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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44화 (44/109)

< -- 44 회: 퀘스트 -- >

남쪽으로 점점 내려갈수록 불안한 기운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타넬호 남쪽에 위치한 크레스 산맥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리겔강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바다가 나왔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리겔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아비트'라는 항구 도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비트는 카르덴 영지에 속한 도시 중 하나로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진 영주가 다스리고 있는 곳이었다.

가슴 속의 불안감도 사라진데다 활발한 상업으로 인해 외지 사람이 많은 아비트는 두 사람이 자리를 잡기에 딱 좋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아비트에는 아주 가끔 신운성과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다."

"응."

서은하와 신운성은 정착하기로 정한 이후 바로 관리를 찾아갔다.

"저, 여기서 정착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아비트의 주민이 되려는 건가?"

"예."

관리는 이런 일을 자주 겪었는지 기계적으로 상대할 뿐이었다.

"일단 은화 30개씩 내면 준주민이 될 수 있다. 이후 세금을 내야하며 아비트를 벗어 날 수 없다. 아비트에서 30년을 살고 아이를 낳은 이후 관리자의 승인을 받는다면 아비트의 주민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신분을 확인하거나 따지는 일은 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관리가 허술한 것 같은데.'

하지만 주민이 아닌 '준주민'이라고 했다. 또한 아비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으니 30년 동안 아비트 안에만 살면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의미겠지.'

외지인이니 어쩌면 노동력을 착취당할 수도 있었다. 고용주나 이웃과 문제를 일으키면 가차 없이 자격을 박탈하고 쫓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 예상됐지만 신운성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돈으로 신분을 살 수 있다면 나쁜 거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이름은 하크. 여기 제 아내는 한나입니다."

"아내가 참 예쁘군."

얼굴을 보여줘야 했기에 신운성과 서은하는 후드를 벗었다. 관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표정관리가 빠르네.'

얼굴을 보여준 서은하는 빨리 후드를 썼다. 자신의 얼굴이 사고를 부르는 얼굴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크, 한나. 잠시 기다리면 증명패가 완성된다."

술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증명패가 나왔다. 나무로 된 증명패의 앞면에는 아비트라는 이름과 문장이 찍혀 있었고 뒷면에는 소지자의 이름과 취득한 날짜, 그리고 승인한 관리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거 잃어버리면 은화 30개 다시 내야 하니까 잘 보관하라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머물 곳이 없으면 부둣가의 슈넬이란 양초장이 집에 가봐. 싼 값에 방을 빌릴 수 있을 거야."

증명패를 받은 두 사람은 서둘러 관청을 나섰다. 이후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부두로 향했다.

"그런데 왜 하크랑 한나야?"

길을 걷던 서은하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냥 여기 식 가명이야. 우리 본명 쓰는 것보다 좋을 것 같아서. 너무 이질적이잖아."

"하긴 예전에 말했을 때 다들 특이하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름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 그냥 좀 아쉬워서."

서은하는 자신의 증명패 뒷면을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뒷면에는 '하크의 아내 한나'라고 찍혀있었다.

"설마 내 아내라고 찍힌 게 싫어?"

"그런 거 아니야."

서은하는 얼버무리고 대화주제를 바꿨다. 본명으로 부부를 증명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말을 하기가 조금 부끄러웠던 탓이다.

신운성은 관리가 말해준 슈넬이란 양초장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관리가 연결해준 사람이니 잘못해서 슈넬이란 사람과 문제가 생기면 불리해질 것 같아서였다.

'잠이야 어디서 자든 상관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지식을 쌓고 오러 연공법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일단 휴식을 위해 찾은 곳은 여관이었다. 외지인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숙박업이 발달해 있었다. 여관 일층은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위쪽에 방이 있었다.

대신 사용료가 조금 비쌌다.

"이대로 가다가는 은화 금방 다 쓰겠어."

"일자리라도 찾아야 하나? 여기서 취업 걱정을 하게 될 줄이야."

침대 하나만 달랑 있는 좁은 방을 하루 쓰는데 은화 한 개였다. 식사 같은 것은 따로 계산해야 했다.

두 사람은 좁은 침대에서 번갈아 잠을 청했다. 절대 동시에 잠드는 법이 없었다.

일자리는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이다 보니 일감이 넘쳤다. 원래는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었으나 아비트 마을이 소속된 카르덴의 영주가 수완을 발휘해 영주성에 버금가는 큰 도시로 발전시켰다.

마을에서 도시가 된 아비트는 계속 성장 중이었다. 바다를 통해 먼 곳에서 상품을 들여온 상품을 구하기 위해, 또는 다른 영지에서 이곳 아비트를 찾는 먼 곳의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계속 모이다보니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른 영지들도 항구가 있었지만 긴 리겔강을 끼고 있는 카르덴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 육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보다 편리하고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수송할 수 있다. 카르덴은 바로 바다로 향하는 리겔강의 끝에 자리한 곳에 위치한 아비트를 발전시켜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중요한 교역로에 위치해 있기에 아비트의 가치는 연일 높아져만 가는 상황이었다.

'일자리는 많지만 내가 원하는 일은 안 보이네.'

