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2. 엘프유적기록의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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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강남에 있는 유적지 포탈에 도착했다.
“설명은 끝났습니다. 해당 입장권은 사용시 10일간 엘프유적에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엘프유적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지.
한참 유적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드에게 입장권을 넘겼다.
“예.”
“입장권 확인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포탈로 들어서자 엄청난 유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중세 유럽과 비슷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즐비한데, 대부분이 폐허였다.
유적지니까 뭐 당연하겠지만, 엘프왕국이 망하지 않았으면 본래는 레이나의 고향이 되었을 공간이다.
“와, 여기가 엘프유적.”
소설로만 읽다가 직접 보니 어마어마한데.
파괴된 유적지는 엘프의 나라의 유적이었다.
그 옛날 숲속에 살던 엘프는 마침내 마왕을 무찌르고 엘프의 나라를 세워 숲의 생활에서 탈피했다고, 유적 가이드북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진짜 적네요.”
“따분하잖아.”
“유은하까지! 너무해요!”
레이나가 화를 낸다.
아니, 진짜 따분하니까 문제지.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신나려면 롤러코스터라던지 있으면 딱인데.
“하지만 이런 따분한 곳에서 농밀한 민달팽이가 추가된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안 돼요!”
슬쩍 레이나의 고간으로 손을 가져갔더니, 아주 매섭게 쳐냈다.
이러려고 내가 레이나를 위해 유적까지 왔나 자괴감이 들었다.
“쳇!”
“아니, 이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왜 시도 때도 없이.”
확실히 각성하기 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남자한테 박히는 것도 싫지만 그렇다고 굳이 비벼야 할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과거일 뿐이고.
“그야 레이나는 따먹고 싶은걸.”
이런 음탕하고 요망한 몸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레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수컷과 암컷을 동시에 화나게 하는 것이 바로 레이나의 몸이다.
물론 지금 하고 싶다는 건 농담이지.
다크엘프 레이나로 인해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오히려 이후 나를 습격해올 암컷타락 최시우를 생각하면 준비만전해야 한다.
“하아, 그래도 우리 때와 장소는 가려요. 돌아가면 뭐든지 해줄게요. 이곳에서는 조상님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요.”
“진짜로 느끼게 해줄 수 있어.”
“네? 또 이상한 소리하면 저 진짜 안 비벼줄 거에요?”
레이나가 화내는 어조로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애초에 엘프유적 이벤트가 시공을 넘어 엘프왕국으로 가는 것이니까.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둘 다 거기까지.”
“이게 다 유은하 때문이에요!”
레이나가 나한테 손가락질하며 씩씩거린다.
아니, 지금까지 좋다고 달라붙어놓고는.
“아니, 마냥 거절하지 못하는 너도 문제잖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정이 질투에 눈이 먼 얼굴로 레이나에게 따졌다.
이쪽도 호감도작은 해야 할까.
“이유정선배는 밤에 내가 그 일본말로 요바이라고 했던가? 그거 하려고 했는데요.”
“아. 그.그건 됐거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이유정은 얼굴을 붉히더니 먼저 유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유정은 내가 요바이 하겠다는 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정말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유적으로 진입했다.
“이건 유적의 일부겠지.”
“그렇겠죠. 엘프왕국은 서적에 따르면 남한 땅 만하다고 들었어요. 고작 이런 일부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아쉬워요.”
판타지 세계관 만화나 게임에서는 나라들이 무슨 도시 수준에 불과하지만, 묘사로 엘프왕국은 상당한 크기였던 거 같다.
아, 남한땅이 크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판타지 세계관으로 볼 때, 엘프왕국은 당대 제일 잘나가는 제국과의 대륙을 양분했다고 했으니 그 논리에 맞춘 거다.
“음. 저기는 접근 금지 구역이네요?”
“들어가도 볼 거 없다더라. 그냥 건물 구조가 잘 못 들어가면 무너질 것 같아서, 막아둔 거래.”
정말 딱 봐도 들어가자마자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었다.
