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 회: 탈출 -- >
저녁이 거의 다 됐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나팔 소리가 울리며 도시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전원 전투 준비!"
"여자와 아이들은 내성으로!"
도시에 비상이 걸렸다. 신운성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낯선 이방인이 뒤섞인다면 금방 이상을 알게 될 터. 숨는 것이 상책이었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누군가 도스를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병사의 빈자리는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인지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렸다.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밖은 여기저기 걸린 횃불로 인해 밝은 상태였다.
"이대로 움직이긴 힘들겠다."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누군가의 주목을 받게 생겼다. 산을 타고 내려가는 방법이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들키지 않고 내려갈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외곽에 도착하면 발각 될 위험이 컸다.
"적당히 때를 봐서 나가기로 하고 일단 회화부터 공부하자."
밖의 상황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처지.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신운성은 서은하에게 계속 말을 걸어 새로운 말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케토의 기마병이 도착하고 아침이 찾아오자 병력 배치가 훤히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 기마병만 온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보병들이 어느새 와 있는 상태.
밖을 내다보던 티몬의 영주는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 움직이는 군."
티몬의 영주. 어닐 베스토 반 티몬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케토가 클리돈과 결혼 동맹을 맺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티몬이었다. 케토와는 케케묵은 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영주의 입장에서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금물이었다.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베스토 가문의 가훈이었다.
클리돈 영주의 영애를 일부러 납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 놈들이 합심해서 더 크게 되는 걸 볼 수는 없지.'
클리돈 영지는 작았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장사를 했다. 클리돈의 광산에서 나는 철은 꽤 질이 좋았기에 호평을 받았다. 철광석을 자신들만의 기술로 제련해 얻은 철을 팔아 주변에 돈을 뿌리며 살아남는 것이었다.
때문에 만약 케토와 결혼 동맹을 맺게 된다면 케토에 질 좋은 철이 흘러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질 좋은 철로 무기를 만들어 무장한다면 전력이 상승한다. 당장에는 별 문제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얻기 위해 방해했다.
"신부는 어떻게 했지?"
"아직 버티고 있습니다."
"시간은 있으니까 문제가 없도록 해. 사제 앞에서 거절이라도 한다면 말짱 헛일이니까."
결혼을 위해서는 사제의 축복이 필요했다. 진짜 신성력을 쓰는 사제가 아닌 결혼을 주관하기 위한 사제라서 신성력은 없지만 성수로 축복을 내리는 것은 가능했다.
이들의 축복이 없는 결혼은 파우론의 신자들에게는 무효였다.
성수를 통해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의 결혼만이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결혼의 맹세.
사제 앞에서 하는 맹세는 신을 향한 맹세다.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사제에게 맹세를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뇌물을 주고 매수한다면 그냥 축복해주었다며 결혼을 증명해주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발각될 경우에는 신을 기만한 행위라고 해서 심각한 문제로 번진다.
무엇보다 결혼한 당사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비리를 밝히려 한다면 귀찮아진다. 그러니 결혼의 맹세만큼은 본인이 스스로 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밖에 몰려온 놈들은 어쩌실 겁니까?"
"식량은 충분히 비축해두었지?"
"1년은 충분합니다."
"그럼 됐어. 배는 수로 안으로 들이고 문으로 막아. 그쪽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감시 잘하고."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신부에게 전투를 참관하게 해."
"그러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케토 놈들이 죽였다고 소문내야지. 신부가 위험한데도 일부러 쏴 죽인 놈들! 이렇게."
"그러다 클리돈이 복수라도 하겠다고 날뛰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 못해. 그 놈들은."
어닐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여기까지 쳐들어올 수 있는 전력이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고 남에게 부탁을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그저 우리에 대해 악담을 하며 남들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기나 하겠지."
영주들은 바보가 아니다. 가끔 정의를 부르짖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 때나 나서서 전쟁을 벌이진 않는다.
전쟁이란 피를 흘리는 행위.
대가가 없다면 전쟁을 벌이는 행위는 무익했다. 좀 얄미운 놈이 있으면 이런 저런 일로 괴롭혀주기는 하겠지만 전쟁까지 가지는 않는다.
전쟁을 치르게 되면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전력 약화.
사방에 적이 가득한 상황에서 함부로 전쟁을 벌여 전력이 약화된다면 오히려 자신이 먹이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니 결국 클리돈이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떠들어도 직접 움직여줄 영주는 매우 적었다.