되도록 빨리 지식을 쌓기 위해선 책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직업이 좋았다. 하지만 아비트 내에는 책을 많이 모아놓고 파는 상인도 없을뿐더러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관리나 거래를 하는 상인 정도였다. 상인들도 흔히 볼 수 있는 상인이 아니었다. 영주들이 만드는 길드에 소속된 간부 정도 되는 이들뿐이었다.

길드란 특정 직업인들을 모아 소속시킨 집단이었다. 영주는 길드를 관리하며 세금을 걷는다. 길드에 소속된 장인들이나 상인들은 영주의 보호를 보장받는다.

길드에 소속된 상인과 그렇지 않은 상인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바로 이것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상인들이란 자신들이 물건을 가져와 파는 이들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도 되지 않았다. 다른 영지로 나가는 일도 별로 없다. 다른 영지로 가게 되면 영주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강도를 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한다.

신운성이 찾은 일자리들은 바로 이러한 영세한 상인들이 만들 일자리들이었다. 아비트에서 장사를 하면 멀리 물건을 팔러갈 필요가 없으니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들도 큰돈을 만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상품들은 모두 길드에서 독차지하지만 부스러기만 받아도 영세한 상인들 입장에서는 큰 이윤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신운성은 할 수 있다면 길드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신용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길드에 가입이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알아본 결과 준주민은 가입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나?'

가진 돈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수중에 가진 은화는 이제 5개가 남은 상황. 식사는 상점에서 싸게 구입해 먹고 있었다.

'아비트를 나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도시 내부에선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철저하게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해야만 생활 유지가 가능했다. 반면 도시 밖에선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을 가지고 상품으로 만들어 아비트에서 팔 수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많은 영세 상인들이 아비트에 와서 식품을 팔았다. 도시 사람들이 소비할 식재료들이었다. 길드에서는 이런 거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준주민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제약은 신운성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이었다.

"오늘은 부두에서 짐꾼 필요하다니까 거기서 일해야겠다."

"나도 일할까?"

"너 일하려면 후드 벗어야 할 텐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미안해."

"난 좋으니까 미안해 할 거 없어. 내 여자가 이렇게 예쁜 거잖아."

신운성과 서은하는 가볍게 키스했다. 숨결을 나누니 숨은 더욱 거칠어졌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 가슴을 자꾸 두드렸다. 손길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나 키스 이상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신운성은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서은하는 아쉬워하는 눈을 했지만 이해했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아이를 만드는 행위에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럼 여기 있을래?"

"아니, 그냥 오빠 일하는데 근처에 있을게. 혼자 있는 건 싫어."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이름이 하크라고?"

"하크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몸도 튼튼해 보이고 좋네. 열심히 하라고. 덴! 덴! 이 친구 데려가서 일 시켜!"

하루 은화 1개와 동화 30개짜리 일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짐꾼이 받는 돈보다는 훨씬 많지만 아비트의 높은 물가와 생활비를 고려하면 그렇게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하크라고? 일단 저기 푸대를 들어봐."

부대에는 곡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신운성은 어렵지 않게 푸대를 어깨에 짊어졌다.

"어라? 안 무거워?"

"별로요."

"그럼 하나 더?"

"네."

신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좀 더 요령을 부리는 것이 좋지만 정말 가벼웠기에 하나 더 들기로 했다.

푸대를 두 개나 짊어졌지만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짐꾼 조장이라는 덴이 감탄하는 것을 보고 더 들지는 않기로 했다. 적당히 일할 속셈이었다. 일을 남들보다 3배로 한다고 일당을 3배로 주는 것도 아니었다. 푸대를 두 개 든 이유는 굉장히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곡물 푸대에 이어 여러 가지 짐들을 배에 옮겨 실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중간에 식사가 나왔다. 식사라고 해봐야 멀건 스프에 딱딱한 빵이 전부였지만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공짜 점심을 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일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되었다. 노을이 점점 붉어지며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일은 끝났다.

"여기 일당. 내일도 또 오라고."

덴은 어깨를 쳐주며 칭찬했다. 힘 센 일꾼이 있으니 누군가 조금 더 놀았을 것이다. 아니면 일꾼을 덜 쓰고 돈을 더 벌었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확답은 주지 않고 인사만 하고 신운성은 돌아섰다.

"오빠, 수고했어."

어느 새 서은하가 가까이 다가와 방패와 메이스를 건넸다. 망토를 쓰고 방패를 등에 진 후 메이스는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그러자 일꾼이 아닌 위협적인 전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꾼들은 신운성에게 슬쩍 다가오다 발걸음을 돌렸다. 친분이라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상대가 무시무시한 복장을 하니 두려웠다.

"오늘은 좀 더 싸게 묵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신운성과 서은하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아비트의 거리로 향했다.

창문을 활짝 연 주점들의 불빛이 손님과 나방을 불러들었다. 하루 일과를 끝낸 일꾼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휴식을 취하는 소리로 거리가 떠들썩했다.

하지만 한 걸음만 떠들썩한 거리를 벗어나면 고요한 거리가 나왔다.

흥청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상점가는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안에선 아직도 불을 켜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손님을 받고 있지는 않았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상점가를 돌며 싼 방을 구했다. 여관과는 달리 장기 월세를 주로 받는 이들이 많았다.

한참 헤맨 끝에 두 사람은 무기점 삼층에 1달에 은화 10개만 내면 되는 방을 구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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