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140. 원작이 깨진 세계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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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에는 그 어떤 헌터도 알지 못하는 섬이 존재했다.
대격변 이후에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섬으로 막대한 마기가 둘러쳐져 굳이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은 겉으로는 마기만 보여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섬이었다.
그리고 이 섬은 현재 악의 축 사천왕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죄악들이 원탁을 중심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겨우 태어난 줄 알았던 폭식이 그리도 허망하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
질투의 죄악이라 불리는 성숙한 매력을 풍기는 연분홍색 머리의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를 이어 자리에 앉은 다른 인물들도 저마다 의견을 냈다.
“우리 중 가장 늦게 태어났으니 약한 상태에서 깝치다 당한 거지.”
“확실히 우리 중에 약하기는 했어도 생도에게 질 수준인가?”
“질투. 그러고 보니 폭식이 유은하보고 아지다하카라 하지 않았나?”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죄악들이었다.
정확히는 네 명으로 남자 둘, 여자 둘로 구성되었다.
“유은하의 능력이 확실히 아지다하카와 비슷하지만 아지다하카는 유은하가 태어난 이후에도 활동했어.”
“그렇다 해도 죄악을 잡을 정도의 힘은 무시 못 하겠지.”
질투의 말에 반응한 것은 오만의 죄악이었다.
아지다하카가 사라져서 지금껏 무소식이기는 하지만 아지다하카가 유은하로 환생했다고 하기에는 시간대도 맞지 않고, 무엇보다 아지다하카가 죽어야 환생도 가능한데, 마지막으로 목격된 중국에서 아지다하카는 사라지기만 했지. 죽었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말해 ‘아지다하카=유은하’설은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폭식 핑타오는 어떻게 되었지?”
“유은하가 생매장했다는 말이 있다더군. 핑타오란 여자애는 중화주의에 심취해있었으니 쯧쯧.”
“그런데 넌 누워서 뭐 하고 있냐?”
질투가 소파에 누워 게임을 하는 피곤한 표정의 사내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폭식은 죽고, 색욕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저리 태평하게 굴 수 있을까. 저런 것이 같은 죄악인지 의심스럽다.
“야, 내 말 무시하지 마!”
결국 게임기까지 뺏기자, 사내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게임기를 도로 찾았다.
그는 나태의 죄악이었다.
“그렇게 떠들어 봤자 뭐가 변해? 반은 억지로 끌려왔으니 너희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한심한 놈. 지구를 온전히 마기로 뒤덮으려면 우리가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오만의 죄악이 나태를 비웃자, 나태 역시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떠들어서 뒤진 폭식이 살아나기라도 하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남자든, 여자든 하렘 차리고 박거나 박히고 있을 색욕이라도 찾아보던가.”
“지금 우리가 단순히 폭식을 두고 아줌마들처럼 수다 떨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줄 아냐?”
“그럼 뭔데?”
그게 아니었나? 싶어 나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른 죄악들이 고개를 저었다.
“한국의 전력은 생각보다 너무 강하다. 유진석 때보다 더해. 백화교는 황룡을 거의 토막내는 무기를 가졌으며, 그 황룡을 묶어 찢어발기는 괴인도 있다. 우리들이 한국을 침공하면 이길 수 있겠지만 우리의 원대한 꿈은 실패하고 말아. 새롭게 방향을 틀 때가 되었어.”
회의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죄악끼리의 다투는 모습에 혼자 고귀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던 금발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인 법. 아직은 게이트를 통해 수하들을 늘려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힘을 키워야 할 때에요.”
“흥. 그래서 우리 독일의 고귀한 귀족 아가씨께서는 뭔가 생각해두신 거라도?”
평소 금발의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던 질투의 죄악이 따져 묻자 소녀는 무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말이죠. 첫째로 중국의 서북 군벌에서 젊은 영웅이 등장했습니다. 북경 군벌이 망하고 서북 군벌이 북경까지 맡으면서 새롭게 뽑은 헌터인데 이름은 슈에리. 무려 ‘치우’가 성좌로 있다고 하네요. 때문에 성좌의 영향인지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고, 수하들을 다룰 줄 알며, 다양한 무기와 힘을 다룬다고 합니다. 서북 군벌의 젊은 리더로 추앙받고 있으며 특수부대 치우단이 북경으로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와! 일본은 막부에 중국은 치우라. 동아시아는 진짜 과거로 회귀하는구나!”
