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장례식이 끝난 후
맑고 푸른 하늘이 성의 작은 탑 위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이런 징
조들도 해리의 기운을 북돋아 주지는 못했다. 말포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시도도, 슬러그혼이 몇십 년 동안이나
꽁꽁 숨겨 놓고 있는 기억을 알아낼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에게 말을 붙이려는 노력도 계속 좌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말포이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려.”
헤르미온느가 해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론과 함께 햇살이 비치는 잔디밭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헤르미온느와 론은 둘 다 ‘순간이동 시 범하
기 쉬운 일반적 실수들과 그것을 피하는 법’ 이라고 적힌 마법부의 전단을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바로 그날 오후에 시험
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단들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는 데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때 여학생 한 명이 길모퉁이에서 나타나자, 론은 화들짝 놀라면서 헤르미온느 뒤에 숨으려고 했다.
“라벤더가 아니야.”
헤르미온느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오, 다행이다.”
론이 한숨을 쉬었다.
“해리 포터?”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너에게 이걸 전해 주라더라.”
“고마워…….”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보자 해리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여학생이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사라지자, 해리
가 말했다.
“덤블도어 교수님은 내가 그 기억을 알아낼 때까지 더 이상 수업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려는 게 아닐까?
해리가 양피지를 펼치는 것을 보며 헤르미온느가 추측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가늘고 길고 비스듬한
덤블도어의 필체 대신, 지저분하고 삐뚤삐뚤한 데다가 심지어 여기저기 잉크가 번진 커다란 자국들이 있어서 더더욱 읽기
힘든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친애하는 해리,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
어젯밤에 아라고그가 죽었단다. 해리와 론, 너희들은 그를 만난 적이 있으니, 그가 얼마나 특별한 거미인지 잘 알
거야. 헤르미온느, 너도 아라고그를 만나 보았다면 그를 분명 좋아했을 거야. 만약 너희들이 오늘 저녁에 그를 묻을
때 잠깐 들러준다면 무척 고맙겠다. 나는 아라고그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인 해 질 무렵에 장례식을 할 계획이란다. 너희
들이 늦은 시간에 밖에 나올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투명 망토를 사용하면 괜찮을 거야.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하기가 힘들구나
해그리드
“이것 좀 봐.”
해리가 헤르미온느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오, 이런 세상에.”
헤르미온느가 재빨리 편지를 훑어보더니 론에게 넘겨주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론은 점점 더 놀라는 표정이 되어갔다.
“도대체 제정신이야?”
론이 벌컥 화를 냈다.
“그 녀석은 자기 동족들에게 해리와 나를 잡아먹으라고 말했던 놈이라고! 실컷 먹으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해그리드는 우
리더러 거기 가서 그 징그러운 털복숭이를 붙잡고 함께 울어 줬으면 한다는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야.”
헤르미온느가 한마디 거들었다.
“해그리드는 우리더러 밤중에 성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 있어. 보안이 엄청나게 철저해졌고 혹시 들키기라도 하면 우
리가 커다란 곤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야.”
“우리는 전에도 밤중에 해그리드를 만나러 간 적이 있잖아.”
해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일 때문은 아니었잖아?”
헤르미온느가 반박했다.
“우리는 이미 해그리드를 돕기 위해 여러 번 위험을 무릅썼어. 하지만 아라고그는 죽었잖아. 혹시 그것을 살리기 위한
문제라면 또 모를까…….”
“그럼 난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아.”
론이 딱 잘라 말했다.
“헤르미온느, 넌 그 녀석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래. 말도 마. 죽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거야.”
편지를 돌려받은 해리는 온통 잉크가 얼룩진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틀림없이 커다란 눈물이 이 위로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해리, 절대 갈 생각도 하지 마.”
헤르미온느가 못을 박았다.
“그런 무의미한 일로 징계를 받을 수는 없어.”
해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도 알아. 우리 없이 해그리드 혼자서 아라고그를 묻어 줘야 할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헤르미온느는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리, 오늘 오후에 있는 마법약 수업에는 들어오는 학생들이 거의 없을 거야. 우리 모두 시험을 치르러 가니까 말이야. 그때
슬러그혼 교수님을 한번 설득해 봐!”
“37번째 행운을 노려 보라고? 그 말이야?”
해리가 비관적으로 말했다.
“행운?”
갑자기 론이 소리쳤다.
“해리, 바로 그거야. 행운을 잡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 행운의 마법약을 쓰란 말이야!”
“론, 그래…… 바로 그거야!”
헤르미온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고말고!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해리는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펠릭스 펠리시스를? 글쎄…….”
해리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나중에 쓰려고 아껴 두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다 쓰려고?”
론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이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해리?”
헤르미온느도 따져 물었다.
해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작은 황금 병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지니가 딘과 헤어지고 론은 지니의 새 남자
친구에 대해 기뻐하는 막연하고 어렴풋한 계획들이 머릿속 저편에서 마구 펼쳐졌던 것이다. 오직 꿈속에서나 혹은 잠이 들거
나 깨어나는 몽롱한 순간에만 의식할 수 있었던 계획들이…….
