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 히로인들 설득
* * *
“그럼 남은 건 한수지, 이유정. 최시우인가.”
한수지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있는 편이다.
김재수의 사건 이후에 한수지에 대한 기대는 이전에 비하면 하늘과 땅차이였다.
이 와중에 내가 무신을 붙여준다면 아마 나를 따라올 테고.
이유정도 별문제는 없다. 오히려 이유정은 내 빌런짓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그래서 꽤 호감을 올려뒀다.
이미 한 번 관계도 가졌다.
그럼 최시우는 어떨까?
최시우도 생각이 있으면 오히려 빌런을 해서 전력을 키우는 것이 이득이란 건 알겠지.
문제는 레이나의 말대로 들킬 경우다.
기대받는 것이 많은 만큼, 괜히 대놓고 빌런아웃을 해버리면 오빠란 작자가 “네.네가 어떻게.”라는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게다가 내 실력도 있고, 과거 유진석을 어지간히 엿먹인 흑신교를 유진석과 동료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작정하고 깔 테고. 나라면 몰라도 아직 레이나나 한수지는 유진석과 그 동료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한수지와 최시우, 이유정 선배도 부를 거죠?”
다시 깨어난 레이나가 눈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천천히 그래야지.”
아카데미의 휴교가 풀릴 때까지 흑신교를 최대한 키워둬야 한다.
다른 히로인과 주인공 최시우도 미리 설득을 해야 한다.
레이나를 굳이 첫타자로 뒀던 것은 세게수의 활 때문. 그럼 다음은 한수지인데.
“제가 도울 일이 있어요?”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유난히 적극적으로 변한 레이나였다.
원작에서 그 깐깐한 짭엘프가 이렇게 변하다니. 사랑스럽다.
“아니, 내가 따로 일을 처리할게.”
“네.”
일단 흑신교 애들이 이곳에 들어오지는 못하니 레이나를 당분간 이곳에 둘 생각이다.
나중에 게이트로 옮기기 귀찮은 것도 있지만, 레이나는 고아다. 고아기 때문에 내가 동료가 되라는 제안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히로인들 태반이 고아였던 거 같기도 하고.
게이트를 통해 다시 이동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음. 한수지의 집으로 가자.”
“네.”
모범택시가 된 케이트는 미리 한수지의 집 좌표를 찍어뒀었다.
한수지의 집은 작은 빌라였다.
그간, 김재수의 후원도 있어서 그래도 혼자 사는데 문제는 없던 것 같지만. 거실에서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아앙! 흐으윽.”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울고 있다.
“한수지.”
“어, 유은하?”
“울고 있었어?”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한눈에 봐도 눈 퉁퉁 부었구만 뭘.
심지어 내가 불법 가택침입을 했는데도, 딱히 별 말 없는 거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김재수일 때문인가.”
“맞아. 커뮤니티에서 나보고 빌런이라고 하는 애들까지 있어.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니냐고.”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커뮤니티인데. 갤질하는 곳을 구태여 들여다보면서 욕을 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다.
나야 활약한 것이 있으니 눈나취급이지만, 일부 여자들이 나를 욕하는 경우도 있다.
빌런이라기 보다는 어린 년이 알로 까졌다느니 기타등등.
“일 터졌을 때는 아무 일 없었잖아.”
“단체전 있고 나서, 박준혁 때문에 우리 아카데미 빌런 아카데미 아니냐는 소리 나왔잖아.”
“그랬지.”
“그 때문에 갑자기 김재수. 그 인간 일도 터진 것 같아.”
김재수 당시에는 아카데미 자체가 습격받은 일이라 한수지에 대해서는 크게 떠오를 만한 일이 없었다.
그저 한성 아카데미의 보안이 취약하다고만 했다.
그것도 상대가 김재수라 어쩔 수 없었다는 실드를 치는 헌터들도 있었으나, 이번 일은 다르다.
한국 3대 아카데미 단체전을 통해 전국을 시작해서 세계헌터연합까지 알려진 죄악의 존재. 그 죄악의 신도가 한성 아카데미의 생도 박준혁이었고, 심지어 장래가 기대되는 생도였던 데다가 고작 파편만으로 A급 괴인이 되었었다.