가만히 듣던 나태가 손뼉을 쳤다.
“한국의 전쟁영웅 유은하는 하정석의 견제로 특수 헌터로 백화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백화교의 본래 리더였던 백화는 현재 행방이 묘연하고 사실상 유은하가 백화교를 맡고 있어요.”
“전쟁영웅을 자치령이라고는 하나 빌런 리더에 앉히다니. 참 재밌군.”
오만도 기가 찼다.
그래. 권력의 독재를 바란다면 그게 바람직하기는 하다. 그런데 자식뻘인 여자애를 견제하는 꼴을 보니 웃긴 노릇이 아닐까.
“일본도 난리가 났네요. 이번에 한중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는 바람에 경제특수를 누리지 못한 일본에서는 우익들이 시노하라 정권을 비난하며 과거의 왕정복고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익세력에 붙은 헌터들이 테러를 벌이다가 대낮에 신선조들에게 참살당했습니다.”
나태가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 진실이 아닐까.
정말 동북아는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였다.
중국에는 황제 헌원과 싸웠다던 치우, 한국은 마치 과거에 있던 당파싸움, 일본은 막부. 그야말로 과거로 돌아갔다.
가만히 보니 굳이 죄악들이 급해질 필요가 있을까.
“뭐 이 정도라면 우리도 급할 게 없어 보이는데? 폭식이 죽었다고 해도 우리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어?”
조금 전보다 여유로워진 질투의 죄악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렇군. 조금 지켜보도록 하지.”
지금으로서는 조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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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
도깨비의 형상을 한 문양이 그려진 붉은 깃발의 헌터 부대가 북경을 점령한 괴수들과 격전을 치렀다.
그 부대를 이끄는 자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흑발을 뒤로 묶은 한 여인이었다.
도깨비 깃발의 군대는 소녀의 명령에 사기가 올라 괴수들을 궤멸시켰으며 그들을 이끄는 여인이 마지막 괴수를 향해 빛으로 만들어진 쇠뇌를 겨냥했다.
“구오아아아아아!”
“치우의 땅에서 떠나라.”
분명 또래 여자들다운 높은 톤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괴수는 당황하다 여인이 쏜 빛의 화살에 머리가 파괴되어 죽었다.
괴수가 죽은 것을 확인한 여인이 손에 있는 쇠뇌를 흔들자, 도검으로 변하더니 그녀의 허리에 채워졌다.
“북경을 괴수들의 손에서 탈환했다!”
“치우단 만세!”
북경 군벌의 몰락으로 괴수들에게 빼앗겼던 북경을 치우단이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를 노리고 여인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
“리더, 남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남경이라면 주석궁이다.
누가 보냈는지, 뻔할 뻔 자다.
남경에서 온 중국 공안을 여인은 차갑게 맞이했다.
“또 회유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슈에리. 당신이 남경 정부에 투항한다면 중국 공안에서 개설한 헌터부대를 맡기게 될 것입니다. 또 몇 대는 먹고살 돈과 땅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장주석 선생의 뜻입니다.”
슈에리. 그것이 북경 군벌이 몰락하고 서북 군벌의 떠오르는 새별이자 치우단의 리더인 여인의 이름이었다.
공안의 제안에 슈에리는 싸늘하게 웃었다.
“공산주의로 인한 부정부패, 사치, 황제가 되겠다는 헛된 망상과 욕심으로 주변국을 위협하다 한국과의 전쟁에서 백삼십만 이상의 목숨을 비명에 가게 한 공산당 악의 축이 나를?”
“그것은 장웨이 장군의 독단으로.”
“그 뒤에 주석궁이 있음을 내 모를 거 같은가? 무엇보다 이 시대에 황제라니. 웃기지도 않을 일. 한 번만 더 나를 찾는다면 그때 장학체의 머리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서북 군벌은 이미 난징의 주석궁에 반발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북경 군벌 때문에 어깨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으나, 북경 군벌의 몰락과 장학체의 개혁실패, 부정부패 및 전쟁의 패배에 더는 서북 군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외교적으로 세계에 고립된 중국이다. 그래서 서북 군벌은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난징에서 온 공안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공안들이 떠나자 치우단의 헌터들은 슈에리를 찬양했다.