“해리?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야?”
헤르미느가 물었다.
“어…… 어? 그럼 물론이지.”
해리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좋아. 만약 오늘 오후에도 슬러그혼 교수님에게 말을 붙이는 데 실패한다면, 오늘 저녁에 펠릭스 펠리시스를 마시고
다시 한 번 시도해 볼 거야.”
“그럼 그렇게 하기다.”
헤르미온느는 활기찬 목소리로 결론을 내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우아한 자세로 한 바퀴 빙그르 돌았다.
“목적지…… 의지…… 신중함…….”
헤르미온느가 중얼거렸다.
“오, 제발 그만 해.”
론이 애원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단 말이야……. 이런, 어서 나 좀 숨겨 줘!”
“라벤더가 아니라니까!”
헤르미온느가 짜증을 냈다. 또 다른 여학생 두 명이 잔디밭에 나타나자, 론이 얼른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론이 헤르미온느의 어깨 너머로 라벤더가 정말 아닌지 확인하며 말했다.
“이런, 쟤들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안 그래?”
“쟤들은 몽고메리 자매들이야. 힘들어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너는 쟤들 남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소식도
못 들었니?”
헤르미온느가 물었다.
“솔직히 모든 학생들의 친척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일이 알고 다닐 수는 없잖아.”
론이 말했다.
“쟤 남동생이 늑대인간에게 공격을 당했어. 소문에 의하면 쟤 어머니가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대.
어쨌든 남동생은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성 뭉고 병원에서 죽고 말았어. 도저히 살릴 수가 없었나 봐.”
“죽었다고?”
해리가 충격을 받아 되물었다.
“하지만 늑대인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잖아? 그냥 자기들과 똑 같은 늑대인간으로 만드는 거 아니었어?”
“가끔은 죽이기도 해.”
론이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늑대인간이 완전히 이성을 잃으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 늑대 인간의 이름이 뭐였는데?”
해리가 재빨리 물었다.
“글쎄, 펜리 그레이백이라는 소문이던데.”
헤르미온느가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어린아이들을 공경하기 좋아하는 미치광이지. 루핀이 나에게 말했던 그 작자야!”
해리가 분노하며 말했다.
헤르미온느는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해리, 넌 반드시 그 기억을 알아내야 해. 그게 모두 볼드모트를 막기 위한 일이란 말이야, 안 그래?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 모두 다 그 사람 때문이야…….”
그때 성에서 종소리가 들려오자, 헤르미온느와 론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잘할 거야.”
해리가 그들을 격려했다. 그들은 순간이동 시험을 보려는 다른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현관 입구 쪽으로 향했다.
“행운을 빌어.”
“너도!”
헤르미온느가 지하 교실로 향하는 해리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날 오후 마법약 수업을 들은 학생은 해리와 어니 그리고 드레이코 말포이, 딱 세 명 뿐이었다.
“순간이동을 하기에는 모두 다 아직 어린 모양이죠?”
슬러그혼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열일곱 살이 안 됐나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슬러그혼이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학생들 수가 적으니, 오늘은 뭔가 재미있는 걸 해봅시다. 다들 뭔가 흥미로운 걸 만들어서 나에게 보여 주도록 해요!”
“그거 아주 신나겠는걸요.”
어니가 두 손을 비비며 아첨을 떨었다. 반면 말포이는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
“’뭔가 흥미로운 거’ 라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말포이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 날 한번 깜짝 놀라게 해 봐요.”
슬러그혼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말포이는 뚱한 표정으로 《상급 마법약 만들기》 책을 펼쳤다. 그는 누가 봐도 이 수업을 한낱 시간 낭비로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책 너머로 말포이를 살펴보던 해리는 그가 이 시간에 필요의 방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몹시 속상해하
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지 해리의 상상일까? 아니면 정말로 말포이가 통스처럼 전보다 더 마른 걸까? 요즘 들어 통 햇빛을 못 본 탓인
지 여전히 안색도 나쁘고, 훨씬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만한 표정이나 흥분한 기색, 잘난 척하는 태도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호그와트 급행열차에서 볼드모트에게서 지시받은 임무에 대해 공공연히 떠들 때
보였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해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한 가지였다. 그의 임무가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기운이 난 해리는 《상급 마법약 만들기》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혼혈 왕자가 잔뜩 고쳐 놓은 새
로운 제조법의 ‘유포리아(행복감 혹은 도취감이라는 뜻 : 역주) 묘약’을 발견했다. 이거야말로 슬러그혼의 요구에 딱 들어맞
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그 약을 맛보도록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기분이 좋아져서 그 기억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
른다(이 생각이 들자 해리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 이거 정말 굉장해 보이는군.”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슬러그혼은 해리의 냄비에 든 햇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색 액체를 내려다보면서 손뼉을 딱딱 치고
있었다.
“유포리아 묘약이로군. 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음…… 자네는 박하의 어린 가지를 조금 넣었군. 원칙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굉장히 독창적인 생각이야. 덕분에 이따금씩 일어나는 과도한 흥얼거림이나 코의 경련 같은 부작용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어……
. 도대체 자네는 어디서 이렇게 놀라운 생각들을 얻는지 통 모르겠단 말이야……. 혹시…….”
