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회: 생사의 경계선 -- >
한편, 성주혁은 휴식을 취하며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탁 트인 주변에는 약간 솟아난 언덕 외에는 보이는 것들이 없었다.
허허벌판.
지평선이 한 눈에 다 보인다는 사실이 이리도 좋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좋다."
잠을 자고 싶다고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지나치게 긴장했던 것이 원인일까? 몸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 아무 것도 없이 잠을 자야 하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몸이 움찔거린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의 불빛에 의지해 좀비들을 처리하며 나아가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사방이 온통 좀비였다. 끔찍한 상황. 죽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던 순간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서 그냥 자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성주혁과 마찬가지로 잠 못 드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조형민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잠 안 오냐?"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진짜 좋다."
다른 말은 더 떠오르지 않았다. 성주혁은 좀비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만끽했다. 하지만 성주혁과 달리 조형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떻게 하긴 이 근처에 거점을 만들고 사람들을 구해야지."
"너 답다."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는 성주혁. 조형민은 그런 성주혁이 약간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네 뜻대로 따라줄까?"
"그러지 않겠어?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너무나 낙천적인 대답이었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 사람들도 떠났잖아. 어쩌면 떠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래도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하고 싶다. 여긴 우리가 살던 세계가 아니잖아. 그럼 그 숲에 남겨진 이들이 우리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이란 소린데. 이곳에서 살려면 우리끼리 뭉쳐야지."
"사람들 생각은 다를 수 있어."
"그건 나중에 생각해봐야지. 일단 쉬자."
조형민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성주혁의 말대로 지금은 쉬어야 할 때.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덮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이후 피로에 젖은 뇌는 슬며시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한 남자가 깨어났다. 일어난 남자는 주변에 있던 이들을 조용히 깨웠다.
"얼른 일어나."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이며 사람들을 깨웠다. 일어난 사람은 4명.
4명의 남자는 주위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빨리 하자."
허공에 손을 뻗은 이들은 식칼을 꺼내 쥐었다. 인벤토리에 숨겨놓았던 비상시를 대비한 무기를 쥐자 눈빛이 변했다.
동료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살의가 담긴 눈을 한 이들은 조용히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선 이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입을 막고 목을 벴다.
상처를 입고 깨어난 사람은 놀라서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몇 번 몸부림치다 끝이었다. 입이 막힌 상태라 공기 새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정말 간단했다.
죽은 이들의 가슴 위에는 기어가 놓여 있었다.
살인자들은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기어를 합성했다. 그리고 동전을 주운 뒤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5차례 정도 반복했을 때였다.
살인자들과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자던 이가 일어났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웠던 것이다. 일어나서 일을 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먼저 일어난 이들을 잠결에 보았다. 그러나 살인자들의 손에 들린 식칼과 이미 죽은 이들의 모습을 본 순간 놀라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
제대로 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소통 수단 중 하나인 비명. 위험이 있을 때는 어떤 단어를 말하는 것보다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통이다.
금방 일어난 남자가 비명을 지르자 살인자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싸워서 모조리 죽이는 방법이 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칼에 베이면 상처를 입는다. 때문에 안전을 위해 도망쳤다.
살인자들이 도망치고 난 이후 일어난 조형민과 성주혁은 분노했다.
"어떻게! 개새끼들!"
조형민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분노했다. 반면 성주혁은 멍하니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죽은 이들 중 눈을 뜬 상태로 죽은 이들이 꽤 됐다.
성주혁은 일일이 그들의 눈을 감겨주었다.
"죄송합니다."
눈을 감겨주는 일을 끝낸 성주혁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다 제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어느새 리더처럼 말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성주혁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도 일행의 리더이자 영웅이었다. 항상 사람들을 다독이며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는 지금부터 그 놈들을 잡으러 갈 겁니다. 저와 함께하실 분만 따라오세요."
성주혁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라나서려 했다. 그때 성주혁의 입이 재차 열렸다.
"단, 이번에 함께 가게 되면 배신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무리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순간 배신으로 간주하고 세계 끝까지 추적해서 반드시 죽일 겁니다."
말을 하는 성주혁의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배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전우를 배신한 것에 대해 성주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더불어 자신의 안이했던 생각도 돌아볼 수 있었다.