"영주님은 역시 영명하십니다."
"그렇지? 그럼 슬슬 약이나 올리러 가보자고."
전투라고 보기 힘든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세 좋게 티몬의 앞까지 쳐들어온 케토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산 위에 위치한 티몬의 성을 함락하려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일단 주변부터 청소해!"
게스톤의 명령에 기마병들이 주변을 휩쓸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티몬의 정찰 마을을 박살냈다.
보병은 산을 둘러쌌다. 포위망을 구축해 상대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티몬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식수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식량도 대량으로 저장해놓았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게스톤은 그대로 포위망을 구축해 상대를 말려죽일 생각이었다.
또한 기회를 봐서 티몬의 배를 모조리 부수고 부두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루스강의 통행세를 케토가 걷는 것도 가능했다.
"몸이 날랜 병사들을 따로 뽑아 둬!"
"넷!"
명령을 내린 게스톤은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산 아래에서 떠들어봐야 산 위까지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때문에 도발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하는 편이 더 좋았다.
"거기 맨 앞에 병사들! 방패 들고 전진!"
게스톤은 많이 보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점령하기 위해 마구 병사를 몰아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방패를 들고 전진하자 산 위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멈춰! 다시 후퇴!"
병사들을 움직인 것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서.
말단 병사의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는 일이겠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영주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영지민이었다. 물론 거부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영주와 싸워서 이기거나 영지에서 살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불 피우고 식사 준비한다! 맨 앞 열은 편안하게 쉬도록!"
게스톤은 일부러 병사들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도록 했다. 해가 저물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롭게 불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전쟁을 하러 나온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태한 모습을 보게 되면 공격하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이용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어닐은 걸려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보내다보니 해가 졌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자 게스톤은 미리 뽑아둔 병사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산에 접근해서 올라간다. 굳이 무리하게 안으로 들어갈 것 없다. 그냥 외곽에서 경비병 몇 명 잡아 죽이고 돌아와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야밤에 공격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 보낸 병사들이 모두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밤에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중요했다.
밤에도 상대가 푹 쉬지 못하게 괴롭힐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것은 공격하는 쪽의 권리나 다름없었다. 수비하는 쪽이 반대로 밖으로 나와 공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이라면 게스톤은 대환영이었다.
싸우기 힘든 산 위로 쳐들어가기보다 산 아래에서 상대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자존심이 상한 게스톤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밤이 깊어지자 소란이 일었다.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했나봐."
"보러 가자."
싸우는 소리가 나니 신운성은 궁금해졌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였다. 무엇보다 기회가 있다면 탈출하는 것도 좋은 수였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펴보니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신운성과 서은하는 조용히 횃불이 밝히지 못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은밀하게 움직인 두 사람은 전투 소리가 나는 곳을 멀리서 살펴봤다. 횃불 아래 악을 쓰며 싸우는 이들이 보였다.
"빨리! 놈들이 쳐들어왔다!"
"움직여!"
일단의 병사들이 자다 말고 일어나 지원을 가는 모습도 보였다.
구석에 숨은 신운성은 마치 검은 고양이 같았다. 어둠 속에 숨어 눈만 빛나는 검은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반대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
"가보자."
비전투시의 감시병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전투시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도스에게 들은 바가 없었다. 갑자기 전투가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누군가 붙잡고 협박하는 방법이 있지만 문제가 될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두 사람이었다.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산 위에 만들어진 도시라서 공간이 좁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 건물들이 모두 높았고 골목도 많았다. 건물들이 촘촘하게 지어져 있다 보니 생긴 골목이었다. 이러한 구조물은 좋은 것이 대규모 병력이 쳐들어오면 방어에 유리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군의 병력 이동에 별로 좋지 않다는 단점도 분명 존재했다.
겨우 반대쪽에 도착한 신운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반대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예비대만 지원을 가나 보군.'
"이제 어떻게 해?"
"일단 숨을 곳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도 오지 않을 곳 같은 곳으로."
전투만 아니었다면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 왔던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산을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빌어먹을. 행운의 기어를 얻었는데 왜 이 꼴이야?'
신운성은 자신의 황금빛 기어를 보며 속으로 욕했다.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은밀하게 움직인 두 사람은 구석에 지어진 허름한 집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빈집이 틀림없었다.
"좀 쉬자."
집구석에 있는 작은 창고용 골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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