수년 전, 사천왕을 겨우 잡은 인류의 입장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고, 사천왕 처단의 일등공신인 유진석이 있는 한국은 더 그랬다.
빌런 아카데미란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흐음. 그럼 좋은 방법이 있어.”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한수지 두 손을 잡았다.
“무슨 방법?”
“그놈들 말대로 빌런짓하자.”
내 말에 한수지가 내 손을 밀치며 뒤로 물러났다.
찰랑이는 붉은 머리가 오늘따라 유독 요염해보인다.
“뭐?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빌런이 되자고.”
사람들이 빌런이 되기를 원한다면 되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 나 지금 머리가 이해를 못하는데, 내 귀가 정확하게 들었으면 너는 지금 나한테 범죄자가 되자는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진짜 빌런짓하면 속쓰린 것도 덜할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그런 법이다. 자신이 피해보지 않더라도. 깔만한 가십거리가 있으면 달려들어서 물고 뜯는다.
그러다가 깔 만한 일이 알고 보니 억울한 일로 밝혀지면 사람들은 “아님 말고.”식으로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간다. 댓글이나 삭제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한성 아카데미는 지금 딱 그런 꼴이다.
아마도 서울이랑 고려아카데미에서 언론에 입김 넣은 것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불안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수지는 일개 생도고 의지할 곳 하나없는 몸이다. 멘탈 바사삭 바로 직전이라는 뜻.
“너 진심이야? 홧김에 말하는 게 아니라?”
“당연. 이미 내가 수장인 조직도 있어.”
레이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또 했다.
이번엔 조금 더 간결하게. 한수지는 아직 따먹을 타이밍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수지는 뭐랄까.
좀 노 꼴이다. 하라면 할 수는 있는데, 아직은 그렇게 색기가 없는 느낌? 오, 예쁜데? 요염한데? 이렇게 감탄하다가도 막상 따먹을까? 하면 고민하게 되는 그런? 애초에 그 특유의 성격 때문에 막상 먹으려고 하면 망설여진다.
키스까지는 가능하더라도 따먹으면 한수지쪽에 의해 호감도가 확 떨어질 것 같은 느낌?
“한마디로 사회에 불만이 많아 들고 일어난 집단아니야?”
그런데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건가. 이년은 대뜸 시비다.
“내 이야기 제대로 들었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 정의라면 정의다. 썩어빠진 언론집단보다야 차라리 빌런이 되어 격리지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낫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빌런짓이라면 이것저것 할 거 아니야.”
“걱정마. 안 들키게 격리구역에서 놀거나 게이트나 돌 거야.”
당장 격리구역에 있는 던전들로 재미를 보기도 모자란데, 도시에서 범죄나 저지르는 찌질이 빌런들과는 다를 거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있다면 죽일 것이다.
“그게 어떻게 안 들키겠냐구.”
“지금 나와 함께 한다면 유혈사태는 없을 것이야.”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줘.”
퉁퉁 부은 눈으로 훌쩍이면서 고개를 돌리는 한수지.
생각할 시간을 주면 한참걸린다.
그냥 여기서 끝장을 봐야지.
나는 한수지의 양볼을 잡고 돌려 나와 마주보게 했다.
“김재수도 뒈졌고, 박준혁도 이제는 인생 끝났으니까. 성좌 무신을 내가 붙여줄게. 어때?”
“아.알았어.”
결국 한수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것은 덤이다.
한수지는 요즘 시대에 찾기 힘든 무인이다.
무인으로써 무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신의 성좌를 내가 붙여준다고 했으니, 한수지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수지는 정의감이 투철한 여자는 아니었다.
최시우가 무조건적인 용사, 정의라고 치면 한수지는 조건부 정의.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하고, 사랑을 다 바치면서 주인이 바라는 일을 몸소하는 인물.
원작에서도 최시우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원작의 후반부에서 최시우가 죄악과 싸우기에 앞서 한수지가 최시우에게 말한 대사가 있다.
네가 선이든 악이든. 나는 네가 가는 길에 너를 방해하는 자는 빌런이든, 설령 죄없는 민간인이든 전부 없앨 거야.
무조건적인 사랑과 충성을 하는 인물, 실제로 한수지란 여자는 죄악에 빌붙었던 길드를 처리할 때, 한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도륙했다.
초반부부터 확립된 특유의 전사캐릭터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 부분이 겉으로 도드라지지만 않았을 뿐.