문득 신운성과 서은하가 떠올랐다. 아무리 잡아도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냥 떠났던 사람들. 두 사람을 떠올리자 살인자들에 대한 살의가 더욱 치솟았다.
'차라리 그냥 가지.'
함께 하기 싫었다면 떠나면 그만이었다. 뜻이 다르면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냥 그렇게 갈라서 각자 제 갈 길 가면 된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잠든 틈에 죽이고 기어와 동전을 챙겨서 도망쳤다.
함께 싸웠던 전우라면 이럴 순 없었다. 목숨을 걸었던 신뢰를 배신한 것이다.
'용서 할 수 없어.'
배신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해서 성주혁의 말은 조금 과격하게 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성주혁이 느끼는 것처럼 일행 모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 추적합시다."
살인이 일어나기 한참 전.
신운성과 서은하는 외모 변형을 적용해 보았다. 순간 빛이 두 사람을 감싸며 변화가 생겼다.
신운성의 키는 더욱 커졌다. 190cm의 키에 날렵하지만 근육으로 뒤덮인 몸이 되었다. 피부는 좀 더 진한 갈색이 되었지만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금발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오빠?"
서은하는 그런 신운성의 변화에 깜짝 놀랐다.
반면, 서은하를 바라보는 신운성도 깜짝 놀랐다. 서은하의 머리카락이 은발로 변해있었다.
"서은하?"
"오빠 맞아?"
"그래. 그런데 너......."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서은하의 살이 엄청 빠졌다. 지금까지는 뚱뚱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모습이 완벽하게 변했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허벅지와 엉덩이는 탄력이 넘쳐 보였다. 허리는 잘록했고 가슴은 풍만했다. 갑자기 살이 빠져서 서은하가 입었던 옷들이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예쁘다.
신운성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오빠."
"왜?"
"그......."
갑자기 변한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 두 사람은 낯선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서은하는 신운성의 국부를 힐끗 보며 얼굴을 붉혔다. 신운성이 변한 모습은 멋있었다. 갑자기 커지며 옷들이 다 찢어지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옷을 찢고 드러난 것은 탄탄한 근육들.
더구나 몸 중심의 그것은 단단하게 일어선 모습이었다. 자신을 보고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서은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신운성은 가만히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서은하였다.
신운성의 앞에 선 서은하는 가만히 품에 안겼다. 팔이 저절로 움직여 서로를 끌어안게 되었다. 키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더욱 흥분하며 서은하의 옷을 벗기려던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이었다. 열기가 살짝 식은 신운성의 흥분이 아주 살짝 가라앉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신을 차리기에는.
'안 돼.'
신운성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있었다. 구조물 안에서 정사를 나누고 잠을 자다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임신할 수도 있어.'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임신이었다. 지금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몰랐다. 그런데 덜컥 서은하가 임신하게 되면 전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자신이 돌봐야 한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짐이라면 버리고 가겠지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책임감이란 괴물은 흥분을 사그리 날려버렸다. 성욕이 급격히 식었다.
"먼저 자."
"오빠?"
갑자기 달려들기에 기대했던 서은하는 불안해졌다. 불안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나도 하고 싶어. 정말 예뻐. 그런데 잘못해서 임신하면 큰일이잖아. 우리 좀 더 안전해지면 그때 생각해보자."
"응."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성욕이 있다고 아무 때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부담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먹여 살리기 힘든 상황도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문명 속의 인간은 사회가 안정되고 일자리만 있으면 자식을 책임 질 수 있다. 때문에 불안하지 않다. 그래서 24시간 발정하고 그짓만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야생은 달랐다.
환경에 지배받기 때문에 최상의 시기를 고려해야 했다. 보금자리도 만들어야 한다.
서은하의 흥분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대신 가슴 속에는 애정이 꽉 들어찼다.
"고마워."
"얼른 자."
신운성은 서은하를 먼저 재웠다. 함께 잘 수도 있었지만 탁 트인 공간이었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짐승하나 안 보였다. 하지만 넘어왔던 언덕을 바라보며 신운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조심하는 게 좋지.'
신운성의 경계심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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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네요. 정신이 혼미해지네요.
모두 더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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