해리는 발로 혼혈 왕자의 책을 가방 속 깊숙이 쑥 밀어 넣었다.
“자네 어머니의 천부적인 재능이 자네에게서 꽃을 피운 게 아니라면 말일세!”
“아…… 네…… 어쩌면요.”
해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니는 몹시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어떤 한 번만이라도 해리를 이겨 보겠다는 성급한 마음에 경솔하게 독창적인 마법약을 만들
어 내려고 했지만, 그의 마법약은 냄비 바닥에 무슨 자주색 꿀꿀이죽처럼 엉겨 버렸다. 한편 말포이는 뚱한 표정으로 벌써 가방
을 싸고 있었다. 슬러그혼이 그가 만든 딸꾹질 치료약을 두고 겨우 ‘봐줄 만하다’ 는 한마디만 했기 때문이었다.
종이 울리자, 어니와 말포이는 즉시 나가 버렸다.
“교수님.”
해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슬러그혼은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교실 안에 단 두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마자 허둥지둥 나가 버렸다.
“교수님…… 교수님, 혹시 제가 만든 마법약을 한번 맛보시지……?”
해리가 필사적으로 불렀지만, 슬러그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몹시 낙심한 해리는 냄비를 비우고 짐을 싼 다음 지하 교실
을 나와서 천천히 휴게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론과 헤르미온느는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해리!”
헤르미온느는 초상화 구멍을 기어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해리, 나 합격했어!”
“잘됐다! 론은?”
해리가 물었다.
“론은…… 론은 떨어졌어.”
론이 잔뜩 풀이 죽어서 휴게실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 오는 걸 보며 헤르미온느가 속삭였다.
“정말로 운이 나빴어. 아주 사소한 실수였는데…… 론이 한쪽 눈썹의 절반을 떨어뜨려 놓고 온 걸 시험관이 발견했지 뭐야
……. 슬러그혼 교수님과는 어떻게 됐니?”
“좋은 소식은 없어.”
해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론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운이 나빴구나, 친구. 하지만 다음번에는 꼭 통과할 거야. 우리 함께 시험을 치르면 되잖아.”
“그래, 할 수 없지 뭐.”
론이 불만에 가득찬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눈썹 반쪽이라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게 말이야…….”
헤르미온느가 그를 위로했다.
“정말 너무 심한 것 같아…….”
세 사람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순간이동 시험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휴게실로 돌아갈 때가 되자 론은 조금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고, 그들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슬러그혼과 기억의 문제에 대해 다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해리, 펠릭스 펠리시스를 사용할 거야 말 거야?
론이 물었다.
“응,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해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전부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열두 시간의 행운까지는 필요 없어. 설마 그 일이 밤새도록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한 모금 정도만 마실래. 두
세 시간이면 되겠지.”
“그걸 마시면 정말 기분이 최고야.”
론이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을 해도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헤르미온느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넌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난 그때는 정말 마신 줄 알았단 말이야!”
론은 마치 당연한 사실을 설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게 그거지 뭐…….”
그들은 슬러그혼이 방금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가 느긋하게 식사하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휴게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슬러그혼이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쯤에 해리가 찾아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태양이 금지된 숲의 나무 꼭대기에 걸리자, 그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일단 네빌과, 딘, 시무스가 모두 휴게실에 있다는 걸 조심스럽게 확인한 후에, 그들은 남학생 침실로 몰래 올라갔다.
해리는 트렁크 바닥에서 돌돌 만 양말을 꺼낸 다음, 그 속에서 반짝거리는 작은 병을 끄집어냈다.
“자, 이제 마신다.”
해리는 작은 병을 치켜들고 주의 깊게 분량을 확인하며 한모금 꿀꺽 마셨다.
“기분이 어때?”
헤르미온느가 속삭였다.
해리는 잠깐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무안한 행운의 활력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전신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 무슨 일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갑자기 슬러그혼에게서
기억을 알아내는 일쯤은 당연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굉장해.”
해리가 말했다.
“정말 굉장한걸. 좋아…… 난 해그리드의 오두막집으로 갈게.”
“뭐라고?”
론과 헤르미온느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동시에 외쳤다.
“안 돼, 해리. 넌 슬러그혼 교수님을 뵈러 가기로 했잖아? 기억 안나?”
헤르미온느가 말했다.
“아니야.”
해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난 해그리드의 오두막집으로 갈 거야. 거기로 가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대왕 거미를 묻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이란 말이야?”
론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해리는 가방에서 투명 망토를 꺼냈다.
“오늘 밤에 갈 곳은 바로 거기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니?”
“아니.”
론과 헤르미온느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거 펠릭스 펠리시스 맞지?”
헤르미온느가 걱정스러운 듯이 약병을 높이 들고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뭐 다른 약이 잔뜩 들어 있는 병을 마신 건 아니겠지? 뭐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미치게 하는 약 아냐?”