신전같은 느낌인데, 실제 원작에서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원래라면 최시우가 들어가서 깽판치는 바람에 이벤트거 벌어진다. 정작 그 최시우가 송도에 남아있으니 지금은 내가 전부 해결해야 한다.
“끄응. 그럼 힘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요? 다 치워버리면.”
레이나는 유적을 손으로 치우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유적지는 일부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그 상태로 보존하다가 연구해야 하는 거지. 저걸 망칠 수는 없다 뭐 그런 거야.”
다른 세계 유적에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나 싶지만. 그래도 ‘엘프’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래 전부터 엘프의 존재는 소설에나 만화, 애니에서나 등장하던 종족이었다. 당연히 사람들 입장에서는 꽤 구미가 당기는 유적이었을 테고, 그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혼혈. 엘프는 중요하다.
“왜 그리 복잡하데요.”
“저기는 애초에 입구도 아니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따로 있어.”
나는 둘을 데리고 무너진 건물 입구에서 방향을 돌려 건물 옆으로 들어갔다.
언뜻 보면 일진 언냐들이 껌을 짝짝 씹으면서 지나가는 여자애 붙잡을 것 같은 그런 공간인데. 소설 묘사를 보면 확실히 이곳이다.
“무슨 말이에요?”
“엘프왕국의 지도자들은 왕국이 몰락하기 전에 시조가 남긴 역사기록 보관소에 자신들의 마지막을 기록했어.”
단순히 마지막이 아니라 일종의 한이다.
먼 훗날 엘프의 후손이 봐주기를 바라면서 오로지 고귀한 엘프의 피로만 열 수 있도록 결계를 작성했다.
“그게 무슨.”
“그리고 그 기록 보관소는 수십, 수백겹에 걸친 결계로 인해 수많은 세계가 대격변을 겪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지.”
설정상, 대격변의 피해가 그나마 적은 것은 지구다.
아니, 괴수들의 침공이라는 재앙이 있었으나, 다른 세상은 지각변동이 심한 경우도 있었다.
거대한 싱크홀로 나라가 무너졌었지.
“그 기록보관소가 있는 지역은 유적지가 되어 지금은 지구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어.”
정작 지구인들은 기록보관소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게 이곳이라고?”
“응. 말했듯, 유적보존을 위해 너무 안 건드리다 보니, 기록보관소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거야.”
누가 이런데 엘프의 기록보관소가 있다고 여길까.
애초에 인간들은 엘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고작 유적지와 이계인들 뿐이다. 그래서 기록보관소의 정체에 대해 아는 이도 없고, 이계인 출신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구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록보관소에 대해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기록보관소에 대한 정보는 적다.
엘프 왕국에서도 수뇌부만 비밀리에 채워두던 곳이었고, 바깥에 정보가 나가는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엘프왕국이 무너질 때, 왕실 서고가 불타버렸으니 기록보관소에 대해서는 거의.영원히 묻혔을 거다.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엘프의 피. 반 뿐이라지만 너의 피가 필요해. 정확히 여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흙먼지에 쌓인 바닥을 가리켰다.
“이건.”
우리가 밟고 있는 바닥을 몇 번 발로 차자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지더니 가려져 있던 바닥의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은 엘프왕국의 문장. 언뜻 보면 그냥 장식이라는 느낌이지만, 이건 결계의 잠금을 해제하기 위한 자물쇠다.
엘프의 후손이라고 아무나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엘프 왕국의 왕실의 핏줄을 잇는 엘프들만이 해당된다.
“이게 마법진.”
“네 선조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기회야. 지금이 아니라면 유적지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원래라면 최시우가 깽판치다가 실수로 레이나에게 생채기를 내서 피 한방울이 여기 떨어져 활성화되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엘프유적에 가기 귀찮았던 내가 레이나를 끌고 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레이나가 직접 피를 흘려야 한다.
푸슈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유은하 이거 괜찮은 거야?”
“모두들 서로 손 꽉 잡아!”
리듬에 몸을 맡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리듬을 잘 못 탔는지, 시공의 폭풍 속에서 그녀들과 떨지게 되었다.