나는 그런 애절한 사랑을 받고 싶다.
근데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따먹고 싶다.
어쩌지? 따먹어? 아니야 조금만 참자. 당장 레이나를 먹었는데, 바로 한수지를 취하는 건 나도 양심이 있다.
죄악이 뜬 시점에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카데미가 휴교가 되었으니 지금 다 판을 깔아둬야 한다.
지금 굳이 한수지를 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케이트.”
나는 한수지의 집 냉장고에서 알아서 아이스크림을 찾아먹는 케이트를 불렀다.
“네. 다하카님.”
“한수지를 레이나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줘. 이따가 아이스크림 줄게.”
“잠깐, 이 꼬맹이는 누구?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 내 집 열려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들어왔어?”
그걸 이제 알아차려도 늦었다.
“네. 다하카님.”
한수지를 송도 팬트하우스에 보냈다. 그리고 다음은 이유정의 집이었다.
“이유정 선배.”
“어. 으.응?”
이유정은 주식차트를 보고 있었다. 과연 돈많은 여편네 다웠다.
“선배도 나와 함께 가죠. 앞으로 빌런짓할 거에요.”
이유정은 따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냥 직구다.
어차피 이 여자는 이미 내가 아지다하카라는 사실도 아니까 말이다.
“어, 음. 정말로 할거야?”
“네. 걱정마요. 들키더라도 평생 내가 지켜줄 테니, 그냥 몸만 따라오세요.”
언뜻보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유정이 할 일이 많으니 조금 죄책감도 든다.
“정말?”
“그래요. 정말. 설마 나랑 잠까지 잔 주제에 이대로 뺄 셈은 아니죠? 제가 그리는 미래에 선배가 필요해요.”
빌런이 나쁘기는 나쁜데, 그저 세간에 알려진 인식대로 범죄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좋아.”
“네?”
이렇게 쉽게 나를 따라오겠다고?
“내가 없다고 빌런짓 안 할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 있어서겠지?”
“네.”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질색이야. 따라갈게.”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물이 다 있을까.
나는 이유정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녀도 나랑 입을 맞췄다가 잠시 후, 싱긋 웃었다.
“애초에 지금 아카데미가 빌런아카데미취급 받고 있는데 뭘 어쩌겠어? 정말 빌런짓이라도 해야지.”
‘한성아카데미는 빌런아카데미다.’
이런 취급은 원작에서 없었다. 다시 말해 없던 이벤트가 생겨났다는 것. 고려아카데미와 서울아카데미의 언론플레이가 있을 테고. 특히 비올라 그 여자는 김영희한테 아카데미 실력면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이번에 작정하고 한성을 까려고 들 거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한성아카데미를 살려두느냐. 아예 자퇴하고 빌런의 길을 계속 걷느냐 하는 것. 이왕 한성이 빌런 취급받는 다면 대놓고 빌런아카데미가 되는 것.
아직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최시우가 우선이다.
“케이트. 이유정 선배도 옮겨줘. 이따 마석이랑 벨라에서 민초 6통 사줄게.”
“넹.”
케이트도 민초를 좋아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유진을 통해 민초도 팬트하우스에 꽉꽉 채워두고 있다.
그것만 먹으면 게이트 여는 속도가 10초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이유정을 팬트하우스로 옮기고 곧바로 최시우의 집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최시우는 신검 답게 협회에서 직접 챙겨주는 놈이다.
협회 근처에는 협회에서 일하는 공무원들만 가질 수 있는 저택단지가 있는데, 최시우는 그런 집 중 하나를 거저 받아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간다.
“부러운 새끼.”
아니, 유진석 동생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회사원시절을 생각하면 최시우가 너무 부럽다.
아무튼 이제는 놈이 아니라 년이니 더는 수컷이 아닌 암컷취급을 해야겠다.
저택에서 최시우를 찾다보니, 저택 뒤에 있는 수련장에서 돌핀팬츠를 입은 잿빛 머리의 소녀가 열심히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이런 미친. 시발 저게 뭐야. 이건 화가 치밀 수밖에 없다.
“너 뭐하세요?”
“어.어? 유은하?”
“아니, 돌핀팬츠에 탱크탑에. 와 씨.”
벌써 암컷타락 중이신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