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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기어-27화 (27/109)

< -- 27 회: 탈출 -- >

알폰이 순순히 대답하자 서은하도 알약을 먹고 같이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오빠, 난 오빠처럼 안 되는데?"

습득 속도가 전혀 달랐다. 신운성은 말을 듣는 순간 알아들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언어습득 속도는 알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똑같은 약을 먹고도 서은하는 느렸다.

"오빠가 한 10배 정도 빨리 배우는 거 같다. 아니 그것보다 더 한 거 같아."

둘 사이에 차이라면 오직 하나. 기어의 색깔뿐이었다.

'이게 분명 뭔가 기능을 하는 걸 거야.'

어렴풋이 예측은 가능했지만 더 자세히 알 순 없었다.

"그럼 나머지 알약은 만약을 위해 아껴둬. 시간제한이 있으니까."

서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한 회화 위주로 반복해서 학습했다. 알폰은 졸지에 어학교사 역할을 해야 했지만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 했다.

악마, 혹은 악마의 하수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알폰에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경전에 나오는 묘사에 의하면 아주 작은 실수를 하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존재들이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이 되자 그냥 믿게 되었다.

알폰은 하루 종일 시달렸다. 수많을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답해야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을 허락해주었다는 것. 바로 죽일 생각이라면 할 리가 없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여긴 어디지?"

"티몬입니다."

알약의 효과가 떨어지는 서은하 대신 신운성이 나서서 대화를 주도했다. 직접 대화도 좋지만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에 신운성은 빠르게 먼저 정보를 습득하기로 했다.

"티몬? 도시의 이름인가?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지?"

"영주님의 이름은 베스토 가문의 어닐님이십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티몬이라 불리는 영지의 주인은 어닐 베스토 반 티몬. 신운성의 예상과는 달리 도적 집단은 아니었다. 정확한 인구는 알폰도 몰랐다. 병사들의 숫자도 몰랐다. 중요한 것들을 알기에 알폰의 신분이 너무 미천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북쪽에 숲이 있다. 거긴 뭐라고 불리지?"

"허억! 부, 북쪽의 수, 수, 숲이라고요?"

신운성이 자신이 왔던 곳을 언급하자 알폰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두려워했다.

"대답해."

"그, 그, 그, 그곳은 '죽음의 숲'입니다."

'죽음의 숲? 어울리는 이름이네.'

정신 차리자 좀비들이 있던 숲. 죽음의 숲이라는 이름이 딱 알맞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지?"

"그, 그게."

알폰의 떨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분명 무엇인가 있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이 보였다. 숲을 거론하자 혼비백산했다.

"빨리 대답해. 안 그럼 죽인다."

"그곳은 저주 받은 곳입니다. 악마들이 나타나는 숲입니다!"

"악마? 무슨 얘기지?"

"경전에 나오는 얘깁니다. 파우론님을 거역하는 사악한 악마들이 나타나는 숲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은 평생 고통 받는 지옥입니다."

"파우론?"

"영혼의 주인이시며 세계를 창조하신 거룩한 분....... 이라고 경전에 적혀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악마로 생각한다는 거네?'

알폰이 겁에 질린 이유를 알게 되자 신운성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죽음의 숲에 갑자기 수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가 악마로 여겨진다는 소리잖아?'

어떤 존재가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우론이란 신을 적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악마라. 신에 대항하는 존재. 그렇다면 우리가 하게 될 일은 신과 싸우는 건가? 말도 안 돼.'

인간인 신운성이 알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이 곳의 인간들이 전부 파우론의 신자라면?'

"파우론을 믿는 자는 몇 명이나 되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세계에 파우론이란 신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는 거다."

알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을 들으면 악마가 화 낼 텐데. 이제 이렇게 죽는 건가?'

절망이 알폰의 얼굴에 번졌다.

대답은 안하고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신운성은 협박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음의 숲에다 던져버리겠다."

"헉! 죄송합니다. 제발 그것만은!"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숲을 방황하는 저주를 받고 싶지 않았던 알폰은 서둘러 대답했다.

"거의 대부분 믿습니다. 파우론님을 믿지는 않아도 대부분 경의는 표합니다."

"너도 믿나?"

"저, 저는........"

믿고 있지만 두려워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에 답은 나왔다. 신운성은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날 악마로 여기다니.'