[엘프의 기록보관소에 진입하셨습니다.]
[경고! 인간과 이질적인 생명체의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침입자를 차단합니다.]
[경고! 침입자의 격이 높아 결계가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경고! 결계 활성화 대신 차선책으로 기록의 서고로 침입자를 이동시킵니다!]
* * *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더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주변을 탐색해보니, 나는 책이 산더미처럼 많은 공간에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소설에서는 밝게 빛을 내는 마력 둥실 둥실 떠다니고 책장이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어있으며, 중간에는 마도기어로 작동하는 기록보관용 레코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는 그냥 온통 책더미 뿐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기록의 서고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게 뭔지 모르는데? 아카식 레코드의 도움이 필요하다. 적어도 보통의 기록보관소는 아니라는 뜻이니까.
원작에서도 나온 적이 없다.
“이봐, 아카식 레코드. 지식의 서고란 뭐하는 곳이야?”
[기록의 서고란 엘프왕국의 기록보관소에서 만든 일종의 함정입니다. 본래는 결계로 침입자를 막지만, 그 침입자의 격이 너무 높아 결계로는 칩입을 막지 못할 경우. 차선책으로 침입자를 가두기 위해 만든 것이 기록의 서고입니다. 기록보관소가 엘프 역사의 정사를 보관한 곳이라면 기록의 서고는 폐기된 지식이나 논리. 필요없는 고대의 정보 같은 것을 쌓아둔 곳으로 폐기된 자료를 처리하는 쓰레기통입니다.]
조금 머리가 아프다. 이곳이 두통을 유발할 정도의 중요한 곳인가.
보관소. 서고. 뭐 그래도 쓰레기통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곳도 기록보관소의 일부라는 이야기인가.
아마 기록보관소 내부에는 함정을 설치하기 힘드니, 어차피 폐기 자료를 버리는 기록의 서고를 함정으로 써먹은 거 같다.
“어쨌든 그럼 이곳도 기록보관소라는 거지?”
[네. 정확히 말하면 도서관 쓰레기통이라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군.”
한마디로 좆되었다는 거구나.
[마스터가 악룡의 권능을 사용하면 탈출할 수 있으나, 기록보관소가 통째로 타버릴 위험이 있으니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레이나와 유정이가 문제로군.”
[그러나, 마스터의 권능은 단순히 격이 높은 침입자 수준이 아닙니다. 본래는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이지만, 마스터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한 이곳은 탈출구가 개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던전에 갇혔다는 건가.
“그런가. 좋아, 일단 탈출구부터 찾아야겠어.”
일단은 몸을 툭툭 털면서 일어나 주변을 확인했다. 그런데 바로 내 좌측 벽으로 이상한 게시판 같은 게 있었다.
멀리서 보면 몇 개는 지웠다 다시 쓴 것 같은데.
“뭐야, 이건 안전수칙?”
엘프 왕국 기록의 서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록의 서고는 직원들의 안전을 위한 행동수칙을 제공합니다. 아래 내용을 절대 외부에서 누설해서는 안 되며, 이 항목들을 무시하거나 위반해서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서 당국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나폴리탄 괴담이야 뭐야?
읽기 귀찮지만, 저걸 알아야 탈출할 힌트를 얻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1. 복도를 돌아다니거나 제어실의 마도기어를 통해 ‘폐쇠된 책장’을 발견했다면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즉시 서고를 나가 책임자에게 정보를 전달하십시오. 이때 절대 ‘폐쇠된 책장’의 안쪽을 봐서는 안 되며 안쪽으로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폐쇠된 책장은 기록의 서고에서도 사라진 책장입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폐쇠된 책장이 눈에 보일 일은 없습니다.
2. 서고 전구역을 관리하는 제어실 마도기어로 반역의 기록 책장에서 반역자 랄프의 기록이 사라졌다는 음성이 들려올 경우, 절대 찾으러 가셔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바로 조치하겠다고 대답한 후, 즉시 마도기어를 교체하고 반역의 기록 책장을 폐쇠하셔야 합니다. 이 기록의 서고에 설치된 마도기어는 통화기능이 없으며, 기록의 서고는 현재 경비원 한 명만이 관리하게 되어있습니다.
