대가 들어선 것은 경계할 일이었다.
지휘자로 보이는 이가 마지막에 내리자 코벵의 상인회 대표가 호위들을 이끌고 다가섰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우린 제르모에서 왔다."
"제르모? 그 곳 분들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제르모는 사막 끝에 존재하는 북부의 도시였다. 과거에는 남과 북을 잇는 교역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었지만 배를 이용한 교역이 늘어나며 점점 하락세였다. 현재는 사막의 부족들과 거래하는 이들만 찾는 정도로 변한 영지였다.
"악마들과 결탁한 자들을 추적 중이다."
"악마요?"
"소문은 들어봤겠지? 죽음의 숲에서 망자들이 다시 일어섰다. 성황께서는 성전을 명하셨다. 그러니 악마와 결탁한 마족들을 색출할 테니 협조해라."
"그렇습니까?"
상인회 대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성황이 성전을 선포했다면 상인으로서 안 따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르모의 기사가 한 말에 경악했다.
"갈색 피부를 가진 이들은 모두 마족 혐의가 있다. 순순히 잡힌다면 해치지 않겠다."
"무슨!"
상인회 대표는 경악했다.
코벵에 모인 상인들 중 6할이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인회 대표인 자신부터 갈색 피부를 가진 남부인이었다.
"지금 남부인에게 마족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겁니까?"
"그런 말 한 적 없다. 조사를 해보겠다는 거다."
상인회 대표는 갈등했다. 순순히 조사에 응한다면 해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뜻을 가지고 혐의를 뒤집어씌운다면?
당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악마와 연관된 일이니 쉽게 믿어줄 리가 없었다. 불합리한 판결은 수없이 많이 본 상인회 대표였다. 일이 순순히 잘 풀리란 법은 절대 없었다.
'이건 응해선 안 돼.'
상인회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뭔가 숨기고 있군. 마족일 가능성이 있다. 모두 잡아들여!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제르모의 지휘관이 명령하자 기사와 병사들이 날뛰었다.
"살려주시오!"
"꺼져!"
순순히 포기하고 잡히는 상인이 있는가 하면 악착같이 싸우는 상인도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호위 세력은 병사를 상대할 순 있어도 기사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이게 무슨!"
멀리서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던 마르시드는 깜짝 놀랐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마족이라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는 남부인 전체를 마족으로 의심한단 소리였다.
마족.
악마들에게 협력하는 존재는 언제나 혐오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성실한 파우론의 신자는 못 되어도 마족이 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마족으로 몰리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었다.
마르시드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그때 신운성이 무기를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뭐 하려고?"
"배까지 가려면 싸워야죠. 이대로 사막으로 가게 되면 죽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코벵은 드넓은 사막 지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항구였다. 제대로 준비도 없이 사막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사실 사막으로 가도 죽을 위험은 없었다. 쌓여있는 상점 포인트를 이용하면 먹고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마르시드를 끌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아무 것도 없는데 먹고 마실 것이 계속 생기면 악마라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원망을 신운성이 받게 될 것은 빤했다.
'앞으로 계속 혼자 싸울 순 없어.'
남부인들을 마족으로 취급하려는 제르모의 기사가 한 말에 신운성은 눈을 빛냈다.
이젠 혼자 싸울 필요가 없었다. 남부인들도 함께 싸우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시드가 중요했다. 마르시드를 통해 남부인과 친분을 빠르게 다지면 오러를 배우기도 더 쉬워지리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존재의 정체도 빨리 알 수 있겠지.'
일이 진행되면 어떤 식으로든 퀘스트가 내려 올 터였다.
모든 것이 빨리 정리된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더 빨라질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 해.'
희망이 보이자 신운성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마르시드를 열심히 설득했다.
"저 쪽은 기사도 있어!"
"수는 우리가 더 많죠. 싸우지 않으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됩니다!"
말을 하며 신운성만 망토를 벗어 던졌다. 서은하는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 제르모의 기사를 향해 달려가는 신운성의 뒤를 유령처럼 따랐다.
마르시드는 맹렬히 달리는 두 사람을 보다 저항하는 상인들 편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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