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 회: 탈출 -- >
내성 근처에 도착했지만 난감했다. 경계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정문으로는 가망이 없기에 일꾼들이 일하는 후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후문의 상황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문만큼은 아니지만 보초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야 해.'
시간이 흐르며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도시라고 하지만 산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작정하고 뒤지는 상대를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바깥쪽으로 향했다면 산의 중턱 어딘가에 계속 숨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계속 전투가 벌어질 지역에 몸을 숨기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결국 잠시 몸을 피하기에는 내성이 최고였다.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벽은?'
내성의 벽을 살폈다. 벽은 상당히 높았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높이였다.
'쉽게 올라가지도 못하겠네.'
성벽 위에는 경계가 심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벽을 타기도 어려웠다. 올라가다가 실수하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계속해서 시간이 줄어들었다.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
"오빠, 저긴 어때?"
서은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강가 쪽으로 세워진 성벽과 절벽 사이에 있는 공간이었다. 폭은 꽤 넓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저긴 보초가 있어서 안 돼."
"하지만 잠깐 숨을 수 있지 않을까?"
"숨어?"
"응. 어쩌면 절벽 쪽으로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서은하의 말 대로였다. 신운성은 바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인 두 사람은 절벽과 성벽 사이에 있는 빈 공간에 들어섰다. 보초가 두 명 중간에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서 있었고 한 명은 벽에 기댄 상태로 뭔가 얘기하는 중이었다.
신운성은 무기를 빼들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걸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적을 죽여야 한다는 살심이 몸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두근거림이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천천히 걸었다. 심장은 뜨거웠지만 머리는 최대한 차갑게 하기 위해 가볍게 심호흡이 이어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안으로 들어가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조용히 움직인 두 사람의 움직임은 보초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잡담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열 걸음 정도 남은 상태가 되자 신운성은 몸을 날렸다.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악어처럼 재빠르게 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소음이 일었다. 보초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반갑게 인사하는 것은 메이스였다.
서있던 보초의 머리가 투구와 함께 박살났다. 뒤이어 앉아 있던 보초가 놀라 입을 벌리려 할 때 메이스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이었다.
두 사람의 머리가 박살났다.
"후우!"
무섭게 뛰는 심장을 달래기 위한 심호흡이 토해졌다.
신운성은 절벽 밑을 살펴보았다. 아래로 뛰어내려서 살 수 있나 알고 싶어서였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절벽 아래로 뛰면 망가진 땅에 떨어질 뿐이었다. 절벽과 강 사이에는 약간의 땅이 있었는데 거리가 상당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건 안 되겠다."
장비도 없이 절벽을 타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피해야했다.
"오빠, 이 사람들 체격이 우리랑 비슷해."
"벗기자."
서은하의 뜻은 명백했다. 병사로 위장하는 것. 어둠 속에서 손전등에 의지해 옷을 빠르게 벗겼다. 머리가 박살나면서 흐른 피가 옷을 적신 상태라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입자."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병사의 체인메일을 위에 뒤집어쓰고 겉에 병사임을 알리는 천을 뒤집어썼다. 옷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기다란 사각의 천 가운데에는 머리를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천을 뒤집어쓰고 병사의 벨트를 묶으니 복장이 완성되었다. 이후 무기를 들었다. 병사들이 가진 약간의 돈이 담긴 작은 주머니까지 챙긴 뒤에 시체는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무기는 어떻게 해?"
병사로 위장했기에 메이스와 방패는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병사의 장비가 아닌 것을 들고 다닌다면 발각되기 쉬웠다.
"버리고 가자. 나중에 또 사면 돼."
무기는 상점에서 또 구하면 그만이었다.
"가자."
투구는 없고 옷은 피투성이. 오래할 수 없는 위장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동안에는 먹힐 위장이었다.
서둘러 움직인 두 사람은 새로운 표적을 찾아 움직였다.
"되도록 내성에서 먼 곳으로 가보자."
신운성의 말에 서은하는 그저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병사의 무기인 창을 들고 어둠 속을 달리는 두 사람은 멀리서 볼 땐 그저 수색을 하는 병사로 보일 뿐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을 보고도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던 신운성은 한 무리의 병사를 발견했다.
멀리서 두 사람은 천천히 달려서 접근했다.
"이집은 비었어? 그쪽은 어때?"
어두운 상황에서 동료로 착각한 병사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저쪽에서 시체를 발견했어."
"뭐?"
병사 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신운성은 창을 휘둘러 한 명의 가슴을 찔렀다. 방심하고 있던 다른 병사는 혼란에 빠져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은하가 달려들어 병사를 찔러죽었다.