3. 가끔 서고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서고도 겪는 일반적인 사건이니, 안전수칙을 따르면 됩니다. 다만, 시체의 얼굴에 젖은 종이가 있을 경우 절대 시체에 접근하지 마시고, 해당 구역을 폐쇄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다른 근무자에게도 알리십시오.
4. 서고의 뒷문으로 가기 위해 안쪽으로 가던 중, 복도의 제자리를 계속 돌아오는 것 같다면 구석을 바라보며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십시오. 주간직원은 매일 출근할 때마다 가장 먼저 뒷문 복도를 확인합니다. 아침에 직원이 발견할 때까지 계속 그 상태로 있으셔야 합니다.
5. 갑자기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면,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숨소리도 최대한 내지 마십시오. 엄폐물에 숨거나 방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최대한 신속히 몸을 낮추십시오. 그 후, 청소직원을 불러 책장의 얼룩을 제거하십시오. 추가로 이 항목 이후에 다른 항목이 존재하는 경우 절대 눈여겨보아서는 안 됩니다.
6. 복도에서 불에 탄 자국이 발견되었다면 즉시 제어실의 화재경보 마도기어를 울려서 연구원들을 전원대피시키십시오. 인원이 맞는지 체크하고 2시간 이상, 지난 후에 다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용객들에겐 화장실에서 담배를 핀 연구원 때문에 화재감지기가 울렸다고 안내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인원 체크시에 비는 인원이 있다면 2시간 후 들어갔을 때, 불에 탄 자국이 있는 구역으로 가서 자국이 이어지는 책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미라처럼 매마른 엘프가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될 것입니다.
7. 본인의 성별에 상관없이 서고에서 성행위는 언제 어디서든 절대 금합니다.
8. 제어실에 배치된 마도기어 중, 보라색 마도기어가 울린다면 절대 받지 마십시오. 이 마도기어는 마력이 공급되지도 않고, 통화기능이 없습니다.
9. 비오는 날, 백발에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충혈된 인간 여성이 찾아올 경우 그녀가 우산이나 우비가 없는데도 젖은 부분이 없다면 쫓아내서는 안 됩니다. 제어실에 있는 3년 전 기록소 문서를 확인하시고 폐쇄된 책장의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이후 비오는 날 바람피다 걸려 먼지나게 맞는 남성의 비명이 들려도 무시하셔야 합니다. 괜히 말려들 수 있습니다.
xxxx년 xx월 x일 관리자 막심 웨스턴
10. 이 안전수칙에서 1~9항은 무시하십시오. 현재 제어실은 폭파상태로 폐쇄되어 있습니다. 근무자들은 그냥 가볍게 안까지 순찰을 마치시고, 곧바로 퇴근하십시오.
xxxx년 xx월 x일 관리자 라이나 실버류크
11. 이 안전수칙에서 10번 항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0번 항목에 어떤 내용이적혀있든, 무조건 그 내용은 한 귀로 흘리십시오. 혹시 관리자의 이름으로 라이나 실버류크라 등록되어있다면, 무조건 무시하십시오. 라이나 심버류크는 죽은 엘프입니다. 따라서 안전수칙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xxxx년 xx월 x일 관리자 막심 웨스턴
년도와 날짜가 지워졌다.
시발. 나 이런 거 졸라 무서워 하는데. 아니, 그 전에 말이다.
나는 바로 우측으로 보이는 문을 쳐다봤다.
그 문에는 엘프의 언어로 보이는 글자 팻말이 걸려있었다.
뭔가 불길하다.
“아카식 레코드. 저거 언어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제어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개 같은 안전수칙. 뭘 믿으라는 거야.
아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것들은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곳은 엘프왕국의 유적. 설정상 엘프는 지식과 마법에 뛰어난 문명을 가진 족속들이다.
마법 조차 존재하지 않던 대격변 이전 지구라면 모를까. 이건 어떻게 해석이 가능하다.
