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09. 용용이의 작은 꿈
* * *
#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는 최철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서울에 합류를 안 하는 것이냐 못 하는 것이냐?”
오, 날카로운 곳을 찌르고 오셨네.
‘안’,‘못’ 그 차이를 둔 것은 아마 시민들의 괴인화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후자에 가깝죠.”
“협회에서 추정으로는 대충 수천 명이 있는 것으로 안다. 대부분이 그럼…….”
최철식이 목소리를 깔았다.
“네. 괴인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회에서 고립될 것이 뻔해요. 그러니 제가 밖에서 다루는 것이 훨씬 낫죠.”
어차피 서울에서 천대받고 살 바에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나는 죄악과 싸움에서 괴인들의 힘으로 적들을 쳐내고 사회에서 괴인들이 인정받게 할 것이다.
“알겠다. 그럼 이만 물러가지. 그런데 차지은과는 할 말이 있나?”
“아, 사실은 제가 이기면 따먹기로 약속해서요.”
“호오. 유진석 아니면 안 되겠다고 그리 울고불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더니만.”
아마 여전히 그럴 텐데. 단순히 나에게 졌으니 이러는 거지.
“아니, 나는.”
“질 줄 몰랐다는 거겠지?”
“아, 그건.”
차지은은 빡빡이의 일침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지금껏 이렇게 져본 역사가 유진석 외에는 없다.
서지연과는 직접 전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녀도 굳이 상성을 넘어서 서지연을 어떻게 상대할지 감이 안 잡히고 굳이 싸울 이유도 없었다.
“이참에 좋은 경험했다 쳐라. 어차피 유진석도 너한테는 관심이……아니, 알았으니까. 얼음 치워. 이렇다는 데도 계속하려고 할 거냐?”
눈에 살기가 번쩍거리는 차지은이 빡빡이에게 얼음검을 겨누다가 뒤로 물러났다.
글쎄, 계속하려고 묻는다면 당연히 Yes지. 억울해서라도 따먹고 말 거다.
여차하면 밤에 몰래 집 안으로 들어가 덮칠 수도 있다.
“넹. 원래 이렇게 튕기는 여자가 더 맛 좋은 법이죠.”
“너 진짜!”
“뭐 좋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지. 어차피 서울에 올 수 있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거 아니냐.”
“그렇기는 하죠.”
지금은 놓아준다.
지금은 서지연이 있으니까. 서지연 공략이 되어가는 중인데 굳이 차지은을 노려 호감도를 떨어트릴 이유가 없다.
질투심 유발도 좋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차지은과 만날 것을 따로 약속한 다음. 길드 연합은 철수를 시작했다.
* * *
송도와 정부 간의 전투는 송도의 백화교가 승리함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정부는 대통령의 머리가 벗겨지고 미녀빌런들에게 짓밟히는 치욕을 맛보고 청와대 소속 헌터 수백 명이 학살당했다.
길드 연합에서는 백화교와의 싸움에서 큰 피해는 없었으나, 차지은이 백화에 패배를 하였다.
미친 진짜 이걸 이기네.
정부랑 길드 연합이 이긴다는 새끼 어디로 갔냐?
ㄹㅇ매국 배팅으로 이번에 돈 오지게 땀 ㅅㅅ
그럼 실력은 최소 차지은 급이란 거네. 차지은도 지금 국내 헌터 2,3위 다투잖아.
유진석과 맞붙은 것도 유진석이 단순히 봐준 것이 아닌 듯?
근데 이번에 유진석도 빠졌잖아.
ㅈㄹ길드 연합이 소극적이었잖냐.
그것도 송도의 세력이 강한 탓이지. 이긴다 쳐도 큰 피해입을 테고. 한국 길드 연합이 큰 피해를 입으면 곧바로 중국이 개입할 텐데. 이건 부정하지 말자.
백화교! 백화교! 백화교!
정부가 털렸음에도 정작 국민들의 반응은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이겨? 라는 반응이었다.
뭐 길드 연합이 소극적이었던 탓은 분명히 있지.
그리고 나는 레이첼에게 돌아왔다.
아, 진짜 레이첼은 이제 정실 포지션으로 완전히 눌러앉은 건가.
“어때? 정말로 마르기 전에 돌아왔지?”
가만히 침대를 보니까 서로 뿌린 체액이 여전히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사실 드래곤이 뿌린 액체는 그리 빨리 마르지 않는다. 닦지 않는 이상 말이지.
“아니, 그걸 말이라고. 너무 말투가 천박해.”
그런데 우리가 싸울 동안 레이첼은 뭐하고 있었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엄마 뭐해?”