어깨 위에 망토를 걸치는 해리를 보며 론이 말했다.
이 말에 해리가 큰 소리로 웃자, 론과 헤르미온느는 더욱더 기겁을 했다.
“날 믿어.”
해리가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최소한…….”
해리는 씩씩하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펠릭스는 알고 있지.”
해리는 머리 위로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계단을 내려갔다. 론과 헤르미온느는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 밑에 이르자 해리는 열린 문 사이로 살짝 빠져나갔다.
“너 거기서 걔랑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라벤더가 투명해진 해리 뒤로 남학생 침실에서 함께 나오고 있는 론과 헤르미온느를 보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해리가 그들을 피해서 잽싸게 휴게실을 가로질러 달려갈 때, 등 뒤에서 론이 뭐라고 중얼중얼 변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상화 구멍을 통과하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해리가 구멍 앞에 도달했을 때, 마침 딘과 지니가 나오고 있었고, 그는 두 사람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리는 그러다가 지니를 살짝 밀치고 말았다.
“딘, 밀지 좀 마.”
지니가 짜증을 부렸다.
“넌 항상 그러더라.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야.”
초상화는 해리 등 뒤에서 곧 닫혔지만, 해리는 그 전에 잔뜩 화가 나서 쏘아붙이는 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분이 한층 더 좋아진 해리는 성 안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살금살금 걸을 필요도 없었다. 사실 그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 그는 호그와트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해리도 그 자신이 어떻게 해그리드의 오두막집으로 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걸 아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마법약이 단번에 몇 걸음 앞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최종 도착지가 어디인지, 슬러그혼이 어디서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 기억을 알아내기 위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현관 복도에 도착했을 때, 해리는 필치가 현관문 잠그는 걸 깜박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빙그레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잠시 맑은 공기와 풀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 후에 황혼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밑에 이르렀을 때, 해리는 문득 채소밭을 거쳐서 해그리드의 오두막집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유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약간 돌아가는 셈이 되지만, 반드시 지금 이 기분대로 행동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해리는 즉시 채소밭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 과연 그곳에서 스프라우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슬러그혼 교수를 발견하고는 무척 기쁘기는 했으나 전혀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야트막한 돌담 밑에 몸을 숨긴 채 더할 나위 없이 편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을 내줘서 정말 고맙소, 포모나.”
슬러그혼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건 저물녘에 따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는 게 대부분의 권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서 말이오.”
“오, 제 생각도 그래요.”
스프라우트 교수가 상냥하게 말했다.
“이거면 충분하신가요?”
“충분해요. 충분하고말고요.”
슬러그혼이 말했다. 해리는 두 팔 가득 입사귀가 잔뜩 달린 식물을 들고 있는 슬러그혼을 보았다.
“이 정도면 내가 가르치는 3학년 학생들에게 잎사귀가 몇 잎씩 돌아갈 거고 혹시 누군가가 잎사귀를 너무 푹 끓이게 되어도 여유분이 남을 거요. 그럼, 안녕히 주무시오. 다시 한 번 정말 고맙소!”
스프라우트 교수는 온실 쪽을 향하여 점점 더 어두워지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슬러그혼은 투명 망토를 쓴 해리가 서 있는 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리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서 재빠르게 망토를 휙 벗어 던졌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이쿠 세상에, 해리, 간 떨어질 뻔했다.
슬러그혼이 우뚝 멈춰 서서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성 밖으로 빠져나왔니?”
“필치가 문을 잠그는 걸 깜박 잊은 모양입니다.”
해리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슬러그혼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이 일을 보고해야겠군. 그 사람은 정작 해야 할 안전 조치는 뒷전이고 다른 잡다한 일에 더 신경을 쓰고 다닌단 말이야……
. 그건 그렇고 자네는 왜 나와 있는 건가, 해리?”
해리는 그 순간 정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해그리드가 굉장히 상심해 있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겠죠, 교수님? 해그리드가
곤란해 지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그의 말에 슬러그혼의 호기심이 발동한 게 분명했다.
“글쎄,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네.”
슬러그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덤블도어가 해그리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그자가 설마 무슨 끔찍한 일을 꾸몄을
리는 만무하고…….”
“사실은 대왕 거미 때문입니다. 해그리드는 몇 년 동안 그 거미를 돌보았거든요……. 그 거미는 숲 속에 살았었죠…… 꼭
사람처럼 말도 하고 모든 걸 다…….”
“나도 저 숲에 애크로맨투라(인간의 말을 하고 눈이 여덟 개 달린 괴물 거미 《신비한 동물 사전》 참조 : 역주)가 산다는
소문은 들었네.”
슬러그혼은 컴컴한 숲을 힐끗 넘겨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해리가 대답했다.
“’아라고그’ 라는 이 거미는 해그리드가 제일 처음 기른 건데, 어젯밤에 죽었답니다. 그래서 해그리드가 많이 슬퍼하고 있죠
. 거미를 묻을 때 누가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해서 제가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감동적이군. 아주 감동적이야.”