1. 폐쇄된 책장은 사라진 거라 한다. 즉, 이건 뜻풀이를 하자면 말 그대로 폐쇄될 때가 되어 폐쇄했는데, 제어실의 오작동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니, 괜히 접근하다 험한 꼴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는 사라진 책장을 복구할 수 있는 실력좋은 침입자가 들어왔다.
2. 한마디로 마도기어를 해킹해서 음성까지 보낼 수 있는 뛰어난 깐프새끼가 반역자 랄프의 기록이 없으니 징징거린 거다. 한 두번이 아니니, 침입자가 있는 책장을 폐쇄시켜 정의구현하자.
3. 책박이 깐프놈들이 침입해서 기록에 코박죽하다 뒤졌다는 뜻이다. 혹시 또 발견될지 모르니 다른 근무자는 시체보고 놀라지 말라고 알려라.
4. 이 서고는 존나 씨발같이 복잡해서 제자리를 빙빙 돌 수 있을 정도로 복도가 미로니까. 길 잃으면괜히 헛짓거리 하지 말고 구석에 처박혀있다가 다음 근무자가 아침에 순찰할 때까지 기다려라.
5. 코박죽 엘프새끼들이 책장건드리며 위험한 짓하고 있으니 고개 숙이고 있다가 애들 책장에 깔려 뒤지면 청소부 불러서 처리해라. 그 코박죽놈들이 이후 안전수칙에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조심할 건 여기까지고 다음 거부터는 다른 놈이 적는 조항일 수 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6번부터는 그 코박죽 침입자놈들의 페이크 안전수칙이다. 일단은 코박죽 놈들의 함정임을 주시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6. 일부러 화재를 낸 척해서 2시간 동안 편안하고 느긋하게 코박죽을 하려는 더러운 변태들의 음습한 협잡질이다. 심지어 근무하는 경비원은 한 명인데. 화재를 낸 척 모든 이용자를 내쫓겠다는 것은 코박죽놈들 끼리도 서로 기록을 독점할 생각이거나, 애초에 관리인 1명만 존재하는 서고임을 알지 못한다는 뜻. 즉 빡대가리들이다.
7. 한마디로 이건 “나만 책에 박겠다.” 본격적으로 기록에 대한 독점욕을 나타내는 문구다. 6번에서 빡대가리보다는 서고를 독점하려는 개수작이 속셈임을 알 수 있는 문구기도 하다.
8. 보라색 마도기어는 통화기능도 되고 마력공급도 된다. 코박죽 깐프들은 경비원이 마도기어로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다.
9. 코박죽 깐프 놈들 중 한 명의 마누라가 찾아올 수 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코박죽 남편을 조지겠다는 일념으로 혈안이 되어있다. 그러니 그 여자를 남편인 코박죽놈이 있는 곳으로 보내라라는 뜻으로. 그 사라졌을 폐쇄된 책장에서 열심히 기록에 박고 있을 코박죽 놈은 비오는 날, 서고로 침입하며, 이 조항은 라이벌 코박죽2가 작성한 것이다.
막심 웨스턴이라는 놈은 4조항까지 만든 놈인데 나머지 공간이 너무 비어있다보니 코박죽 깐프놈들이 멋대로 조항을 만든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번째 조항은 라이나 실버류크라는 인물이 쓴 건데, 실버류크는 엘프왕국 왕실의 성씨다.
10. 시발 햇갈리게 좆같이 적어놨네. 왕족으로써 용납 못한다. 아예 다 파괴해버리자. 이런 뜻이다.
11. 은 서고가 폐쇄되면 코박죽 깐프들은 좆되니, 왕족이 돌아간 상황에서 다시 제어실을 복구시켜서 서고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리고, 음습한 행위를 계속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다. 여기에 막심 웨스턴이라는 관리인 이름을 적어 신빙성을 더한다.
해석하니 진짜 이곳은 쓰레기통으로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지랄이니 본래 기록보관소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조정한 것이겠지.
“그럼 뒷문이라는 걸 찾아야겠네.”
하여간 깐프들은 유적조차도 사람을 귀찮게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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