멀쩡한 인간이었다.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난 인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알폰이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운성은 다른 방식으로 괴롭혀주고 싶어졌다.

"파우론을 부정해라. 그럼 살려주겠다."

인간이었던 자신을 악마로 만들었다. 어딘가에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딴 곳에 떨어트린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또 다른 사실 하나. 그것은 튜토리얼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든 뭐든 살기 위해선 죽이라는 뜻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 더구나 이곳은 파우론이란 신이 존재하는 곳.

이 세계의 신과 대립하게 된다면 모든 인간과 척을 지고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악마 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저, 저는........"

알폰이 말을 더듬었다. 신을 부정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평소에는 별로 믿지 않았지만 악마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앞에 두니 신의 존재를 더욱 믿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빨리 대답해라. 죽음의 숲으로 끌고 가기 전에."

단순한 화풀이였다. 하지만 알폰은 눈물을 흘리며 입만 벙긋거렸다. 신을 부정하게 되면 어차피 저주를 받게 된다고 알고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답해라."

신운성이 계속 재촉하니 알폰은 결국 선택했다. 하지만 의외의 선택이었다.

"절 죽여주세요. 제발. 그냥 절 죽여주세요."

저주를 받기보다 죽음을 택했다. 저주가 죽음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선택에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왜 죽여 달라는 거야? 신을 부정하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

의문을 전하니 대답이 돌아왔다. 저주가 더 무섭다고 했다.

신을 부정해도 저주 받고 믿음을 지켜도 저주 받는 상황. 당연히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쯧."

기분이 나빴지만 신운성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단순한 화풀이에 더 시간을 쓸 생각이 없었다.

"더 자세히 아는 대로 다 토해내."

신운성은 곧 다른 것들을 물어보았다. 알폰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무기를 만드는 데 쓰는 자신만의 비법까지 알려주었다.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티몬이란 도시의 지리와 알폰의 인간관계 그리고 파우론이란 신에 대해 조금 알아낸 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뽑아낼 것이 없게 되자 신운성은 알폰의 처리를 놓고 고심했다.

'죽일까? 살릴까?'

죽일 이유는 있었다.

'악마가 나타났다고 떠들고 다니면 수색이 시작되겠지. 그럼 나만 피곤해진다.'

살릴 이유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내가 널 왜 살려줘야 하는지 말해봐."

알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신을 부정할 수 없으니 악마를 따를 수 없다는 건가?"

대답은 없었다. 침묵. 긍정의 침묵이었다.

"난 악마가 아냐. 인간이다."

진실을 말해보았지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죽여 달라고 했으니 죽여주겠다."

신운성은 심장에 단검을 박았다. 알폰의 집에서 있던 단검이었다. 심장에 단검이 박히는 순간 알폰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거기까지였다.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죽였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졸지에 악마가 되다니.'

기어의 기능 중 하나인 외모 변형.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면 분명 외모에도 영향이 오게 되어있었다. 벌써 덩치도 더 커졌고 머리카락 색깔도 바뀌었다. 이대로 지구로 돌아간다면 가족들도 쉽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피부색이 바뀐 것만으로 분위기가 확 변했기 때문이었다.

"오빠, 왜 그래?"

어두운 표정을 본 서은하는 조심스레 다가와 볼을 쓰다듬었다. 위로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무래도 좆 된 거 같다."

"응?"

신운성은 알아낸 정보를 모두 알려주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파우론이란 신에 대항해 이 세계에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가 악마라니."

"아무래도 그렇게 돌아가는 거 같아."

서은하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해?"

"일단 살아남아야지."

"하지만 그 신하고 싸우게 되면 죽게 되지 않겠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운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말자. 억울하잖아. 이대로 죽기에는."

"오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꼭 행복해지자."

다짐과 함께 이루어진 포옹. 인간이 체온이 두 사람의 얼어붙던 마음을 조금 녹여주었다.

"살 수 있어. 나만 믿어."

"응."

긴 포옹 끝에 이뤄진 것은 아주 짧은 키스.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 깃든 키스였다.

"얼른 다른 사람 찾아보자."

키스 이후 신운성은 알폰의 재산을 뒤져서 챙겼다. 일부러 집안을 뒤진 흔적을 남겼다.

어둠이 내림과 동시에 떠난 두 사람은 다른 표적을 찾아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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