슬러그혼은 뭔가 딴생각에 잠긴 듯이 커다랗고 축 처진 눈으로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해그리드의 오두막집 불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크로맨투라의 독은 아주 귀중한 건데……. 그 거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아직 독이 말라 버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물론 나는 해그리드가 크게
상심하고 있는 마당에 경우 없는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네. 하지만 혹시 조금만이라도 얻어 낼 수 있는 무
슨 방법이 있다면…… 사실 애크로맨투라가 살아 있을 때 그 독을 얻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서…….”
슬러그혼은 해리에게 말한다기보다는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 독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굉장한 낭비라 할 수 있지……. 1파인트(0.5리터 정도에 해당함 : 역주)에 100갈레온은 할 텐데…
…. 솔직히 내 봉급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되고…….”
이제 해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해리는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말했다.
“저…… 혹시 교수님도 함께 가신다면, 해그리드가 아마도 굉장히 기뻐할 텐데요……. 아라고그에게 더 그럴듯한 장례식
이 될 테니까요…….”
“그럼, 그렇고말고.”
그의 두 눈은 이제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해리, 그럼 말일세. 내가 술을 한두 병 가지고 거기로 가도록 하겠네……. 그 불쌍한 짐승의 건강…… 아니, 그건 아니지
…… 하여튼 건배라도 하자고. 그 녀석이 일단 땅에 묻히게 되었으니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보내 줘야지. 넥타이도 좀 바
꿔 매야겠구먼. 그런 일에 매고 가기에는 이건 약간 화려해서 말이야.”
슬러그혼은 서둘러 성으로 돌아갔다. 해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분으로 해그리드의 오두막집을 향해 달려갔다.
“왔구나.”
문을 연 해그리드는 자기 앞에서 투명 망토를 벗는 해리를 보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하지만 론과 헤르미온느는 같이 못 왔어요.”
해리가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요.”
“괜…… 괜찮다……. 네가 와서 그 녀석도 감동받았을 거야, 해리…….”
해그리드는 흑흑하고 크게 흐느꼈다. 해그리드는 꼭 구두약을 흠뻑 묻힌 걸레 조각 같은 것으로 검은 완장을 만들어 팔에 두
르고 있었는데, 뻘겋게 충혈된 그의 눈은 부석부석하고 퉁퉁 부어 있었다. 해리는 위로하듯이 그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거기
가 해그리드의 몸에서 해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었던 것이다.
“아라고고를 어디다 묻을 건가요?”
해리가 물었다.
“숲에다 묻나요?”
그럴 수가 없게 됐어, 젠장.”
해그리드가 셔츠 자락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라고그가 죽은 후로는, 다른 거미들이 자기네 거미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구나. 결국 그 녀석들이 날 잡아먹지
않았던 건 순전히 아라고그의 명령 때문이었던 거야! 도대체 넌 그게 믿어지니, 해리?”
솔직한 대답은 물론 ‘네’ 였다. 예전에 론과 함께 애크로맨투라들과 맞부딪혔을 때 벌어졌던 소름 끼치는 광경을
너무나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오직 아라고그 때문에 해그리드를 잡아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전에는 숲이라면 어디든지 드나들었는데!”
해그리드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라고그의 몸을 거기서 꺼내 오는 것도 쉽지 않았어. 그 녀석들은 대개 죽은 동족들을 먹어 버리거든……. 하지만
난 그에게 제대로 장례식을 치러 주고 싶어……. 격식을 갖춰서 보내 주고 싶다고…….”
해그리드는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해리는 그의 팔꿈치를 톡톡 두드려 주면서, 마치 이미 한 번 해 봤던 말처
럼(왜냐하면 마법약이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말했다.
“여길 내려오다가 슬러그혼 교수님을 만났어요, 해그리드.”
“무슨 말썽은 안 생겼니?”
해그리드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는 해가 진 후에 성 밖으로 나오면 안 되잖아. 나도 알아……. 이게 다 내 잘못이야.”
“아니, 아니에요. 슬러그혼 교수님께서는 제 말을 듣더니, 당신도 여기에 오셔서 아라고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해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좀 더 적당한 복장으로 갈아입으러 가셨어요……. 교수님 말씀이 아라고그를 추억하며 건배를 할 수 있도록 술도
몇 병 가져오신대요.”
“그랬어?”
해그리드는 몹시 놀라면서도 깊이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참…… 친절하기도 하시지. 널 일러바치지도 않으시고 말이야. 난 이제까지 호레이스 슬러그혼 교수님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지
도 않았는데…… 그 분은 죽은 아라고그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단 말이지? 아라고그도 좋아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해리는 내심 아라고그가 슬러그혼을 보고 좋아할 거라고는 그 푸짐한 살덩어리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 없이 해
그리드의 오두막집 뒤쪽 창문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죽은 거미가 저 바깥 뒷마당에 뒤집혀서 쓰러져 있는 흉측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의 다리는 안으로 말려 들어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해그리드, 아라고그를 여기, 이 집 마당에 묻을 건가요?”
“바로 저기 호박 밭 너머에 묻을까 해.”