레이나도 관심이 많은지 레이첼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막 인터넷 가지고 놀던데 뭘 하는 걸까.
살짝 그녀의 컴퓨터를 보니 인터넷 쇼핑몰 창이 떠올랐다.
“이번에 창업한 인터넷 쇼핑몰로 비싸게 여러가지를 팔고 있는데, 잘 팔리더라고. 부자들이 막 사가더라.”
“무지개 뱀술에, 엘프의 벌꿀주. 등등. 다양하네. 술파는 곳이야?”
무지개뱀술은 뭔가 혐오스러우니 싫고. 벌꿀주는 꼴리는데? 마셔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가내수공업으로 하는 거라 매물 많이 올리지 않았는데. 그래도 엘프 상표를 붙이고 효능 다니까 잘 팔리더라고.”
“?? 효과가 어떻게 되는데?”
“무지개 뱀술은 엘프 왕국에서만 발견되는 영롱한 무지개빛 뱀으로 담근 술이야.”
아, 그랬구나. 어쩐지 가끔 밤에 보면 어디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작 술은 본 적이 없다.
“왜 나는 못 봤지?”
“너는 술보다 담배잖아. 그리고 무지개 뱀술은 여자보다는 남자한테 더 효과가 있어. 그리고 무지개 뱀탕은 자주 먹였는데? 매일은 아니고 가끔. 무지개 뱀탕은 음경이 총에 맞은 고자라도 단숨에 회복시킨다?”
“어, 그런 효능이.”
가끔 뱀탕 중에 유독 불끈거리게 만드는 게 있던데 그거였나.
뭐 이상한 색의 뱀이 있다 했다. 그때마다 머리부터 먹여서 나는 무척 슬펐지만 억지로 욱여넣길래 먹기야 했었다.
“그래?”
“대통령은 잡았으니 우리가 이긴 거야?”
“응 우리가 이겼어. 길드 연합도 물러났거든. 아직 할 일이 있지만.”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안 도와줘도 될까?”
“필요하면 부를게. 당장은 괜찮아.”
레이첼은 당장 괜찮다. 그 엘프 인터넷 쇼핑몰로 이것저것 써먹으면 좋겠지. 돈을 벌어두면 언젠가 쓰일 곳도 있을 테고.
나는 히로인들을 거실에 모았다.
당장 보비고 싶은 년들만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최철식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다.
그래. 예를 들면 전력이 생각보다 약화한 것.
이미 원작이 비틀어진 이상. 이건 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세력권을 넓히기로 다짐했다.
“할 일이라니. 뭐가 남았어?”
“막았으면 된 거 아니야?”
“전후복구도 딱히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요?”
히로인들도 피곤한 건지 약간 지친 표정이었다.
이미 인간의 체력으로 지친 이유정은 늘어져 자고 있고, 음습마리도 그 옆에서 5호기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있다.
“잠깐 보니 최철식은 우리를 칠 생각이 없어. 우리를 치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던 하정석도 지금은 머리털 두 가닥만 남은 대머리가 되었지. 이제는 헌터도 없고.”
최철식의 머리에는 지금 더듬이 머리카락만 남았다.
아마 나중에 자라려면 꽤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거야?”
“우리도 중국 군벌처럼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호서와 영남까지 내려가야지. 일단 충청도까지는 내려가자.”
지리적으로는 한국의 각 도시에서 처맞기 좋은 위치기는 한데, 일단 솔직히 수도권 제외하고 다른 도시들은 헌터들 수준이 떨어진다.
A급은 넘쳐나지만, 굳이 나서서 백화교를 칠 만큼은 아니라는 사실.
“삼국시대나 일본 전국시대도 아니고. 위험한 거 아니야?"
"어차피 정부가 버린 땅 우리가 먹는 건데 어때?”
가능하다. 그렇게 하면 괴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아마 수만 단위가 될걸.
원작에서는 이 괴인들이 대부분 죽는다는 설정이다.
원작 유은하가 죽고 터진 게이트들이 그만큼 위험했던 것이다.
시우와 히로인들에 의해 처리되는 것은 주로 빌런들이니까. 일반인보다 강한 수준의 괴인들은 많이 죽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은하는 죽지 않고 아지다하카의 환생체가 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 넘쳐나는 괴인들을 백화교 아래에 통합할 수 있다.
“이러다 나라 세우는 건 아닌지 몰라.”
“……진짜 해볼까?”
하정석도 쓸모없는데, 그냥 괴인 나라를 세워서 여왕 짓 해볼까?
이렇게 나라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진 애기용용이는 마침내 괴인의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는 일단 저질러보고 생각할 일이다.