“역시 리더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한국에 유은하가 있다면 중국에는 리더께서 계십니다.”
한국의 유은하. 최시우를 비롯한 생도 몇 명과 함께 애국정신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북경 군벌의 주력을 무찌른 인물.
더하여 북경 군벌이 최종병기로 뒀던 폭식의 죄악 핑타오조차 쓰러트린 여장부였다.
서북방에서 괴수들을 잡던 슈에리였으나 최근에 세력권을 북경까지 넓히면서 그녀는 유은하라는 이름을 많이 접했다.
“유은하라면 평양과 평성 전투에서 북경 헌터들을 잡고, 핑타오와의 일기토에서 불굴의 의지로 쓰러트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인이 아닌가.”
“대다수의 병력은 백화교에서 날린 미사일에 무너졌습니다만. 이미 그때 전쟁은 끝난 격이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뒤따르는 백만의 오합지졸은 있으나 마나였다고.
전쟁의 일등 공신이며 주석궁의 장학체가 동북방을 그대로 한국에 떠넘기게 만든 한국의 인재다.
“흠……한 번 만나 보고 싶구나.”
슈 에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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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성
최근 시노하라 유즈키에게는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소식이 있었다.
“당주님. 교토에서 또 우익세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시노하라의 헌터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다가 제압당했습니다.”
우익들이 시노하라에 반발하고 있는 것.
웃긴 노릇이다. 고작해야 구세대의 유산인 자위대밖에 없는 작자들이 시노하라에 반발하고 있다.
뭐 한두 번은 아니다. 아마 총리의 짓이겠지.
“또 총리가 허튼 수를 벌이는구나.”
“총리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노하라 마리코는 우익세력이 시노하라에 위협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
시노하라의 권위가 흔들리면 그때는 끝이다. 하지만, 정작 시노하라 유즈키는 검을 닦으면서 여유로웠다.
“됐다. 굳이 분란 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계속 선동을 하고 있으니.”
“풉. 그렇다 하여 일본 국민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국가 자체를 시노하라가 장악하고 있다. 우익세력이 조금 있다고는 하나 정보화가 진행된 시대에 언론을 지배하고 선동하지 않는 이상 저들에게 넘어갈 일본인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노하라는 실책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애초에 실책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전쟁특수를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전쟁을 중재하며 이익을 보았고, 한국과의 관계개선과 더불어 한국 땅이 된 동북 3성 대한 투자권도 얻지 않았나. 우리 헌터가 반도에서 죽기라도 했느냐? 이익을 보면 봤지 피해를 본 것은 없지.”
“예.”
“급할 건 없다. 총리는 반대로 우리가 무력으로 들고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굳이 건드리지 않는다면 저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중국이 저질러준 덕에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긴장 상태나 다름이 없다. 그런 와중에 시노하라가 헌터들을 동원해서 우익세력들을 싹 잡아 죽인다면 그것은 괜히 국제사회에서 시노하라 정권의 명성을 깎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성 아카데미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한성 아카데미라, 폭식의 죄악이 죽었다고는 하나 한국과의 관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전쟁영웅 유은하, 알아보니 백화교의 수장 백화로부터 백화교의 다음 리더로 지명된 여자.
동북 3성 게이트 투자권도 얻었겠다. 하정석은 뒤로하고 지금은 유은하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유은하랑 친해지는 편이 시노하라에게는 이득일 것이다. 가야겠지. 하정석 그 인간과도 동북 3성 대해 투자하는 것을 논의해야 하고. 흐음. 시노하라성에 초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다면, 일단 자위대나 총리는 감시만 할까요?”
“그래. 신선조들에게 감시토록 하라.”
“네.”
굳이 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저들이 스스로 자멸하면 그것이 시노하라가 바라는 것이다.
총리와 왕실을 완전히 끝내버리고 일본의 새 시대를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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