해그리드가 잔뜩 목이 메어 말했다.
“내가 벌써 무…… 무덤을 파 놓았어. 그리고 아라고그를 기리는 말이나 몇 마디 할 생각이야. 뭐 행복했던 기억 같은 거 말
이야…….”
해그리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뚝 끊어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해그리드는 언제나처럼 점 무늬의 손수건
으로 코를 팽 풀고는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점잖은 검은색 넥타이를 맨 슬러그혼이 팔 밑에 서너 개의 술병을 끼고서 황급
히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해그리드.”
슬러그혼은 굵고 엄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자네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안타까웠다네.”
“이렇게 친절하실 데가…….”
해그리드가 대답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해리를 징계하지 않으신 것도 고맙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슬픈 저녁일세, 슬픈 저녁이야……. 그 가엾은 생물은 어디 있는가?”
슬러그혼이 말했다.
“저 밖에 있습니다.”
해그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그만 시작할까요?”
세 사람은 뒷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나무들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오두막집 유리창에서 흘러나
오는 불빛과 합쳐져서 거대한 구덩이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아라고그의 몸뚱이를 환하게 비추었다. 구덩이 옆에는 방금 파
낸 흙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굉장하구먼.”
슬러그혼이 거미의 머리를 향해 다가가며 감탄했다. 거미의 새하얀 여덟 개의 눈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고, 꼼짝하지 않는 커
다랗고 구부러진 집게발 두 개는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슬러그혼이 털이 숭숭 난 거대한 머리 부운을 살펴보는 듯이
집게발 위로 허리를 숙일 때, 해리는 병들이 쨍그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녀석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누구나 다 알아보는 건 아니지요.”
해그리드가 주름 잡힌 눈가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러그혼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라고그 같은 생물들에게 관심이 있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호레이스 교수님.”
“관심이라고? 오, 해그리드, 나는 그들을 숭배한다네.”
슬러그혼이 거미에게서 물러나면서 말했다. 해리는 그의 망토 밑으로 병 하나가 반짝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연신 눈물을 닦고 있는 해그리드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장례식을 시작해 볼까?”
해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대왕 거미를 두 팔로 끌어안더니, 우렁찬 기합과 함께 구덩이 안으
로 굴려 넣었다. 거미는 우지끈, 쿵 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해그리드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자네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겠지. 아라고그를 제일 잘 알았던 사람이니 말이야.”
슬러그혼이 위로했다. 해리와 마찬가지로 해그리드의 팔꿈치 위로는 손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팔꿈치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내가 몇 마디 해도 되겠나?”
해리는 그가 아라고그로부터 꽤 많은 독을 빼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슬러그혼이 연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구
덩이 가장자리로 다가가더니, 잔뜩 감정을 잡은 목소리로 천천히 추모의 말을 읊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잘 가시오, 거미족의 왕인 아라고그여……. 그대를 알았던 모든 이들은 그대와의 진실되고 오랜 우정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비록 그대의 몸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질 것이나,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고향인 이 고요한 숲 속 보금자리에 머물
것이니…….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그대의 후손들이 영원히 번성하길! 그리하여 그대의 인간 친구들이 그대를 잃은 슬픔에
대한 한 가닥 위안을 찾을 수 있기를…….”
“저…… 저…… 정말…… 정말…… 아름다웠는데!”
해그리드는 이렇게 울부짖으며 두엄 더미 위로 털썩 쓰러지더니, 더욱더 애통하게 울기 시작했다.
“자, 자.”
슬러그혼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산더미처럼 쌓인 흙이 허공으로 붕 솟아올랐다가 죽은 거미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더니 봉긋한
둔덕을 이루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서 술이나 한 잔 하세. 해리, 자네가 반대쪽을 부축하게……. 그래…… 어서 일어나게, 해그리드……
. 잘 끝냈어.”
그들은 해그리드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바구니 속에 슬그머니 숨어 들어가 있던 팽이 그들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평소처럼 해리의 무릎 위에 육중한 머리를 올려놓았다. 슬러그혼은 가져온 포도주 병 하나를 땄다.
“독이 있는지 전부 다 검사를 한 거라네.”
슬러그혼이 해리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병의 대부분을 양동이만 한 해그리드의 잔에 콸콸 쏟아 붓더니 잔을 그
에게 건네주었다.
“자네의 그 가엾은 친구 루퍼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는, 집요정에게 일일이 모든 술을 미리 맛보게 하고 있지.”
집요정을 이렇게 부려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헤르미온느의 얼굴 표정이 어떨지 눈앞에 훤히 떠올랐다. 해리는
절대로 그녀에게 이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건 해리 자네 거고…….”
슬러그혼이 두 번째 포도주 병을 두 잔에 나누어 따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건 내 거야. 자…….”
슬러그혼은 자신의 잔을 높이 들었다.
“아라고그를 위하여!”
“아라고그를 위하여!”
해리와 해그리드가 함께 외쳤다.