괴인 세력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백만은 될까? 대범람 사태로 침식지대에 갇힌 인구가 6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 절반만 되어도 좋을 텐데.
헌터 협회의 헌터들 궤멸적인 타격과 이어 이번에 청와대 소속 헌터들의 전멸. 그 공백을 격리지역 괴인들이 커버해야 한다.
“어쨌든 나쁜 방법은 아니야. 나도 한성에 내 수하들을 만들게.”
최시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응.”
이번 일로 우리의 힘을 증명했으니, 한국 정부는 우리들을 함부로 토벌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 * *
청와대 밀실
일본 시노하라 정권의 수장 시노하라 유즈키는 청와대 밀실에서 대머리 하정석의 책임추긍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시노하라는 어째서 돕지 않은 것인가?”
하정석은 반짝거리는 머리를 닦으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일찍이 송도 공격 이전에 은밀히 한일 헌터 정보공유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시노하라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나, 정작 시노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시노하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한국의 헌터에 대한 정보를 공유받을 수 없게 된 건 안타깝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도왔다면 대통령 각하의 입지는 더 힘들어졌을 텐데요.”
“뭐라고?”
“솔직히 각하께서도 인정하시죠? 백화교의 그 괴인집단. 그 정도를 상대하려면 저와 신선조들도 나서야 합니다. 전투가 커지는 만큼 패하든 승리하든 결과적으로 지지도를 잃을 테고 아국의 총리도 시노하라가 사적으로 한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저나 각하를 압박하겠죠.”
결국 서로 좋을 것이 없다는 소리다.
개인적으로 시노하라는 지금의 총리를 세웠으나, 괜히 덜미를 잡히면 총리에게 권력을 넘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크으윽.”
“애초에 길드 연합조차 패퇴시킨 백화입니다. 저희 시노하라가 공개적으로 돕는다 해도 승산은 점칠 수도 없습니다.”
“알겠네. 돌아가 보게.”
하정석은 겨우 가슴을 추슬렀다.
그 모습에 시노하라 유즈키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잠시 하정석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더 있다가 저 하정석이 어떤 시비를 걸지 모르니 포탈을 이용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대통령은 머리가 벗겨진 모습이 참 어울리네요.”
일본으로 돌아온 시노하라 마리코가 뒤늦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게 말이야. 백화가 잘했지.”
“그런데 유진석의 제안은 받았으나, 백화에게 대통령의 밀실을 알려준 것이 잘한 것인지요?”
그랬다. 시노하라는 처음에 진심으로 하정석에게 은혜를 입히고자 시노하라의 신선조를 투입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방망이 김지혜와 임무를 하던 유진석을 만났다.
이번에 하정석과 협력하는 건 그만둬.
알고 계셨나요. 어째서죠?
어차피 이기지 못한다. 시노하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백화는 강하다. 신선조가 강하다 하나 한 명 한 명이 S급은 아니지 않나. 하정석에게 은혜를 입히기 전에 가문을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초대 신검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일단 두고 보겠습니다.
한때 세상을 구하고 평양의 헬게이트를 막은 유진석이 백화와 척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시노하라가 그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으나 적의 실력도 모르는데 괜히 가문의 힘을 낭비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들을 필요는 없어도 초대 신검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이미 백화와 싸워본 적이 있는 그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단번에 허를 찔렀다.
애초에 관망만 할 생각이었는데, 백화는 청와대를 곧바로 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팬인 척 위장해서 딱히 시비가 붙지는 않았지만, 백화의 힘은 분명 대단했다. 괜히 백화가 청와대에 남아서 시노하라의 흔적을 찾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정석을 넘겨버리기로 한 것이다.
어쩌다 사인은 받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 생도에는 유은하도 있고, 빌런으로는 백화에. 한국도 참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는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제 친구 븝미도 이번 길드 연합에 나갔다가 백화랑 차지은이 싸우는 걸 보고 팬티를 적셨다지 뭐에요.”
그 정도로 대단한 전투였나.
하기는 청와대 전투를 보면 무시할 수는 없는 전투력이기는 했다.
“그나마 우리 일본은 나은 것이 아닌가? 확실히 동쪽의 침식지대가 거세기는 하지만 막기만 하면 서일본은 지켜낼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음, 유은하가 보고 싶네.”
뭔가 갑자기 유은하가 떠올랐다.
백발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그 금색 빛을 내는 뱀의 눈.
한 손에 꽉 찰 것 같은 유방에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
뭔가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자니 아랫배가 아주 살짝 근질근질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그녀는 여자도 홀리는 마성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
“네?”
“아니다. 들어가자.”
“네. 당주님.”
잠깐 하복부를 내려다보던 유즈키는 시노하라 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평화로운 시노하라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