뒤에 남아있던 병사 하나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투구만 챙겨서 가자."
투구를 벗긴 두 사람은 머리에 썼다. 투구는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쓰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바가지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가죽 끈으로 묶으면 끝이었다.
"돌아가자."
어두운 골목을 타고 두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얼마 안 가 현장에 기사들이 도착했지만 신운성과 서은하는 내성쪽으로 도망친 뒤였다.
일꾼들이 드나드는 내성의 후문.
신운성은 서은하와 함께 태연하게 접근했다.
"뭐야? 교대 시간 벌써야?"
"어. 먼저 가 봐."
횃불이 근처에 있긴 했지만 얼굴을 환히 비출 정도는 아니었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어? 저거 뭐야?"
어느 정도 접근한 신운성은 갑자기 병사들의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그때 창을 버리고 단검을 빼든 신운성과 서은하가 달려들어 목에 찔러 넣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피가 흐르지 않게 단검은 그대로 놔두곤 다시 병사임을 증명하는 천조가리를 갈아입었다.
"들어가자."
죽은 병사의 허리춤에 메여있던 단검과 돈주머니 그리고 열쇠를 챙긴 두 사람은 내성으로 들어가는 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
"몰라."
후문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과 내성의 후문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적당히 숨을까? 아니면 안으로 들어갈까?'
계속해서 내성에 숨어있는 것은 위험했다. 밖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방치 되어 있으니 교대 시간이 되면 누군가 내성에 침입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안에는 기사라는 것들이 많을지도 모르는데.'
정확한 병력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기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 뿐.
'고민되네.'
어디 창고 같은 곳에 숨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숨기만 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야. 쫓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쫓기는 상황을 없애야 해.'
신운성은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지어진 커다란 마구간을 발견했다.
'저거다!'
자동차가 없는 세계였다. 그렇다면 말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었다.
신운성은 마구간으로 접근했다. 근처에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신운성은 지체하지 않고 마구간에 불을 질렀다.
"가자."
불을 지른 이유는 간단했다. 침입자가 내성으로 침입해 피해를 주려 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불이 났으니 내성 밖의 수색은 중단 되겠지. 알폰이나 도스의 집으로 돌아가 적당히 숨어 있으면 될 거야.'
시체가 발견 되어서 수색이 시작 되었다. 신운성은 자신이 이외에 다른 존재가 살인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가서 숨을 생각을 했다.
'이미 수색한 곳이라면 다시 찾아올 확률은 높지 않다.'
어쩌면 다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범인을 오랫동안 찾지 못했을 때 다시 찾으리라 예상했다. 더구나 일부러 불까지 질렀으니 범인을 찾지 못하면 어디론가 도망쳤다고 판단하리란 계산도 깔려 있었다. 물론 예상이 모두 빗나간다면 그땐 다른 길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는 신운성이었다.
'당분간 계속 숨바꼭질을 할 수밖에 없다.'
병사 복장을 하고 어둠 속에서 돌아다닌다면 쉽게 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신운성은 그런 빈틈을 노리고 계속 술래잡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는 소릴 들은 어닐은 크게 노했다.
"대체 뭣들 한 거야! 마구간에 불이 나다니!"
기사들이 수색을 위해 성 밖으로 말을 타고 나간 덕분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마리가 난동을 부리다 다리가 부러졌다. 타 죽은 말은 없지만 다리가 부러진 말은 쓸모가 없었다. 운 좋게 회복되면 짐말로나 쓰지 전투마로는 실격이었다.
"외각 경비를 더 늘려!"
전쟁이 시작되고 어닐은 처음으로 냉정을 잃었다. 마구간에 불이 난 것은 계산 밖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성 경비가 더 허술해질 수 있습니다."
"내성으로 들어오는 문은 이제부터 기사단이 지킨다!"
경비 둘이 시체로 발견 됐다. 그리고 둘이 실종되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경비들은 시체를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다.
"절벽 쪽으로도 경비를 세운다!"
'한 방 먹었다. 애송이.'
어닐은 이를 갈았다. 어닐의 생각에 게스톤이 기사들을 이용해 절벽을 타고 올라와 기습한 걸로만 보였다. 위험한 절벽을 기어 올라올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혹시나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경비를 세워놓긴 하지만 제일 안전하기 때문에 허술하게 관리하는 면이 컸다.
'받았으면 되갚아 주는 게 예의지.'
어닐은 기사들로 이뤄진 기습 부대를 만들었다. 상대가 밤마다 기습을 가해오니 반대로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네 놈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다.'
하지만 어닐의 기습부대는 바로 출진하지 못했다. 준비를 마치자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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