슬러그혼과 해그리드, 두 사람 모두 술을 쭉 들이켰다. 하지만 안 되었다. 펠릭스 펠리시스의 예지의 의하면, 해리는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저 한 모금 마시는 시늉만 하고 탁자 위에 술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알에서 나오는 그 녀석을 내 손으로 받았는데…….”
해그리드가 슬픔에 젖어 말했다.
“막 알을 까고 나왔을 때 발바리만 한 놈이 얼마나 작고 귀여웠던지.”
“귀엽기도 하지.”
슬러그혼이 맞장구를 쳤다.
“그 녀석을 학교 천장 속에 넣고 길렀었죠. 그러니까 어……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해그리드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해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톰 리들이 해그리드에게 비밀의 방을 열었다는 누명
을 씌워서 학교에서 쫓겨나도록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하지만 슬러그혼은 해그리드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
았다. 대신 그는 수많은 놋쇠 냄비들과 길고 부드럽고 빛이 나는 하얀 실타래가 매달려 있는 천장만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게 유니콘의 털은 아니겠지, 해그리드?”
“아, 맞습니다.”
해그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녀석들 꼬리에서 빠진 거지요. 나뭇가지에 꼬리털이 걸리곤 하거든요. 아시겠지만 숲에 들어가면 사방에 널려 있지요…….”
“하지만 이보게나, 자넨 저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건가?”
“전 동물들이 부상을 입었을 때 붕대를 묶거나 하는 데 저것들을 쓰곤 합니다.”
해그리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굉장히 유용하긴 하죠. 게다가 아주 질기거든요…….”
슬러그혼은 또다시 포도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오두막집 안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둘러보고 있었다.
떡갈나무 통에서 숙성한 꿀술이라든가, 파인애플 설탕 절임, 벨벳 스모킹 재킷 같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더 많은 보물들을
찾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슬러그혼은 해그리드의 잔과 자신의 잔을 다시 채우더니, 요즘 숲에는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는지, 해그리드는 그것들을
어떻게 모두 돌보는지에 대해 시시콜콜 캐물었다. 잔뜩 술을 마신데다가 슬러그혼의 아첨 어린 관심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해
그리드는 눈물을 멈추고 보우트러클 사육법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펠릭스 펠리시스가 해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순간 해리는 슬러그혼이 가져온 술이 머잖아 바닥날 거라는 것을 알아차
렸다. 여태껏 다시 채우기 마법을 소리 내어 주문을 읊지 않고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오늘 같은 밤에 그걸 하지 못할 거
란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었다. 과연 해그리드나 슬러그혼(이제는 용의 알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일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모두 눈치 채지 못하게, 비어 있는 술병을 향해 식탁 밑으로 지팡이를 겨누자, 당장 술병들
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해리는 그걸 보며 혼자 싱끗 미소를 지었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해그리드와 슬러그혼은 연신 신나게 건배를 외쳐 대기 시작했다. 호그와트를 위하여, 덤블도어를
위하여, 요정이 만든 포도주를 위하여 그리고 또…….
“해리 포터를 위하여!”
해그리드가 소리쳤다. 열네 잔째 포도주를 들이켜는 그의 턱 밑으로 포도주가 조금 흘러내렸다.
“맞아, 그래.”
슬러그혼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쳤다.
“파리 오터, 선택 받은 소년……. 그러니까, 뭐…… 어쨌든…….”
슬러그혼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기 잔을 비웠다.
잠시 후, 해그리드는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러그혼에게 유니콘 꼬리털 타래를 통째로 안겨 주었다. 슬러그혼은 그
것을 얼른 받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우정을 위하여! 너그러운 마음씨를 위하여! 한 가닥에 10갈레온이나 하는 털을
위하여!” 하고 연신 소리쳤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르자, 해그리드와 슬러그혼은 나란히 붙어 앉아서 서로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오도’ 라고 하는 한
죽어 가는 마법사에 대한 느리고 서글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 착한 사람들은 다 일찍 죽는단 말이야.”
약간 눈이 풀린 상태로 해그리드가 식탁 위로 푹 쓰러지면서 탄식했다. 한편 슬러그혼은 후렴구를 계속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도 오래 살지 못했지……. 네 엄마와 아빠도, 해리…….”
해그리드는 주름진 눈가에서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해그리드는 해리의 팔을 꽉 잡고 흔들었다.
“난 몰랐어. 가장 훌륭한 마법사와 마녀들은 어째서 일찍……. 끔찍한 일이야…… 끔찍해.”
슬러그혼이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영웅 오도를 고향으로 데려왔다네.
청년 시절의 오도를 알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슬프도다. 영원한 안식 속에 그를 눕혔다네.
속이 뒤집힌 그의 모자와 반으로 부러진 지팡이와 함께.
“……끔찍해…….”
중얼중얼하던 해그리드는 덥수룩한 커다란 머리통을 팔 위로 픽 쓰러뜨리더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정신없이 곯아 떨어졌다.
“미안하네.”
슬레그혼이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어째 노래가 제대로 안 나오는구먼.”
“해그리드는 교수님 노래를 듣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에요.”
해리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오, 그렇구나.”
슬러그혼은 커다란 트림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그건 저……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 아주 끔찍했어……. 끔찍했지…….”
슬러그혼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괜히 잔에 포도주를 다시 채웠다.
“아…… 아마 해리 자네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겠지?”
슬러그혼이 어색하게 물었다.
“네. 부모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전 겨우 한 살 이었는걸요.”
해리는 해그리드가 심하게 코를 골 때마다 팔락거리는 촛불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건지 그 이후에 꽤 많은 걸 알아냈어요. 제 아버지가 먼저 목숨을 잃으셨죠. 혹시
교수님도 그걸 아셨나요?”
“나…… 난 몰랐다.”
슬러그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볼드모트는 제 아버지를 살해한 다음, 그 시신을 넘어서 제 어머니를 향해 다가갔어요.”
해리가 설명했다.
슬러그혼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겁에 질린 시선을 해리의 얼굴에서 떼지는 못했다.
“그자는 제 어머니에게 당장 비키라고 했죠.”
해리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볼드모트는 저에게 제 어머니까지 죽을 필요는 없었다고 말했어요. 그자가 원한 건 오직 저 하나뿐
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도망칠 수도 있었죠.”
“오, 저런.”
슬러그혼이 속삭였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꼭 목숨을 잃을 필요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구나…….”
“그렇죠?”
해리는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으셨죠. 아버지는 이미 목숨을 잃었지만, 어머니는 저까지 죽게 내버려
두길 원치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볼드모트에게 애원했지만, 그자는 그저 비웃기만 하면서…….”
“그만 해라!”
슬러그혼이 떨리는 손을 치켜들며 갑자기 소리쳤다.
“얘야, 이제 그만 해라……. 난 늙은이란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어……. 듣고 싶지 않아.”
“깜박 잊었군요.”
해리는 펠릭스 펠리시스가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교수님은 제 어머니를 좋아하셨죠, 그렇죠?”
“네 어머니를 좋아했냐고?”
슬러그혼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네 어머니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녀를 좋아했단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토록 용감하고…… 또 재기
발랄한 그녀가…… 정말 무서운 일이구나…….”
“하지만 교수님은 그녀의 아들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시잖아요.”
해리가 말했다.
“제 어머니는 저를 살리려고 목숨까지 내놓으셨는데, 교수님께선 저에게 고작 기억 하나 주려고 하시지 않는군요.”
해그리드가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가 오두막집을 뒤흔들고 있었다. 해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슬러그혼의 눈을 계속 바라보
았다. 마법약 교수는 그 눈길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슬러그혼이 중얼거렸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만약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해리가 분명하게 말했다.
“덤블도어 교수님은 정보가 필요하시고, 저도 정보가 필요해요.”
해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펠릭스 펠리시스가 아침이 되면 슬러그혼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슬러그혼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해리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선택받은 자예요. 저는 그자를 죽여야만 해요. 그 기억이 필요하다고요.”
슬러그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반짝거리는 그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네가 선택받은 자라고?”
“네, 그래요.”
해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얘야…… 넌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하는구나……. 넌 지금 나에게 그자를 없애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하
고 있는 거야…….”
“교수님은 릴리 에반스를 죽인 그 마법사를 없애고 싶지 않으신가요?”
“해리, 해리야, 물론 나도 그렇단다. 하지만…….”
“교수님이 절 도우셨다는 걸 그자가 알게 될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슬러그혼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 어머니처럼 용기를 내세요, 교수님…….”
슬러그혼은 퉁퉁한 손을 들더니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 순간 그는 마치 몸집만 커다란 어
린 아이처럼 보였다.
“별로 자랑스런 일은 아니었다…….”
슬러그혼이 손가락 사이로 속삭였다.
“내겐 부끄러운 일이야……. 그 기억이 보여 주는 것들이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그날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었어…….”
“그 기억을 제게 주신다면, 무슨 잘못을 하셨든 다 용서받을 수 있어요.”
해리가 설득했다.
“이건 아주 용감하고 고귀한 일이니까요.”
해그리드가 잠결에 몸을 움칠하더니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슬러그혼과 해리는 점점 녹아내리는 촛불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펠릭스 펠리시스는 해리에게 이 침묵을 깨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슬러그혼이 아주 천천히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망토 안쪽에서 작
은 빈 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해리의 눈을 응시하며 지팡이 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그러자 은빛 기억이
커다란 실타래처럼 흘러나와 지팡이 끝에 칭칭 감기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기억은 점점 더 길게 늘어나더니 마침내
끊어져서 지팡이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슬러그혼이 병 속으로 그 기억을 집어넣자, 그것은 병 속에서 가스처럼 소용돌이치며
점점 퍼져 나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마개로 막은 후, 식탁 너머로 해리에게 건네주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교수님.”
“자네는 착한 학생이야.”
슬러그혼의 살찐 뺨 위로 눈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려와 해마 같은 수염 속으로 사라졌다.
“게다가 자네 어머니의 눈을 쏙 빼닮았어……. 부디 이 기억을 보고 나서 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이 말과 함께 팔을 베고 앞으로 스러진 슬러그혼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